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교육의 목표·목적·가치·철학·이념이 통째로 사라진 결과 한국은 어떤 인간을, 무엇을 위해 길러낼 것인지 방향과 목표를 잃고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져

#. ‘홍익인간은 고조선의 교육 목표

지금으로부터 55년 전인 1968125, 박정희 대통령은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되는 국민교육헌장을 반포했다. 철학자 박종홍 등 당대의 석학 60여 명이 문안 작성 참여하여 총 393자로 구성된 국민교육헌장을 박 대통령의 목소리를 통해 국민에게 발표한 것이다.

국민교육헌장이란 우리나라의 교육이 지향해야 할 이념과 근본 목표를 세우고, 민족중흥의 새 역사를 창조할 것을 밝힌 교육지표다. 해방 후부터 1968년에 이르기까지 한국은 국민교육에 대한 이념과 목적, 철학과 가치관의 부재 상태였다. 당시엔 교육 목표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고조선의 건국이념으로 알려진 홍익인간(弘益人間)을 제시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홍익인간이란 널리 인간 세계를 이롭게 하는 인간의 육성이란 뜻이다. 문제는 홍익인간이란 슬로건에는 무엇을, 어떻게, 누구를 위해서, 어떤 방법으로라는 교육의 핵심 목표가 빠져 있었다. 때문에 홍익인간을 강조하면 할수록 한국 교육은 추상성에 머물 수밖에 없는 근본적 한계가 노정되어 있었다.

근대화에 필요한 이공계 인재 육성의 필요성에 직면한 박정희 정부는 과거지향적이고 추상적인 국민교육을 전면 혁신하여 이 시대에 대한민국에 태어난 국민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이고 선명하게 제시하기 위해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하여 국민에게 제시한 것이다.

그냥 제시만 한 것이 아니다. 박정희 정부는 전국의 초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이 내용을 삽입했고, 학생들로 하여금 전문을 암송하도록 주문했다. 덕분에 1960~7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녔던 세대는 지금도 국민교육헌장의 일부 내용이라도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전 국민의 정신 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 헌장 탄생의 역사적 배경

박 대통령의 국가 운영 목표는 조국 근대화였다. 근대화를 위해서는 반상(班常)의 유교적 신분 구조,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직업구조에 매달려 있는 인식체계를 전면 혁신하여 상공농사(商工農士) 위주의 테크노크라트의 나라로 만들어야 했다. 이를 위한 새로운 교육 아젠다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다.

1968년 12월 5일 역사적인 국민교육헌장 선포식 장면.
1968년 12월 5일 역사적인 국민교육헌장 선포식 장면.

 

이러한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람들은 박 대통령의 싱크 탱크 역할을 하고 있던 학자·언론인들이었다. 박 대통령은 국가 통치 과정에서 전문가들의 자문을 얻기 위해 스터디그룹을 운영했다. 대표적인 공부 모임이 화요회·목요회였다. 화요회는 대학교수들의 모임으로서 서울 종로구 당주동 사무실에서 매주 화요일 열렸고, 목요회는 중견 언론인들과의 모임으로, 매주 목요일 반도 호텔 815호실에서 열렸다.

화요회는 최문한(서울대 총장), 정재각(고려대 대학원장), 민병태(서울대 문리대학장), 박희범(서울대 상대학장), 구범모(서울대), 박관숙(연세대), 강병규(중앙대), 오주환(고려대) 등이 주요 참여자였고, 목요회는 남재희(조선일보), 임방현(한국일보), 임홍빈(한국일보), 이명영(경향신문), 주영관(서울신문), 송건호(동아일보), 양흥모(중앙일보) 등이 주요 멤버였다.

박 대통령이 직접 참석하여 이들과 토론했고, 모임에 참석한 비서관들은 회의에서 논의된 내용을 보고서로 작성하여 대통령에게 올렸다. 박 대통령은 스터디그룹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얻고 연구회의 건의 사항을 정책에 반영했다. 참석자들이 대통령에게 직접 건의하여 성과 거둔 사례는 경제건설, 벼의 신품종 개량, 국민교육헌장 제정 등이다.

 

#. 거국적 노력으로 국민교육헌장 제정

근대화에 필요한 인재 육성을 위한 새로운 국민교육헌장 제정이 필요하다는 건의를 받은 박 대통령은 19686월 권오병 문교부 장관에게 국민교육의 장기적이고 건전한 방향 정립과 시민 생활의 건전한 윤리 및 가치관의 확립을 위해 각계각층의 의견을 총망라하여 교육 장전을 제정하라라고 지시했다.

국민교육헌장 제정에 주동적 역할을 했던 철학자 박종홍 교수.
국민교육헌장 제정에 주동적 역할을 했던 철학자 박종홍 교수.

 

이 지시에 의해 문교부는 헌장 제정을 위한 기초위원 26, 심의위원 48명을 선정, 대학교수 20명을 초청하여, 3회에 걸친 초안 작성준비회를 열었다. 이러한 준비 끝에 19687월 청와대에서 대통령 주재로 제1차 심의위원회가 개최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박종홍·이인기·유형진 등이 초안 작성을 맡았으며, 대통령 주관 전체 회의 4, 국무총리 주관 소위원회 4회 등 총력전 끝에 393자의 헌장이 완성되었다. 정부는 196811월 정기국회에 국민교육헌장의 채택을 상정했고, 국회 본회의는 만장일치로 통과하여 125일 박정희 대통령이 이를 선포함으로써 현실화 되었다.

한국에서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했다는 소식을 접한 장제스(蔣介石) 자유중국 총통은 우리가 먼저 그런 것을 제정했어야 하는데, 한국에게 기선을 빼앗겼다라면서 부러워했다. 장 총통은 자유중국 주재 한국대사 김신(김구 주석 아들)에게 관련 자료 수집을 부탁할 정도로 깊은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서독에서도 독일 청년의 정신적 교량 역할을 하는 헌장 제정에 고심하고 있던 차에 한국에서 국민교육헌장 선포 소식 듣고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 군국주의적 교육칙어 모방했나?

이처럼 외국에서는 깊은 관심을 표명한 것과는 달리 국내 학계에서는 국민교육헌장이 일본의 군국주의적 교육칙어를 모방했다느니 체제와 내용이 교육칙어와 유사하다느니 하는 비난이 쏟아졌다. 국민교육헌장을 비난하는 두 가지 사례를 소개한다.

1978627일 송기숙 전남대 교수 등 11명이 우리의 교육지표라는 성명서를 통해 교육 민주화를 주장했다. 그들은 성명서에서 오늘의 교육의 실패는 민주주의에 우리 교육이 뿌리박지 못한 데서 온 것이다. 국민교육헌장은 바로 그러한 실패를 집약하는 본보기인바, 행정부의 독단적 추진에 의한 제정 경위 및 선포 절차 자체가 민주 교육의 근본정신에 어긋나며, 일제하의 교육칙어를 연상케 한다라고 주장했다.

겉으로는 교육 민주화를 주장하고 있지만, 속 내용은 국민교육헌장 비판이었다. 11명의 대학 교수들은 성명서 발표 직후 전원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이렇게 되자 전남대와 조선대 학생들이 교수 석방과 민주화를 외치며 격렬한 시위를 벌여 학생 30여 명이 구속되는 불상사를 낳았다.

 

송기숙 교수. 그는 1978년 6월 국민교육헌장이 일제하의 교육칙어를 연상케 한다면서 이를 반대하고 교육 민주화를 주장하는 성명을 발표했다가 탄압 당했다.
송기숙 교수. 그는 1978년 6월 국민교육헌장이 일제하의 교육칙어를 연상케 한다면서 이를 반대하고 교육 민주화를 주장하는 성명을 발표했다가 탄압 당했다.

 

29109년에는 곽민지의 국민교육헌장의 정치사적 의의에 대한 비판적 연구라는 인하대 박사학위 논문이 발표되었다. 이 논문에서 저자는 박정희가 국민교육헌장 제정에 동원한 지 식인들은 교육칙어 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일제의 황국신민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국민교육헌장이 교육칙어와 친화성을 갖는 것에 대해 비판적 입장 취하기 어려웠다라고 주장했다.

곽민지는 문제의 논문에서 국민교육헌장을 관통하는 박정희의 핵심 사상을 대아소아(大我小我) 사상이라고 주장했다. 국가는 큰 나(大我)이자, 나는 곧 작은 국가(小我)라고 보는 국가주의적·전체주의적 사상은 일본의 국체(國體) 사상에 뿌리 두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곽민지는 유신체제는 적어도 국민교육헌장이 선포되었던 때부터 예비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라고 기술하여 마치 국민교육헌장이 유신체제의 기둥이자 뿌리인 것처럼 주장했다.

 

#. 교육칙어와는 사상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런데 이들의 주장과는 달리 제국주의 일본 시절 제정된 교육칙어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박정희 정부가 제정한 국민교육헌장이 지향하는 가치나 방향, 목적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이 한눈에 드러난다.

교육칙어의 핵심 내용은 그대들 신민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하며, 부부간에 서로 화목하고, 붕우 간에 서로 신의하며, 스스로는 공손하고 겸손하며, 박애를 여러 사람에게 미치고, 학문을 닦고 기술을 익혀 그로써 지능을 계발하고, 덕과 재능을 성취하며, 나아가 공익을 넓혀 세상의 의무를 다하고, 항상 국헌을 중시하고 국법에 따라이다.

국민교육헌장의 핵심 내용은 공익과 질서를 앞세우며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고”,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 국가건설에 참여하고이다.

교육칙어가 유교적 전통에 입각하여 천황제를 공고히 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국민교육헌장은 대한민국 근대화에 필요한 역군 양성이 주된 목적이다.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 고유의 국체에 교육의 기본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교육칙어와 국민교육헌장은 근본적 차이가 있는 것이다.

국민교육헌장을 깊이 연구한 전문가들은 우리의 국민교육헌장에는 천황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피히테의 독일 국민에게 고함의 담론과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의 핵심 사상 담겨 있다고 지적한다.

 

#. 피히테의 독일 국민에게 고함

1806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나폴레옹 군대와 맞섰으나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대패했다. 그 결과 사상자와 포로 4만 명이 발생했고, 베를린이 함락되었으며, 12천만 프랑의 막대한 배상금을 프랑스에 제공해야 했다. 급기야 나폴레옹 군은 독일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위에 있던 나이키 청동 전차상을 전리품으로 뺏어가 루브르박물관에 전시해 놓는 치욕을 겪어야 했다.

조국이 적군에게 점령당해 국민은 절망하고 사회는 이기심으로 가득 차 도덕과 정의가 실종되고, 사람들은 나라는 잊고 제 살 궁리에 바빴다. 이런 모습을 목격한 지식인이자 철학자 피히테는 180712월부터 3개월간 매주 일요일 저녁마다 한림원 대강당에서 강연을 통해 애국심을 환기시켰다. 그의 강연 내용을 책으로 출판한 것이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다.

나폴레옹 군에 패해 절망적인 상황에서 피히테의 연설을 묶어 책으로 출간한
나폴레옹 군에 패해 절망적인 상황에서 피히테의 연설을 묶어 책으로 출간한 "독일 국민에게 고함".

 

밖에서는 프랑스 군대의 군가와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고, 실내에서는 감시자의 눈초리가 번득이는 가운데 피히테는 독일 재건은 국민정신의 진작에 있으며, 새로운 국민교육을 통해 독일 패망의 근본 원인인 이기심을 타파하자라고 주장했다.

독일이 왜 패했는가? 군대가 약해서? 아니다. 독일인 모두가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교육을 통해 국가 혼을 길러야 한다. 내일로 미루지 말고, 지금 당장 실천하자!”

독일인은 세상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이다. 이 장점이 외국의 언어와 문화에 오염되었다. 그 악을 제거하고 고유한 독일 국민의 본성 되찾고, 국가적 단합을 이루면 독일은 위대한 국가로 거듭날 수 있다.”

피히테는 미래를 선도하기 위해서는 창의적이고 열정적인 인재가 필요하다고 외쳤다. 그런 인재를 만들어 내는 교육이 독일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라고 호소했다. 피히테가 주창한 국민교육은 지식을 축적하는 교육이 아니라, 스스로 터득해나가는 인간 교육이었다. 학생들이 정신 발달의 필연적 법칙을 스스로 발견하여 자신의 정신을 계발해 나가도록 유도하는 교육, 인간은 저급한 의미의 자유를 부정하고 시간과 공간 초월하여 영원하고 절대적인 가치 추구해야 한다는 필연성을 인지하여 선()을 지향하는 존재임을 깨닫도록 하는 교육이었다.

그로부터 64년 후 1871, 독일은 보불전쟁에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를 포로로 잡는 등 프랑스에게 압도적 승리 거두었다. 지하자원의 보고인 알자스로렌 지역을 할양받는 등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프랑스로부터 받아냈고, 1807년 전리품으로 빼앗겼던 나이키 청동 전차상을 찾아다 원래 위치인 브란덴부르크 문 위에 갖다 놓았다. 보불전쟁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프랑스 육군에게 노획한 대포로 베를린에 전승 기념탑을 세웠다.

보불전쟁에서 독일의 승리는 참모본부의 활약 덕분이다. 오늘날 세계 각국 군대에서 채택한 참모본부 제도를 정립한 주인공이 헬무트 폰 몰트케 장군이다. 그는 비스마르크와 더불어 독일 통일의 1등 공신으로 추앙받았다. 독일 국민이 보불전쟁을 승리로 이끈 몰트케 장군을 열렬 환영하자 그는 이렇게 연설했다.

보불전쟁에서 독일의 승리는 나와 군인들의 공이 아니라 초등학교 선생님들의 공이다. 이 모든 영광을 그들에게 돌린다.”

몰트케 장군의 발언은 피히테의 독일 국민에게 고함을 바탕으로 독일 학교에서 시행한 교육이 보불전쟁 승리의 원동력이란 뜻이었다. 피히테 덕분에 새로운 국민교육 대대적으로 시행되었고, 그것이 프로이센의 정신적 자양분이 되어 승리의 원동력 되었다고 선언한 것이다.

 

#. 박정희에게 큰 영향을 준 막스 베버의 가치관

국민교육헌장에 담긴 또 하나의 가치관은 독일 철학자 막스 베버의 철학이다. 국민교육헌장 초안 작성의 주역인 박종홍·이인기·유형진 3인은 국민교육헌장 해설집에 해당하는 국민교육헌장 독본을 발간했다. 독본에서 저자들은 한국 사회는 서구 자본주의 발전에 기여한 기독교 윤리 의식과 같은 정신적 바탕이 결여되어 있음을 지적했다. 이 내용은 막스베버의 명저인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의 핵심을 이루는 주제다.

화요회 멤버 중의 한 사람이 서울대 총장을 역임한 최문한이었다. 그는 한국 근대화 연구, 막스 베버 연구의 선구자로서 자신이 막스 베버의 저작인 직업으로서의 정치,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번역 출간했다. 그는 화요회를 이끌며 막스 베버의 철학과 가치관, 근대화 이론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제공했다.

이러한 학자들의 생각이 박정희를 움직인 덕분에 박정희 시대에는 국가정책 곳곳에 막스 베버의 의식과 철학, 가치관이 담기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은 여러 차례 회의나 훈시를 통해 막스 베버와 피히테를 언급했다. 뿐만 아니라 1968년 발행된 실업계 고등학교 국민윤리 교과서에 막스 베버의 저서인 직업으로서의 학문,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소개하고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막스 베버는 한국 사회에 직업에 대한 책임 의식과 자부심을 가지도록 하는 긍정적 역할을 한 것이다.

 

#. 라인강 기적 본받아 한강의 기적 이루자

박정희 대통령은 박종홍, 최문한 등을 통해 막스 베버와 피히테의 사상과 철학을 이해했다. 그리고 196412, 서독 방문 통해 라인강의 기적을 일군 독일의 핵심 본질을 깊이 살펴볼 기회를 얻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을 방문, 에르하르트 총리에게 경제 건설을 위한 돈을 빌려달라고 호소하는 장면. 박정희는 독일 현지에서 라인강의 기적을 보고 한강의 기적을 이루겠다는 굳은 의지를 다졌고, 이를 위해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하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을 방문, 에르하르트 총리에게 경제 건설을 위한 돈을 빌려달라고 호소하는 장면. 박정희는 독일 현지에서 라인강의 기적을 보고 한강의 기적을 이루겠다는 굳은 의지를 다졌고, 이를 위해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하게 되었다.

 

서독 방문 과정에서 박정희는 라인강의 기적을 본받아 한강의 기적을 이루기 위해 아우토반을 토대로 경부고속도로를 구상했다. 또 독일의 직업학교 시스템을 수용하여 사농공상의 유교적 가치관 뒤엎고 중화학공업에 필요한 이공계 인력을 대대적으로 양성한다는 아이디어를 얻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피히테와 막스 베버의 이념과 철학이 바탕에 깔린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하게 되는 것이다.

박정희는 국민교육헌장을 통한 교육개혁으로 막스 베버식 금욕주의적 삶을 추구하는 근대적 인간을 배출하고자 했다. 그 결과 국민교육헌장 정신에 따라 양성된 근대적 인간이 근대화를 추진하는 합리적 관료 집단과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한국의 경제개혁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 국민교육헌장 폐기한 김영삼·노무현 대통령

독일 근대화 사상의 핵심 정수(精髓)인 막스 베버와 피히테의 사상을 수용하여 사농공상의 직업구조를 혁신하여 대한민국을 상공농사의 나라, 테크노크라트의 나라로 변모시킨 공적은 누가 뭐래도 박정희의 위대한 업적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박 대통령은 1973330일 대통령령으로 국민교육헌장 선포일인 125일을 정부 주관 기념일로 제정했다. 이때부터 1993년까지 매년 125일이 되면 교육부 주관으로 헌장 이념의 구현 다짐하는 기념식을 거행했다. 이러한 기념식을 폐지한 사람은 김영삼 정부다. 김영삼 정부는 1994년부터 국민교육헌장 기념식 행사를 폐지한 것은 물론, ··고 교과서에 실려 있던 국민교육헌장을 삭제해 버렸다.

급기야 20031127일 노무현 정부는 국민교육헌장 선포기념일을 법정 기념일에서 제외했다. 이후 대한민국은 국민을 어떤 가치관, 철학에 의해 교육시킬 것인지 교육 목표가 제시되지 않았다.

국민교육의 목표·목적·가치·철학·이념이 통째로 사라진 결과 어떤 인간을, 무엇을 위해 길러낼 것인지 방향과 목표를 잃고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져버렸다. 정신적 혼란의 와중에 동성애 조장, ()평등, 헬조선, 흙수저 금수저 등등 계급 투쟁적 좌파 교육이념이 침투하여 제 나라의 정통성과 건국 정신을 말살하는 국민정신 파괴 교육이 조직적으로 자행되었다.

헬조선은 대한민국을 불공평한 사회로 인식시키는 계급투쟁 논리가 잠복되어 있는 용어다. 이런 용어를 이용하여 한국은 사람 살기 어려운 나라라고 믿게 만드는 의식화 작업, 좌익 민중사관 바이러스 퍼져나가 자유민주 체제와 국가 정통성 뿌리째 흔들고 있다.

지금이라도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국민교육헌장, 이 시대를 관통하는 참다운 국민교육의 지표를 제정해야 한다. 그래야 혼란의 극을 달리는 대한민국 파괴 교육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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