정부가 의대 정원 2천명 증원 정책에 드라이브를 걸자 의사단체들이 설 연휴 이후 파업을 예고하고 있다. 하지만 과거 문재인 정부의 ‘실패’와는 상황이 다를 것이라는 관측이 유력하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의과대학 입학정원 확대 발표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의과대학 입학정원 확대 발표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응급실 뺑뺑이 사망’, ‘소아과 오픈런’ 등과 같은 신조어가 생겨날 정도로 지역의료와 필수의료 체계가 붕괴 위기에 처해 있고, 정부의 정책적 의지가 단호하기 때문이다.

현재 전국 40개 의과대학의 정원은 3058명으로, 2006년 이후 18년째 동결된 상태이다. 이 수치는 2000년 의약 분업 실시에 대해 의사단체의 격렬한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당근책’으로 의대 정원을 351명 줄인 결과이다.

따라서 정부는 파격적인 의대 증원 정책을 추진 중이다. 2025학년도부터 현재 정원 3058명보다 2000명 늘린 5058명을 선발할 계획이다. 올해 대입부터 적용한다는 것이다. 의대 정원 5058명은 2029학년도까지 유지된다. 그럴 경우 2031년부터 2035년까지 최대 1만명의 추가 의사 인력이 배출될 예정이다.

대한의협과 대전협, 설날 연휴 이후 대규모 ‘전공의 파업’ 돌입 예정

대한의사협회(의협)는 설 연휴 이후 ‘파업’을 선언했고, 정부는 강력한 법적 대응 방침을 천명해 정면충돌이 우려되고 있다.

의협 대의원회 운영위원회는 지난 9일 비공개 긴급 온라인 회의를 개최해 김택우 강원도의사회장을 정부의 의대 증원 저지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 위원장으로 선출했다고 10일 밝혔다. 김택우 회장은 의대 증원에 대한 책임을 지고 지난 6일 사퇴한 이필수 의협 회장과 집행부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비대위를 이끌게 된다.

김 비대위원장은 "내주 비대위원 구성을 마치고 전공의, 의대생이 결집할 수 있는 비대위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의협은 설 연휴가 끝나면 이처럼 젊은 의사인 전공의를 앞세운 파업전략을 구사할 것으로 예상된다. 전공의 파업은 문재인 정부의 의대증원 정책을 무산시켰던 카드였다. 전공의들은 부글부글 끓고 있는 모습이다. 파격적 의대증원은 6년후부터 매년 2천명씩 의사공급을 늘림으로써 의료시장의 경쟁을 격화시키게 되기 때문이다.

전공의는 의과대학 졸업 후 1년 동안의 수련의(인턴) 과정을 끝낸 후, 전공을 선택해 전공 지식을 익히는 의사를 말한다. 보통 3~4년의 전공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대학병원에서 가장 인원이 많고, 가장 많은 일을 하는 의사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들의 파업은 대학병원 운영에 치명적이라고 볼 수 있다.

8일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이동하는 의료진. [사진=연합뉴스]
8일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이동하는 의료진. [사진=연합뉴스]

서울의 대형종합병원을 일컫는 '빅5'(서울대·서울아산·삼성서울·세브란스·서울성모병원) 병원 중 서울성모병원을 제외한 4곳의 전공의들이 정부의 의대 증원 발표에 반발해 총파업에 참여키로 결정한 것으로 지난 8일 알려졌다.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의 요청에 따라 총파업 참여 찬반 투표를 진행한 결과이다.

서울성모병원도 전공의 대표가 없어서 절차가 지연되고 있지만 파업 참여를 결정할 가능성이 높다. 대전협의 요청에 따라 지난 6일부터 임상과별, 교실별(의대 내 연구·교육·진료를 하는 조직단위)로 파업 참여 여부를 논의해 설 연휴 이후 입장을 발표할 것으로 전해졌다.

'빅5'의 전공의 규모는 각각 500명 안팎이다. 합치면 2500명에 달한다. ‘빅5’ 전공의들이 파업을 결정하면 다른 병원의 전공의들도 속속 동참할 수밖에 없다.

대전협이 전국 수련병원 소속 전공의 1만여 명을 상대로 지난해 12월30일부터 지난 3일까지 설문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88.2%가 "정부가 의대 정원을 늘리면 파업 등 단체 행동에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대전협은 오는 12일 임시 대의원 총회를 열고 의대 증원 대응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최대 4천명 증원요구했던 40개 의과대학, 돌연 350명 증원으로 후퇴...대규모 예산지원 요구?

전국 40개 의과대학 학장모임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도 지난 9일 입장문을 발표해 의대 증원 규모가 350명이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교육자원의 확충과 이에 대한 재정투입이 불투명한 상황”이라는 게 이유이다. 지난 2000년 의약분업 당시 의료계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감축했던 의대 정원 350명만 복원하자는 것이다. 이는 의협의 입장이기도 하다.

윤 대통령의 파격적인 의대 증원에 대해 찬성 입장을 보여왔던 의과대학들이 태도를 돌변해 의협과 보조를 맞추는 모습이다.

의과대학들은 지난 10월 보건복지부가 진행한 의과대학 입학정원 수요조사에서 당장 2025년부터 최대 2847명, 2030년까지는 3953명의 정원 증원이 가능하다는 답변을 제출한 바 있다.

입장문은 "필수·지역의료의 위기는 지속적인 저수가 정책,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의료전달체계, 기형적으로 확장된 실손보험 체계 등 장기간 축적된 구조적인 문제에 기인하며 의사정원은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대규모로 의대 증원을 하려면 의과대학들에게 상응하는 예산지원을 해달라는 것으로 풀이된다.

대통령실, 의료법 제59조에 따른 업무개시명령 발동이나 면허 박탈 가능성 시사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8일 서울에서 열린 의사 집단행동 중앙사고수습본부 제3차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2024.2.8 [보건복지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8일 서울에서 열린 의사 집단행동 중앙사고수습본부 제3차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2024.2.8 [보건복지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보건복지부는 설 연휴 첫날인 9일 조규홍 장관 주재로 서울과 세종을 온라인으로 연결해 '의사 집단행동 중앙사고수습본부' 회의를 열고 의협과 대전협의 집단행동에 대한 엄정대응 방침을 재확인했다. 의협 집행부에 '집단행동 및 집단행동 교사 금지'를, 전공의를 교육하는 수련병원에 '집단 사직서 수리 금지'를 각각 명령했다,

대통령실 성태윤 정책실장은 지난 8일 용산 대통령실 브리핑에서 의사 인력 확충 시급성 등을 재차 설명하면서 의과대학 입학정원을 2천명씩 늘리기로 한 데 대해 "고령화에 따른 의료수요 증가와 지역의료 개선 등 임상 수요만 감안한 것으로, 매우 보수적인 추계"라고 강조했다. 이는 윤석열 대통령이 "의대정원 확대 필요성과 취지를 국민에게 소상히 설명하라"고 지시한 데 따른 것이다.

성 실장은 "지역에서는 의사 부족이 더욱 심각하며 의료 시스템 붕괴는 지역 주민의 생명과 안전에 심각한 우려를 초래할 수 있다"며 "또 필수의료 분야의 일상화한, 과도한 근로 시간 및 번아웃은 의사 부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청사에서 기자들과 만나 의료계가 집단행동에 나설 경우, 의료법 제59조에 따른 업무개시명령 발동이나 면허 박탈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이 관계자는 "의사들은 국민 생명과 건강 보호를 최우선 가치로 여기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렇게 집단행동은 충분히 자제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면서도 "업무개시명령이나 면허취소와 같은 조치는 집단행동이 발생하거나 현실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단계에서 조치를 내린다거나 그런 상황이지만 검토하고, 충분히 (상황을) 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성태윤 대통령실 정책실장이 8일 오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의대 증원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성태윤 대통령실 정책실장이 8일 오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의대 증원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문재인 정부, 전공의 파업에 백기투항...의사 이익단체 기세만 올려주고 국민 이익은 실종돼

따라서 문재인 정부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 2020년 의대 증원을 추진했다. 전공의를 앞세운 의료계 파업이 발생하자 업무개시명령 등 강경 대응을 했다. 하지만 코로나19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국민적 불안감이 고조됐을 뿐만 아니라 1개월 이상 장기화된 전공의 파업 참여율이 80%에 달했다. 결국 2020년 9월 4일 정부가 무릎을 꿇었다. 의대 증원 정책을 중단하는 대신에 대한의사협회는 파업을 철회하는 방안에 합의했다. 업무개시 명령을 이행하지 않아 고발했던 전공의 10명에 대한 고발조치도 취하했다. 수많은 국민에게 초유의 불안감과 불편을 초래했던 의료계 파업은 단 한명의 의사도 아무런 징계를 받지 않았다.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 채 백기투항하는 사례만 남긴 것이다. 의협과 대전협 등 의료계 이익단체의 기세만 올려주고 국민의 이익은 실종됐던 셈이다.

윤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와 국민여론의 지지, 의대 증원 실현될 가능성 높아?

이번에는 과거의 전철을 밟지 않고 의대 증원이 이뤄질 가능성이 관측된다. 무엇보다도 정부의 의대 증원 정책에 대한 국민여론은 찬성이 압도적이다. 보건의료노조가 작년 12월 발표한 국민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 89.3%가 '의대 정원 확대에 찬성한다'고 답했다. 같은 조사에서 85.6%는 '의협이 진료 거부 또는 집단 휴업에 나서는 것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했다.

윤 대통령의 단호한 입장도 주요 변수로 꼽힌다. 윤 대통령은 지난 7일 'KBS 특별대담 대통령실을 가다'에 출연해 "우리나라는 고령화 등으로 의사 수요는 높아가고 의사 증원이 필요한데, 결국 국가정책이란 건 국민을 최우선에 둬야 하는 것"이라며 "의대 정원 확대는 이젠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KBS와 특별대담을 하고 있다. [사진=대통령실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KBS와 특별대담을 하고 있다. [사진=대통령실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또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의료 인력 수준이 세계최고 수준이기 때문에 의료산업의 글로벌 시장 진출이라든지, 바이오헬스케어 분야 키우기 위해서라도 의대 정원 확대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은 "과거엔 정부들이 선거를 너무 의식하고, 이 문제를 국내에서 의료소비자인 환자, 환자 가족과 의료진과의 갈등 문제로만 봤다"며 "제가 볼 땐 환자와 환자 가족 그리고 의료진 입장에서도 다같이 상생할 수 있는 그런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의대 증원이 의사와 환자 간의 갈등이라는 협소한 시각에서 벗어나 바이오헬스케어 육성 등과 같은 거시적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지적인 것이다.

윤 대통령은 "우리나라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기준으로 했을 때 의사 숫자가 최하위"라면서 “'소아과 오픈런'이라든지, 시쳇말로 '응급실 뺑뺑이'란 말이 있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이번 의대 증원 정책의 성패는 설 연휴 이후 드러날 국민여론의 향배에 달릴 수밖에 없다. 의료계는 각종 매체 등을 통한 반대 여론 전파에 전력투구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의대 증원을 원하는 국민 여론을 뒤집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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