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
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

 

서양열강이 주도한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근대 100년의 역사는 식민지 시대였다는 것은 주지하는 바이다. 그런데 동아시아에서도 한반도가 식민지로, 대륙이 반식민지로 전락되는데 유독 섬나라 일본이 서양열강의 식민지로 되지 않았다.

이렇게 명백한 역사 사실을 알면서도 왜 그런 상반되는 결과가 생겼을까? 하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근원적인 원인 규명, 인식에 우리들은 오히려 어둡다.

우리가 서구 및 일제의 침략, 식민 지배를 당한 그 피지배적 역사에 대해서는 수없이도 강조하고 역사교육으로 주입시키면서도 지배자의 실력대비 비교연구는 오히려 소홀히 하고 있다. 즉 우리의 과거의 아이덴티티와 밀접히 연결된 타자에 대한 인식을 우리는 태만하고 있는 것이 현실 아닐까.

여기에 우리가 가장 필요한 것은 한중일 근대의 비교라는 전제다. 같은 비교라 해도 정서적으로 편향할 의구심도 없지 않다.

일본의 우익들이 강조하는 듯 일본인이 청나라나 조선인에 비해 우수했다는 자국우월주의적 오리엔탈리즘의 역방향으로 나아가서는 문제를 호도시키기만 할 뿐이다.

학문적으로 여러가지 시점으로 어프로치(접근)할 수 있다. 필자는 이 글에서는 주로 당시 국제적 상황, 환경의 변화, 정치적 관료시스템, 군사적 사정 등 제 측면에서 어프로치를 시도해보고자 한다.

역사 개설서 및 교과서에는 훈히 역사에서 '생긴 일=사건'에 대해서는 자세한 또는 개략적인 설명을 하지만 여기에는 역사에는 '생긴 일=사건' 외에도 '문제=의문'이 있을 것이라는 점에는 외려 무딘 반응을 보인다. 이같은 '문제=의문'을 풀지 않고 역사의 '왜?'는 풀 방법이 없다.

"일본은 왜 식민지를 면했을까?" 하는 것도 역사를 '사건'으로 보는 방식을 넘어서 '왜'라는 의문에 해답하고자 하는 '문제'를 답해가는 방식으로 보는 어프로치 방법인 것이다.

첫째, 세계적 제국 상황을 보기로 하자. 일본의 개항기가 1850-1860년인 바 이 시기의 세계열강의 정세를 봐야 한다. 이 시기는 청국도 일본도 조선도 정체된 전근대 시기라고 야유당할 정도로 사회가 약체화된다는 시기였다. 바로 이 무렵, 서양에서는 해양국가 영국이 자본주의 절정에 이르는 시대에다 세계 최강의 해군력을 구축해온 시기이다.

해군력이 강대한 이유는 그 수출선단의 항해 안전을 지키는 필요성에서였다. 세계 최강의 제국으로 군림한 영국은 인도 지배에 이어 1840년 아편전쟁을 통해 동아시아 제패, 중국을 굴복시키는데 성공한다. 청국에서 오차를 대량 수입한 대신에 아편을 팔려 했다. 그런데 영국에게 있어서 청국의 수출 법외 관세가 장벽에 되었기에 이 장벽을 제거하고자 청국에 압력을 가했다. 강력한 해군을 후광으로 세계에 대해 자유무역주의를 강요했다.

이래서 영국에 대해 무역에 협력 또는 크게 간섭하지 않는 상대국이 있으면 점령 분할지배의 식민지화 시킬 필요성이 낮아지게 된다. 1860년대의 일본 에도 바쿠후 또는 그뒤의 메이지 정부도 국제법을 준수하기를 표시했기에 일본은 다루기 쉬운 상대였다.

두번째로 국제환경의 변화 속에 일본의 적극적 개항이었다. 1860년대는 자유무역주의의 조류가 세계를 주름잡았는 바 개항한 일본에 대해 국제환경은 이미 식민지화를 회피할 점에서 일본에 유리한 쪽으로 흘렀다.

거기다 세번째로 선진국이 구비된 개명한 관료를 일본은 육성에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1860년부터 제국대학 법학부가 관료를 본격적으로 양성하기 시작했으며 1890년에 이미 근대적 관료가 성장, 1910년에는 고등문관시험이란 관료등용제가 정비되었었다.

이럴 때까지 청국과 조선은 과거시험제도의 전통적 방법을 채용했으며 진정한 의미의 근대관료과 지극히 빈약했다. 1889년에 제국헌법이 발표, 이듬해에는 제국회의가 탄생된다. 또한 자산계급층이 성장하여 정치, 상업, 재벌이 육성해진다.

1890년대에 접어들어 세계 영국은 제국주의 대외 확장붐을 타고 지구 규모로 침략해갔다. 항해기술과 철도의 발달로 아시아에 대한 침투가 더 용이하게끔 했다.

이런 정세하에 한반도를 러시아가 병탄하려 했는데 일본은 사활에 관계되는 한반도를 러시아에게 넘겨줄 수 없었다.

내셔널리즘이 홍역같이 세계에 전파되어 국익을 위해 국방비, 군사비를 늘리고 따라서 식민지 점령 지배가 하나의 붐이 되었다.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청은 결국 세계 열강의 맛좋은 제물이 되어버렸다. 근대화에 늦어진 청국은 이렇게 당하고야 만다.

일본은 운수좋게 1860년대에 세계의 조류에 순응했으나 청국은 순응하지 못한 결정적 차이가 있었다. 1853-56년의 영불 연합함대와 러시아 함대의 전쟁 중 영국은 일본해협에 관한 지식을 접수하여 이 지역이 전략적 사활에 관련된 지점이라고 깨닫는다.

그러므로 영국에 대해 일본이 독립된 강대국으로 되는 것은 좋은 일이 되었다. 그래서 일본을 독립국으로 두고 싶었던 것이다. 일본은 자체와 객관의 행운에 의해 식민지배를 면한 것이다.

일본이 서양의 식민지에서 배제된 것은 일본의 행운이었다. 일본의 조건을 일부 문명사학자들은 이렇게 꼽는다. 1. 외래문명에 관용, 수용능력이 있는 일본의 서양에 대한 태도가 유연했다. 2. 중국 조선에 비해 식자율, 국민소질이 높았기에 서양문명 수입에 튼튼한 대증기반을 마련했다. 3. 중국, 조선같이 늘 파별 투쟁 내홍이 있지 않고 에도시대 이래 일본 국내에 민족분쟁 등이 없었기에 단결력이 구비됐다. 4. 유교가 체질화되지 않은 까닭에 지배층의 전환이 신속했으며 근대 관료엘리트들이 많아서 세계인식, 세계조류를 스무스하게 적응시켰다.(노지마 히로유키) 그런데 이 4가지 조건은 청국과 조선에는 결락했거나 미약했던 부분이다.

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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