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대평가된 김구, 저평가된 이승만

한국 사회에서 과대 평가된 인물의 대표는 김구, 그와는 반대로 저평가된 대표 인물은 이승만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김구의 존재 가치의 근원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다. 임시정부의 존재 없이 김구의 인물평을 논하기는 대략난감하다.

잠시 김구의 이력을 들여다본다. 그는 1876년 황해도 해주군 백운방 텃골, 몰락한 안동 김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평생 이름을 세 번 바꾸는데, 아명(兒名)은 창암(昌巖)이었다. 부친 김순영은 주먹깨나 휘두른 덕분에 해주 감영을 제집 드나들 듯했다고 한다. 부친의 다혈질적 기질을 이어받았는지 김창암도 한 성질 하는 아이였다. 양반집 아들들에게 매질을 당하자 홧김에 부엌에서 칼을 들고나와 그들을 찔러 죽이려다 실패한 에피소드도 발견된다.

17세 되던 1892년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한다. 부정 시험, 매관매직의 작태에 분개하여 벼슬길을 단념한 그는 관상과 풍수지리 공부로 궤도를 수정한다. 그것도 잠시, 다음 해 그는 상놈의 한이 골수에 사무쳐동학에 입도하여 접주로 임명되었고, 이름을 창수(昌洙)로 개명한다. 해주 팔봉에서 거병한 김창수는 해주성 공격에 나섰다가 관군에게 패퇴한다.

이때 청년 김창수의 인물 됨됨이를 알아본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의 도움으로 귀순하여 그의 식객이 된다. 안태훈의 사랑에서 송시열을 뿌리로 둔 화서학파 성리학자 고능선에게 공맹의 학과 성리학적 대의명분과 의리, 위정척사 사상을 지도받는다.

 

#.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잡탕 사상의 회오리

고능선은 이항로의 문인인 유중교의 제자이자 의병장 유인석의 동문으로서, 당파로는 노론 계열이었다. 고능선은 청나라와 손잡고 왜적을 몰아내야 한다라면서 김창수에게 청나라로 망명을 권한다.

1875년생으로 김구와 비슷한 시기에 황해도 평산 태생인 이승만도 소년 시절 과거급제를 통한 입신양명의 푸른 꿈을 안았다. 하지만 십수 차례 낙방의 와중에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폐지되면서 진로를 극적으로 바꾼다.

배재학당에서 서양 선교사들의 지도를 통해 수구꼴통 주자성리학 선비에서 기독교를 기반으로 한 자유·인권·민주·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세례를 받았다. 이후 그의 학문과 사상은 평생 이 길에서 한 치도 벗어난 적이 없다.

반면에 김구의 학문과 사상 이력은 서당에서 과거시험 공부, 주자성리학과 위정척사 학습, 불교에 귀의해 원종(圓宗)이란 법명을 수계 받고 승려 생활, 개신교로의 귀의, 구국운동 등등 대단히 복잡하다. 그의 사상적 궤적이 얼마나 중층적이고 복합적이었는지는 조동걸의 백범 사상의 뿌리라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제기하고 있다.

백범 사상의 뿌리는 유가, 도가, 풍수도참가, 무가, 동학, 주자학, 불교 등 동양 사상을 망라한 위에 그리스도교와 계몽주의가 정착한 다원적이요, 중층적이요, 포괄적이라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그렇게 다양한 변화는 전환기를 살았던 젊은이가 보여준 지성적 고민의 단면으로 이해된다. 거기에 평민 사상과 행동주의 생활 철학이 마지막 숨질 때까지 백범을 지켰다.”

19193·1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김구는 자금난과 독립운동가들의 이탈, 변절 등으로 고난을 겪으면서도 임시정부 간판을 지키고 임정의 법통을 수호한 공적으로 건국사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해방 후 김구에 대한 미군정의 평가는 지극히 부정적이다. “무자비(ruthless)하고, 부도덕(unscrupulous)하며, 이해하기 힘든 인물이 중론인 데다가 별명도 난폭하다는 의미에서 블랙 타이거(Black Tiger)’로 불렸다.

 

#. 부강한 나라를 거부한 김구

대한제국은 일본에 병합되기 전까지 농업 이외의 산업은 존재하지 않는 전근대 사회였다. 해방 후 이 나라가 독립된 국가로 존립하기 위해서는 안전을 담보하고, 국민을 먹여 살리는 문제가 시급했다.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신산업 건설, 부의 확충, 상공업 육성이 절실한 과제였다.

불행하게도 조선과 대한제국기의 정신세계를 휘어잡은 주자성리학은 부의 축적을 죄악시했고, 산업 건설의 주역이 되어야 할 상공인을 천대했으며, 근대 사회의 필수 공공재인 사회간접자본 건설에 눈을 감았다. 그 결과 19세기 말, 20세기 초까지 물자 유통을 위한 인공적 도로와 교량이 없는 나라, 바퀴 달린 운송수단이 전무한 나라로 퇴화하였다.

근대 국가 건설 과정에서 산업·경제 부흥은 한 나라 지도자가 수행해야 할 리더십 중에서도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중요한 덕목이었다. 그렇다면 해방 후 주요 지도자 중의 한 사람으로 꼽혔던 김구는 이 분야에서 어느 정도나 준비된 지도자였을까?

해방 후 김구는 부강한 나라, 국민이 세 끼 따뜻한 밥을 배불리 먹는 나라를 거부했다. 그는 조선시대 가치관에 사로잡혀 가장 아름다운 나라’, 즉 도덕이 빛나는 동방예의지국을 건설하고자 했다. 김구의 백범일지가 그 증거물이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부강한 나라 건설을 거부하고 동방예의지국 건설을 주장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부강한 나라 건설을 거부하고 동방예의지국 건설을 주장했다.

 

백범일지에서 김구는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했다. 그가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었다. 그는 인류가 현재 불행한 이유는 인의(仁義)와 자비와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며, 이 마음만 발달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 지구 인구 모두 편안하게 살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현재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경제력도 아니다.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고 믿는다. 무력·경제력·자연과학은 차고 넘쳐서 더 이상 발전시킬 필요가 없으니 인의·자비·사랑의 마음을 발달시키는 문화의 힘을 키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근대 산업 국가 건설을 진두지휘해야 할 지도자가 물질적 욕망을 억제하고 균분과 안정을 강조하는 양반사회의 유교적 경제관을 목 터지게 주장한 것이다. 백범일지에 적힌 이 대목을 보면서 필자는 김구가 고능선이란 스승에게 배운 공맹의 학문, 성리학적 대의명분과 의리, 위정척사 키워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마디로 김구의 사상과 철학은 근대 국가가 아니라, 조선에 머물고 있었다. 해방 후 이런 지도자가 대통령에 올랐다면 대한민국은 지금 어떤 나라가 되었을 것으로 보시는가?

 

#. 영암선 철도 건설에 나선 이승만

194510월 가방 하나 달랑 들고 혈혈단신으로 환국한 이승만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전문가들과 스터디그룹을 만들어 국가통치를 위한 학습이었다. 이승만은 이런 학습 과정을 통해 당시 한국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식량과 땔감이란 사실을 알아챘다.

식량이 없으면 굶어 죽고, 땔감이 없어 얼어 죽는다. 식량은 미국 원조로 모자라는 부분을 채울 수 있지만 땔감은 당장 막대한 돈을 들여 수입하지 않으면 해결 방법이 없었다.

전문가들은 태백 탄전 지대에서 석탄을 캐서 땔감으로 사용하자. 이를 위해서는 태백 탄전 지대와 수도권을 잇는 철도 건설이 시급하다고 제안한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대통령에 취임한 이승만이 가장 먼저 시작한 사업은 영암선(영주-철암 간) 철도 건설이었다. 태백 준령을 돌파하는 영암선 건설 대역사는 6·25 전쟁으로 3년간 중단되었다가 195512월 개통된다.

이로써 태백 탄전 지대의 석탄이 수도권으로 수송되어 가정용 연료, 산업용 연료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5·16 이후 박정희 정부의 태백산 종합개발사업은 이승만 대통령의 영암선 철도 건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영암선 철도 개통 기념비.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 글씨를 비석에 새겼다.
영암선 철도 개통 기념비.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 글씨를 비석에 새겼다.

 

 

#. 전란통에 철강공장 건설 특명

이승만 대통령의 두 번째 대역사는 철강공장 건설이었다. 6·25가 휴전으로 마무리될 무렵, 유엔은 앞으로 한국이 어떤 발전전략을 채택해 먹고 살도록 할 것인가를 자문하기 위해 네이산 협회에 연구 용역을 의뢰했다. 네이산 협회는 한국에 전문가를 파견하여 산업 경제 상황을 조사한 후 네이산 보고서를 제안했다.

보고서의 핵심 내용은 한국은 전란 통에 거의 모든 사회간접자본이 파괴되었고, 남은 것은 농토와 사람뿐이니 농업 우선 발전전략을 제안했다. 내용을 보고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혀를 끌끌 찼다.

수천 년 농사를 지어왔지만 지금도 국민이 굶주리고 있는 나라가 한국이다. 그런데 우리보고 농업으로 근대화를 하라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이승만은 국제사회 전문가들이 제안한 농업 우선 발전전략을 거부하고 다른 사람들 보기에 얼토당토않은 일을 벌인다. 전방에선 아직도 6·25의 포성이 울리던 195344일 내각에 철강공장을 건설하라는 특별 지시를 명한 것이다. 그가 이런 대담한 지시를 내릴 수 있었던 이유는 미국에서 오랜 망명 생활 과정에서 산업문명의 핵심이 철강공업에 있으며, 철강이 산업의 쌀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은 덕분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에 의해 귀속재산으로 넘어온 인천의 대한중공업공사에 연산 5만 톤 규모의 평로(平爐·구식 용광로) 제강공장과 압연공장을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미국 원조 당국이 이 어려운 난국에 철강공장 건설은 무리라며 자금 지원을 거부하자 이 대통령은 우리 정부가 보유한 자체 보유불로 건설을 지시했다.

그 결과 서독의 데마그 사가 공사를 맡아 1959년부터 본격적인 생산이 개시되었다. 이 대통령은 철강공장 운영에 필요한 기술진 양성을 위해 철강 국비유학생을 선발하여 서독으로 유학을 보냈다. 이들이 귀국하여 후에 포항제철 설계에 참여함으로써 한국 제철산업이 대폭발하게 된다.

네이산 협회의 농업을 통한 근대화를 거부하고 철강공장 건설을 지시한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에 의해 건설된 대한중공업공사.
네이산 협회의 농업을 통한 근대화를 거부하고 철강공장 건설을 지시한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에 의해 건설된 대한중공업공사.

 

#. 내친김에 경제개발계획 수립

이어 이승만 정부는 대통령령으로 부흥부 산하에 산업개발위원회를 설치하고 경제개발계획 수립에 착수한다. 각계각층에서 선발된 젊고 유능한 인재, 해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전문가들이 외국에서 배운 선진 학문과 전문 이론을 동원하여 경제개발계획 수립에 나섰다.

당시 부흥부 장관 월급이 42,000환일 때 산업개발위원회 위원들에게는 사명감을 갖고 일하도록 하기 위해 장관보다 월급이 네 배나 많은 18만 환으로 책정했다. 총력전을 전개한 끝에 경제개발 3개년계획(1960~62)의 골격이 완성된 시기는 195912. 이대근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경제개발 3개년계획을 한국 최초의 계량적 기법에 의한 종합적인 중장기 경제개발계획이라고 평했다(이대근, 해방 후-1950년대의 경제, 삼성경제연구소, 2002, 468~471).

이승만 정부가 야심 차게 준비한 경제개발계획은 국무회의를 통과한 지 나흘 후 4·19가 터지는 바람에 빛을 보지 못했다가 4·19 직후 장면 정부로 승계됐다. 장면 정부는 이승만 정부 시절 완성된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을 토대로 새롭게 5개년 계획으로 발전시켰다. 이 계획도 두 달 후 터진 5·16 군사쿠데타로 빛을 보지 못하게 된다.

군사정부의 사령탑인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1722일 경제기획원을 발족했다. 이곳에서 장면 정부의 계획을 토대로 목표 성장률을 높이고 계수조정을 하여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립, 196215일 이를 확정 발표했다. 박정희 정권의 대명사나 다름없던 경제개발계획의 뿌리가 이승만 시절 작성된 경제개발 3개년계획이었던 것이다.

건국기에 우리가 주자성리학에 찌든 위정척사 사상에 바탕을 둔 동방예의지국 건설을 주장하는 구시대 지향의 지도자를 만났다면 대한민국의 몰골은 어떤 상태로 변했을까? 아마 현재의 북한이 그 유사한 모습을 상상하게 만든다. 이 나라의 건국 과정에서 이승만이라는 세계인을 만난 것이 참으로 행운이었다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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