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 1월 3일 – 충청도의 이름을 회복한 날

 이조에서 “서원현(西原縣)의 고을 칭호를 강등시킨 지 올해로 10년 기한이 찼으니 청주목(淸州牧)으로 승격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아뢰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또 “청주목으로 고을 칭호를 승격시킨 상황에서 공충도(公忠道)는 충청도(忠淸道)로 그 칭호를 전대로 회복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이도 윤허하였다. 

 이 글은 <고종실록> 1871년 1월 3일자에 실린 내용이다. 원래 조선 8도의 명칭은 해당 도(道) 안에서 으뜸가는 고을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이를테면 함경도는 함흥과 경성(鏡城), 평안도는 평양과 안주, 강원도는 강릉과 원주, 황해도는 황주와 해주, 충청도는 충주와 청주, 경상도는 경주와 상주,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이름이다. 경기도는 서울을 뜻하는 글자 경(京)과 궁궐 주위 500리 이내 지역을 뜻하는 글자 기(畿)를 합한 이름이다. 지금 이 지역을 수도권이라 부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역모나 반란 등 커다란 사건이 일어나면 죄인과 관련된 고을의 품격을 강등하고 수령 고을로서의 지위도 박탈한다. 이런 경우 고을 이름이 사라지니 그 이름을 따른 도 이름도 바뀌게 된다. 위의 실록에 나온 것처럼 ‘청주목’에 문제가 생겨 ‘서원현’으로 강등된 경우 ‘목’의 지위도 잃는 것은 물론 ‘청주’라는 지명이 일단 사라지니 더 이상 ‘충청도’가 될 수 없다. 그래서 버금가는 고을 공주와 충주의 첫 글자를 따서 ‘공충도’라 부르게 된 것이다. 

충청도. [사진=위키백과]
충청도. [사진=위키백과]

 

 위 실록에 실린 기사 바로 이전에 나오는 청주의 강등 조치는 10년 전이 아니라 45년 전인 1826년에 있었다. 정상채(鄭尙采)와 박형서(朴亨瑞)가 반란을 일으키려 모의하다가 붙잡혔는데 그들의 주 활동 지역이 청주였던 것이다. 

 정상채는, 반란을 일으켜 이미 처형된 홍경래가 죽지 않았다느니, 홍하도라는 섬에서 군사를 기르고 있으며 정재룡이라는 진인(眞人)이 그들을 이끌고 있다느니, 조선 왕조를 공격하기 전에 대마도를 먼저 정벌하려고 한다느니, 반란군의 군복에 짓기 위해 면포를 사온다느니 하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트렸다. 또 군사 기르는 데 필요하다며 모금도 했다. 정상채의 주요 죄목은 ‘요망한 말로 대중을 호린 것’이었다. 박형서는 대역 죄인 정상채와 여러 가지 일로 합세했음을 자백했다. 그들은 안동을 새 도읍으로 정하고 거사를 준비했다고 했다.  

 순조 26년이던 1826년 10월 26일, 이들을 법에 따라 처벌하였으며 그들의 연고지인 청주목을 강등하여 서원현으로 삼고 충청도를 고쳐 공충도로 삼았다.  

 이렇게 죄인과 관련된 고을에 징계가 내려진 경우는 다른 도에도 다양하게 적용되었다. 함경도는 원래 함흥과 길주를 따 함길도였는데 이시애의 난 이후 이시애의 고향인 길주는 ‘반역향’이라는 이유로 길성현으로 강등되고 도 이름에서도 퇴출되었다. 1470년 영흥과 안변의 첫 글자를 따라 영안도가 되었다가 1498년에 함흥이 부로 승격되어 함경도가 되었다. 태조 이성계의 근거지였던 함흥을 도 이름에 포함시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명종 때인 1549년, 수십 명이 죽고 수백 명이 유배되는 대형 옥사가 일어났는데 이때 수렴청정을 했던 문정왕후는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 반역의 땅 충주를 강등하여 유신현으로 삼고 충청도는 이제 청홍도라고 불러라”라고 직접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지금의 홍성인 홍주의 첫 글자가 포함된 것이다. 

 해주 옥사 사건 때문에 해주목이 강등되었을 때는 연안도호부를 따와 황해도를 황연도라고 부르기도 했다. 1666년 강릉에서, 전염병에 걸린 박귀남이라는 사람을 부인과 딸, 사위가 공모해 생매장한 일이 일어나자 강릉도호부를 강릉현으로 강등한 일이 있었다. 이때 강릉 대신 양양을 붙여 강원도를 원양도라 불렀다. 1675년에 강원도로 복칭되었다가 1729년에 원주에서 일어난 역모로 원주 대신 춘천을 붙여 강춘도로, 1782년 역모에 연루된 관리가 강릉에 살았다는 이유로 강릉을 빼고 춘천을 붙여 원춘도라 불렸다.

 충청도는 무려 16회에 걸쳐 도 이름이 바뀌었다. 연산군 11년(1505)에 충공도로, 명종 5년(1550)에 청공도로, 광해군 5년(1613)에는 공청도로, 인조 6년(1628)에 공홍도로, 인조 24년(1646)에 홍충도로, 효종 7년(1656)에 공홍도로, 현종 11년(1670)에 충홍도로, 숙종 7년(1681)에 공충도로, 영조 11년(1735)에는 공홍도로, 정조 원년(1777)과 순조 4년(1804)에는 공충도로 바뀌었다. 그 사이에 충청도로 돌아갔다가 몇 년 만에 다시 징계를 받아 이름이 바뀌곤 했다. 충주와 청주 대신 공주와 홍주가 수령 고을이 된 적도 많고 조선 왕조 시대에 충청도의 명칭은 충청도가 아니었던 기간이 충청도였던 기간보다 길다.

 전라도도 비슷한 경우를 많이 겪었다. 그런데 전주는 왕실의 본관이었기 때문에 ‘반역향’으로 지정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전’자를 잃은 적은 없었고 전광도, 전남도 등으로 바뀌었다. 또 다른 예외가 있었는데 경상도와 평안도 지역 등은 홍경래 난 같은 큰 반란이 일어났어도 도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는 점이다. 인접 국가인 일본이나 중국과의 외교 문제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황인희 작가(다상량인문학당 대표·역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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