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풍삼 박사
김풍삼 박사

 

TK라 불리는 경북·대구 지역이 여권의 '텃밭'이란 이유로 너무나 쉽게 생각되는 것 같다. 여당에서 공천 받기만 하면 누구나 당선되기 때문일까. 

이렇게 된 데에는 우선 매사 무관심한 30-40대 TK 청년들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을 말하고 싶다.

홍준표 대구 시장을 예로 들어보자.

홍 시장은 경남 창녕에서 초등학교를 졸업 후 대구에서 중고교를 6년간 다니면서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

경남 양산에서 공천에 탈락했던 홍 시장은 이런저런 궁리 끝에 대구 수성을에 와서 무소속으로 당선됐다. 이곳은 정치초년생이 출마를 위해 오랫동안 가꾼 지역구였다. 

그랬던 그는 지난 2022년 당내 대선후보 경선에서 떨어진 후 공천을 받아 대구 시장이 됐다.

이는 말하자면 다른 마을 사람이 우리 마을 동장이 된 형국이다.

그런데 대구의 은혜를 크게 입은 홍 시장은 대구시장이 되었으면 대구 시정에 전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허구한 날  현란한 화술로 중앙정치에 간섭하는 데 분주하다.

더 큰 문제는 이런 홍 시장의 행태에 대해 대구시민들이나 시민단체는 전혀 무관심한 것 같다는 점이다.

 홍 시장이 얼마 전 교수 신문에서 정한 사자성어 “견리망의(見利忘義, 눈앞 이익에 취해  의리를  잊는다)"를 언급하면서 “모든 정치인이 부끄러움이 없고 뻔뻔하다” 고 개탄했다. 

홍 시장의 정치 경력을 보면 논어의 헌문편의 '견리망의'가 아니라 장자 신목편의 '견리망의(見理亡義, 의리를  잃다)'라고 평해야 알맞을 것 같다. 정의를 아에 잃어버린 인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 옥중에 있을 때 출당시켰을 정도면 홍 시장의 잃어버린 “의(義)” 는 짐작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많다. 

오죽했으면 홍 시장의 언급에  “홍 시장은 자숙하라”는 댓글이 올라왔겠는가.

TK 지역 사람들은 의리를 매우 중시한다. 그래서 의리 없는 사람을 “의리 없는 X”이라 한다. 의리 없는 사람은 짐승만도 못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홍 시장은 “달빛고속철도”를 예비 타당조사도 없이 광주시와 합작했으며, 국회의회 권력을 업고 나라 돈 44조를 쓴다고 중앙언론에서 호되게 지적 받았다. 그는 법치를 잃어버린 행정을 행하고 있다.

이와 같은 위법행위가 '견리망의'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24년 전인 2009년 권영진 대구 시장과 광주시장이 영호남간 지역감정 해소를 위해 나라 돈으로 마련한  “달빛동맹 고속도로” 또한 정치적 허상에 불과했다.

이런 부질없는 허상으로 나라 돈을 탕진한 권영진 전 시장이 내년총선에서 국힘의 공천을 받아 당선된다면 대구는 구제 불능이다.

나이 80고개를 넘긴 2.28 1세대들은 순수한 대구 2.28민주화 운동이 달빛동맹으로 인해 광주 5.18 과 엉켜 퇴색될까 걱정이다.

대구 사람들은 국회의원이나 지자체장 선거에서 국힘당 공천만 받으면 무조건 찍어 주기 때문에 낙후된 변방이 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내년 총선부터는 의리 있고 반듯한 사람을 뽑아 TK의 자존심을 지켰으면 한다.

TK 지역은 “보수의 텃밭.” 혹은 “보수의 심장”이 아니라 선대부터 우국충정의 결기를 가졌던 분이 많았던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1. 경북 의성에서 태어난 서애 류성용은 선조에게 바른 정치를 충언했다. 모함 받고 있는 이순신 장군을 천거해 위기의 임진왜란 전시 내각을 이끌었던 명재상이였다.

2. 단종 복위를 위하여 목숨을 잃은 사육신의 한사람 박팽년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곳이 달성 화빈이다.

3. 1904년 일본으로부터 빌린 고리채 1,300만 엔을 우리 힘으로 갚자고 모금운동을 벌렸던 분이 대구의 서상돈·김광재·윤필오 등이다. 이름하여 국채보상운동이다.

4. 대구 달성공원에 대구 출신 항일 시인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비가 있다.

5. 6.25 전쟁 시 대구·부산만 남고 모두 공산당의 수중에 들어갔을 때 수많은 대구의 청년 학생들이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하여 낙동강 전선을 피 흘려 지켰다. 

대구출신 학도병에게서 전사자가 가장 많이 나왔다고 한다.

6, 1960년 2월 28일 민주와 자유를 외치면서 대구 중앙로를 달렸던 고교생이 4.19혁명을 점화했다.

7. 1965년 전국의 대학에서 한·일 회담 반대 시위를 벌였을 때 경북대학을 비롯한 대구의 대학들은 조용했다.

당시 5.16 군사정부는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해결하겠다”고 공약했다. 

민주 정치의 이념이 빵과 자유의 가치를 추구한다면 한·일 회담을 결코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대구의 대학생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당시 해방정국은 외국유학파들이 정국을 주도했다. 반면 혁명을 일으킨 박정희 소장은 경북 구미의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대구 사범학교를 졸업한 보통사람이다.

학생들의 거센 반대를 뚫고 체결한 한일 회담을 바탕으로 경부고속도와 포항제철공장에서 산업화의 쌀을 생산하여 오늘의 부국을 이뤄냈다.

당시 대구의 청년들은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냉철하게 국가 장래를 들여다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TK지역은 단순한 이념의 기준으로 “보수의 심장”이라고 평가할 곳이 아니다. 

국가발전과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살신성인으로  버팀목이 되어준 “우국충절의 고장”이라고 평가 받아야 할 것이다.

대구에 아무나 와서 신당창당 한다고 휘젓고 다니거나 정치입문의 바람몰이를 하지 마라.

김풍삼 박사(교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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