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문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강문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국민의힘이 서울 메가시티론을 제기한 이후 현재 정계는 물론 시민사회의 논의는 크게 두 갈래로 분열되고 있다. 하나는 메가시티를 통해 수도권의 성장은 물론 국가균형발전의 기회로 도약시키자는 희망론이며, 다른 하나는 수도권의 비만과 지방의 쇠락만을 가져올 것이라는 비관론이다. 재미있게도 두 개의 상반된 시각은 도시의 탄생과 성장의 역사에 관한 학계의 오랜 이론적 맥락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하나는 진보론이고 다른 하나는 구조론이다. 전자가 우파적 시각이라면 후자는 좌파적 시각이다. 필자는 전자의 입장이다. 이 두 개의 세계관을 통해 메가시티의 시대적 당위성을 보기로 하자.

우파적 시각 진보론, 도시는 혁신과 발전의 공간

  진보론은 도시의 탄생과 성장이 자연스러운 인간정주의 집적과 확산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최적의 생존환경과 경제활동을 위한 지역에 정착했고 점차 규모가 늘어남으로써 물물교환과 상업을 극대화하고 활성화시킬 수 있는 도시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즉 도시는 인간의 본질적인 상승욕구를 실현시킬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었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도시들은 일반 시민들의 삶의 터전이었으며, 문화와 예술 그리고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였고 통치는 당연히 절대 왕정에 의해 지배된다. 왕정체제가 무너지고 민주적 시민정치체제가 도입된 현대 사회에 이르러서도 도시는 여전히 모든 시민들이 선망하는 공간으로 확산된다. 일자리가 있고 시장이 있고 교육이 있고 정보가 있고 신분상승의 기회가 도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보론이 지루한 점진적 변화만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혁신적 사건과 혁명이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고, 이것이 성장과 발전의 촉발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폭넓게 인정하고 있다. 이처럼 진보론은 도시의 탄생과 성장을 인간의 본질적인 상승욕구가 혁신과 발전으로 이어진 공간으로 보고 있다.

좌파적 시각 구조론, 도시는 착취의 공간

  반면에 구조론은 도시의 탄생이 자본을 가진 유산자 계급이 자본과 권력을 독점하고 유지하기 위해 나타났고 도시의 성장 역시 계급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는 과정이라고 보고 있다. 즉, 착취를 위한 물리적 공간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원시 공동체 사회에서 나타난 계급질서 탄생의 비극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모든 사람이 각자의 능력에 따라 사냥과 채집활동을 했고, 누가 얼마의 성과를 거두었는지에 상관없이 균등하게 분배하고 소비하던 생활은 누군가 보관의 기술을 발명하게 됨에 따라 계급사회로 변질된다. 약탈의 기술은 계급사회의 경계를 확장시킨다. 전쟁을 통해 다른 공동체를 정복하면 보다 손쉽게 잉여 식량과 노동력을 쟁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8세기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나타났던 크고 작은 전쟁의 역사는 바로 약탈을 통해 국가의 경계를 확대하고 계급질서를 더욱 확고하게 만든 과정으로 묘사된다. 

  산업혁명은 대량생산이라는 기술혁신이었고 전통적인 왕권에 도전할 수 있는 자본가계급의 출현을 가져오게 된다. 도시는 자본가계급이 더욱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최고의 공간이었다. 자본의 축적과 전쟁의 기술은 전통적인 절대 왕권을 무력화시켰고 시민사회라는 이름으로 자본가 계급의 공화정을 출현시킨다. 시민사회를 표방했지만 사실은 자본가계급의 기득권을 강화하기 위한 대표제 의회주의였고 시민은 여전히 착취의 대상일 뿐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유럽의 각 나라들이 제국주의를 앞세워 식민지를 개척하고 세력을 확장했던 역사는 바로 도시의 지배-종속관계를 국제적으로 확장시키는 전환점으로 묘사된다. 1970년대에 나타났던 종속이론과 해방신학의 설명이 바로 그러하다. 종속이론은 제국주의의 도시들이 식민지와 개발도상국가의 도시들을 값싼 원자재와 노동력 착취의 대상으로 삼고 공산품을 판매하는 시장으로 활용함으로써 영원한 지배-종속의 국제적 관계를 고착시켰다고 설명한다. 우리나라 운동권의 두 주체인 PD와 NL이 조직을 규합하고 정치적 선동의 기초로 삼아 왔던 이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구조론의 시각에서 지배-종속의 관계를 타파하기 위한 처방책은 무엇이었을까?  국제적으로는 교류의 단절과 자주성의 확립이고 국내적으로는 계급질서를 없애는 공산주의 혁명이다. 따라서 기술혁신과 도시화는 구조론의 시각에서는 악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정말? 필자는 동의할 수 없다. 인류는 도시를 통해 부를 축적했고 문명과 기술과 제도를 끊임없이 진보시켜 왔기 때문이다. 

좌파는 진보? 우파는 보수?

  여기서 잠시 우리 사회가 현재 부르고 있는 진보와 보수의 네이밍이 가진 모순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좌파는 진보, 우파는 보수라고 불리고 있다. 과연 그럴까? 진정한 진보는 바로 우파다. 우파는 언제나 인간의 노력으로 혁신과 발전이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반면 구조론에 함몰된 좌파는 과거에 설정된 구조와 관계가 여전히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결정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이들이 예측하는 미래는 언제나 암울하고 비관적이며 운명적이다. 이들의 설명과 예측은 신들린 점집 무당의 황당한 주문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공존과 협력>을 통한 도시의 진보

  역사적으로 돌이켜보면, 도시화 과정은 많은 문제를 드러내기도 했지만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오히려 혁신이 일어났고 다양한 정책과 기술 및 제도의 발전을 가져왔다. 18세기 말 런던의 처참한 주거환경과 전염병의 확산은 자본가와 정부로 하여금 노동자를 위한 주택공급과, 위생과 환경개선을 위한 도시의 인프라 구축이 궁극적으로는 노동생산성을 높임으로써 도시의 경쟁력을 강화한다는 점을 깨닫게 했다. 빈민구제와 사회복지를 위한 구체적인 법안과 정책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즈음이다. 도시에서 발생한 각종 화재와 재난사고는 소방안전과 건축물 안전을 위한 각종 법안과 제도 그리고 시설개선을 가져왔다. 도시에 확산된 전염병은 백신의 개발을 가져왔고 공공의료의 발전을 가져왔다. 현재까지 세계 각국의 방문객들에게 감탄을 주고 있는 하수도시설은 당시 런던 자본가들의 자발적인 조합 결성에 의해 추진되었다. 국가도 나서지 않는 일에 너도나도 자발적으로 십시일반 동참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거기에는 바로 도시라는 공간에서 함께 살아야 할 <공존과 협력>의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도 19세기 중반 이후 급속한 도시화를 겪으면서 정치와 행정의 혁신을 가져온다. 소도시 중심으로 1당이 독주하고 장기 집권했던 소지역주의의 관행은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됨에 따라 정치적 폐해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이는 도시정부의 구조적 개편과 정당정치의 개혁을 가져온다. 선거승리를 통해 관직을 독식하고 거래하는 엽관주의의 폐해와 아마추어리즘도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 직업공무원제와 실적제의 도입으로 혁신된다. 도시화를 통해 일반시민과 정치인 그리고 기업인들의 각성이 일어난 것이다. 미국이 가장 부유한 국가이자 패권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사실 전 세계인의 자유로운 공존과 이들의 협력이 집적된 도시화에 있었다. 

무엇을 선택할까?

  메가시티에 대한 희망론과 비관론은 바로 이 같은 두 개의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 이제 선택해야 할 때다. 희망인가 비관인가? 답은 자명하다. 끝없는 진보를 바라는 필자는 기꺼이 희망을 선택한다. 

강문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행정학과 교수(전 한국정책과학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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