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
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

 

우리가 오늘날 빈번히 사용하고 있는 '한민족' '중화민국' 'oo민족' '민족oo'하는 '민족'이란 말은 매우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지만 사실 백년밖에 안된다.

민족이란 단어, 개념 역시 근대의 산물이다. 그리고 민족(nation)을 구성하는 것으로 한국이라는 개념은, 20세기 초반에 등장했다는 역사적 맥락에서 볼때 좀더 민주적이고 포괄적인 형태의 정치행위를 가능하게 한 근대적 구성물이라고 할 수 있다(헨리 밈, 한국의 식민지 근대성).

민족이란 단어는 사실 근대사에서 근대화를 리드했던 일본인이 제일 먼저 만든 신조어다. 야스다 히로시에 의하면 1880년대 초 미야자키 무류가 프랑스어에서 민족으로 번역하였으며 1890년대 되어서야 종족적 민족(ethnic nation)을 의미한 개념으로 되었다고 한다.

민족이란 단어, 개념은 일본에서 직접 수용한 동아시아 지식인, 정치인들이 전파하고 마침내 정착, 보편화되는 시기가 1910년대였다.

민족은 자연발생적으로 생성되는 것이 아니다. 여러가지 집단은 정치 역학 하에서 타자에 의해 민족이 되고 민족이란 렛델이 붙여진다. 베네딕트 앤드슨이나 홉스봄이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y)라고 갈파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본에서 민족이 생긴 것은 일본 지식인들이 지적하다시피, 근대 일본인을 민족으로서 만든 것은 그 압력 하에 일본을 주권국가로서의 세계경제체계의 틀에 넣은 페리의 내함이었다고는 것이다. 즉 타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그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민족 개념 역시 아편전쟁 이후 서양열강의 압박과 침투를 조우한 중국인들이 어떻게 내부의 역량을 일치단합시켜 침략에 대응하겠냐 하는 과제가 역사의 중대한 테제가 되었다.

중국에서 민족을 최초로 적극 수용, 전파시킨 인물은 일본 망명시기의 양계초이다. 그는 1901년 '국가사상변천이동론'에서 '민족' '민족주의' '민족제국주의' 등 단어를 빈번히 사용함으로써 민족 개념을 일본어에서 수입하고 선전한다.

물론 중국의 고대에 문헌에는 민족과 유사한 단어로 '민' '족' '종(種)' '부(部)' '류(類)' 등 낱말과 '민인' '민군(民群)' '민종' '족류(族類)' 등 단어가 존재했다.

방유규(팡유우구이), 팽영명(펑잉밍)에 따르면 1837년 서양전도사들이 편찬한 '동서양고매월통계전'에 민족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그후 강유위 등이 편찬한 '강학보(强學報)'에도 이 단어를 사용했다. 하지만 민족이 중국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때는 20세기 초이며 또한 상술한 '민족' 전례와 무관하며 메이지 유신 시기 일본 지식인이 만든 신조어 '민족'을 답습한 것이다.

그뒤 손문의 혁명과 민국, 그리고 '다민족국가'로서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되면서 민족은 노상 중국 정치와 사회 전반에 걸친 큰 화두였으며 소수민족 문제 처리, 정책이 중국 내부의 정치와 학문의 과제이기도 했다.

일본에서 신조어를 생성한 민족의 단어, 개념이 중국과 한국에 전파·수용되면서 정착된 것은 앞서 말하듯 1910년대 청일전쟁, 러일전쟁 후 청국이 패망하고 민국이 창립된 대륙과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에서였다.

조선에서 처음 역사서술에서 민족주의에 초점을 맞춘 지식인은 신채호가 1908년 그의 저작 '독사신론'에서였다. 그러나 민족이란 개념이 뚜렷했던 것은 아니였다.

서울대 교수 이영훈에 따르면 민족이란 말은 조선 시대에 없었던 말이며 20세기 초두 일본에서 수입한 단어, 관념으로서 그후 1919년 조선근대사의 문학, 신문, 실업 등 전반 분야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천재적 지식인 최남선이 쓴 '3·1 독립선언'에서 사용하여 비로소 조선 대중으로 널리 전파됐다고 한다.

물론 조선조 시대에 동포라는 단어 용법이 3가지나 있었다. (1) 같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형제를 뜻하는 동포 (2) 국왕의 동포라는 말, 모든 민초는 국왕의 신하이며 왕님이 낳은 적자라는 의미의 말 (3) 우리 인간은 하늘이 낳은 아이라는 의미의 동포, 이퇴계의 '성학 10도'에 등장하는 "인간은 우리 동포"라는 것이 그 실례다.

'겨레'라는 말도 있었다. 한글 학자 최현배가 민족이란 낱말에 대항하여 조선시대의 '겨레붙이'를 사용했으나 '겨레붙이' '피붙이'는 일족, 일가 친척의 의미로서 '민족'의 말과는 아직 거리가 멀었다.

민족이란 낱말과 함께 수용된 민족의식이 20세기 일본 지배하에서 그 타자와의 대립과정에서 자신을 의식하면서 일본의 압박 하에 있는 조선인은 자신들이야말로 정치적 공동체라는 발견을 하게 되면서 민족 집단의식을 공유하게 된다고 이영훈 교수는 설파한다(대한민국 이야기).

그리고 이영훈 교수는 또 이렇게 지적한다. 백두산을 민족의 성지로 한 것 역시 민족을 발견하고 가시화하는 상징물의 생성에서 비롯되며, 백두산을 신성시한 최초의 인물은 최남선이다. 그는 백두산에서 발생한 '불함문화'야말로 조선 문명의 근원이라는 학설을 펼치며 그것을 증명하려고 1927년 백두산에 오르기도 했다. 그뒤 백두산 성지화를 해방후 남북한에서 경쟁을 벌이며 전개시킨 데는 민족이란 두터운 의식이 안받침되어 있다.

일본이 전쟁시기 '야마토 민족'을 신성시하고 아시아가 야마토 민족이 이끄는 '대동아공영권'으로 편입해야 한다고 한 주장 역시 '민족 신성화'의 창궐한 행위에 불과했다. 탄생 백년의 '민족' 그것은 종잡을 수 없는 100살의 기이하고 복잡다단한 의식체였다. 민족은 과연 다루기 까다로운 존재임이 틀림없다. 

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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