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1월 9일 – 한성조약 체결

 

 1883년 임오군란 후 청나라의 내정 간섭이 심해지자 조선의 개화파 인물들은 속이 타기 시작했다.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 인물들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처럼 급속한 개화를 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청나라에 기댄 수구파가 권력을 잡았으니 기대처럼 빨리 개화를 이루기 어려워 보였던 것이다. 1884년 개화파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청나라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위해 조선에 있던 군사 중 1,500명을 베트남으로 옮겨간 것이다. 이때 일본은, 300만 엔을 빌려주고 150명의 군대를 보내줄 테니 청나라를 몰아내자는 제안을 개화파에게 했다. 

 1884년 12월 4일 밤, 우정총국 건물 완공 기념식에서의 화재를 신호로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김옥균과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개화파는 경복궁으로 뛰어 들어가 급히 고종의 신병을 확보했다. “청나라 군사가 난을 일으켜 불빛이 성안에 가득하고 대신들을 마구 죽이니 급히 자리를 옮기시어 피신하소서”라는 개화파의 말을 믿고 고종은 경우궁(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의 사당)으로 피신했다.  

갑신정변이 시작된 우정총국 건물
갑신정변이 시작된 우정총국 건물

 

 다음날 창덕궁 관물헌으로 돌아온 고종에게 개화파는 14개조의 혁신 정강을 내놓았다. 그러나 왕비의 요청으로 만들어진 청나라와 조선의 연합군이 창덕궁을 공격하자 고종은 왕비가 있는 북묘로 가버렸다. 북묘는 서울 종로구 명륜동 부근에 있던 관우의 사당이다. 사태가 불리해진 것을 알아차린 일본 공사는 개화파를 돕겠다는 약속을 저버리고 군대를 철수했고 김옥균 등 정변 주동자들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로써 정변은 실패하고 개화파의 세상은 ‘3일 천하’로 그치고 말았다.   

 청나라의 도움으로 정변을 진압하고 다시 권력을 잡은 민씨 정권은 예조참판 서상우를 특차전권대신으로 일본에 보내 정변에 개입한 사실에 대해 항의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도리어 조선 정부의 사죄와 공사관이 불탄 것에 대한 배상금 지불, 정변 시 희생된 일본인에 대한 구휼금 지급 등을 요구하고 나섰다. 갑신정변 동안 조선 민중의 습격으로 일본 공사관이 불타고 일본인들이 죽었으니 이를 사과하고 배상금을 내놓으라는 얘기였다. 처음에 일본은 교섭을 위해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를 보냈다. 그는 갑신정변 동안 일본으로 피신했던 인물이다. 조선 정부는 일본이 정변에 책임이 있고 공사관 건물도 퇴각하면서 스스로 방화했다고 주장하였다. 또 정변 주동자들을 일본으로 피신시킨 점을 들어 교섭을 거부했다. 

 그러나 일본의 전권대사 이노우에 가오루가 대부대를 이끌고 조선으로 온 후부터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일본은 이 교섭에 2개 대대의 병력과 일곱 척의 군함을 동원하였다. 이노우에는 일본 육군을 이끌고 직접 창덕궁 낙선재로 가서 고종을 만나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이에 고종은 좌의정 김홍집을 전권대신으로 삼아 협상에 응하게 하였다. 1885년 1월 7일부터 시작된 협상 결과 일본은 당초 요구한 조건 가운데 일부 양보하였지만 거의 자신들의 요구대로 조약을 맺었다. 조선이 일본의 무력적 위협에 굴복한 것이다. 1885년 1월 9일에 체결된 한성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조선국은 국서(國書)를 일본에 보내어 사죄의 뜻을 알린다.

2. 사망한 일본국 인민의 유족과 부상자에 대해 진휼하고, 일본국 상인들의 화물이 훼손, 약탈된 것을 보전하여 조선국에서 10만 원을 지불한다. 

3. 조선국은 일본군 이소바야시 대위를 살해한 흉도를 체포하여 엄벌에 처한다.

4. 일본 공사관이 심각하게 파괴되어 옮겨 짓기를 원하는 바, 조선국은 응당 건물을 내놓아 일본국이 공관으로 사용하도록 할 것이며, 증축을 위해서 조선국이 다시 2만 원을 일본국에 지불하여 공사비를 충당하도록 한다. 

5. 일본국 공관 호위병의 병영은 공관 부지를 택하여 정하고, 제물포조약 제5관에 의거하여 시행토록 한다. 

별단(別單)

1. 약관 제2·4조의 금액은 일본 화폐로 계산할 것이며, 3개월을 기하여 인천에서 완불한다.

1. 제3조의 흉도를 처단함은 입약 이후 20일을 기한으로 한다.

 한성조약이 체결된 후 조선은 사죄를 위해 서상우와 독일인 고문 뮐렌도르프를 전권대사로 임명해 일본에 파견했다. 이들은 정변 주동자인 김옥균을 조선으로 보내달라고 일본 측에 요구했다. 일본 측은 송환을 거부했지만 암살에 대해서는 묵인했다는 설도 있다. 

창덕궁 낙선재의 장락문. 일본의 전권대사 이노우에 가오루가 고종을 찾아가 만난 곳이다.
창덕궁 낙선재의 장락문. 일본의 전권대사 이노우에 가오루가 고종을 찾아가 만난 곳이다.

 

 한성조약으로 일본은 갑신정변으로 입은 피해를 보상받은 것은 물론 청나라에 밀렸던 조선에서의 세력을 회복하였다. 조선이 일본에 사과받아야 할 사안인데 오히려 사과와 배상을 하게 된 한성조약,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만회하기 위해 청나라와 톈진조약을 맺었다. 그 주요 내용은 일본, 청나라 중 한 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보낼 때는 자기네끼리 서로 알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두 나라 중 한 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보내면 조선이 원하지 않아도 다른 나라도 군대를 보낼 수 있다는 내용도 있었다. 조선은 이 조약의 당사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톈진조약은 이후 조선의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글 황인희 작가(다상량인문학당 대표·역사칼럼니스트)/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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