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울의 봄’처럼 12·12를 권력찬탈의 시작으로 보는 것은 역사왜곡”

 

김영삼 정부때 이루어진 검찰의 12·12, 5·18 수사결과 및 대법원의 확정판결은 12·12는 군사반란, 5·18은 권력찬탈을 위한 내란죄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1979년 12월12일에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 신군부가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겸 계엄사령관을 불법 체포한 것과 전두환 대통령의 5공화국 출범 사이에 일정한 선을 그어놓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흥행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 ‘서울의봄’은 전교조나 좌파들이 주장해온 대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권력을 잡기위해 12·12를 일으킨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영화중에 나오는 ‘전두광 보안사령관’의 대사 “실패하면 쿠데타, 성공하면 혁명...” 같은 대사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은 법정에서 “12·12는 박정희대통령 시해라는 엄청난 사건에 대해 한점 의혹도 없는 철저한 수사를 하기위해 정승화 총장을 연행해서 조사하려던 것인데 순순히 응하지 않고, 무력을 동원해 저항하으로써 일이 커진 것”이라는 취지로 진술했다.

전 전 대통령은 특히 “그 무렵 본인은 육사 출신 장군으로서 개인적 목표였던 육군참모총장 진급 시기에는 관심이 없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주장했다.

수사와 판결에 의해 확정된 전두환 전 대통령 등 신군부의 내란행위의 결정적 시점 및 행위는 1980년 5·17 비상계엄확대조치다.

신군부는 5월 17일 오전 11시 국방부에서 주요지휘관회의를 소집,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비상기구(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설치·국회 해산 및 정치 활동 금지 등을 결의했다.

같은 날 저녁 9시에는 임시 국무회의가 열렸는데, 신군부는 무장 병력을 회의장 주변에 투입해 이같은 시국수습방안이 의결되도록 압박했다. 안건은 국무회의를 통과했고, 최규하 대통령도 이를 재가했다.

다음날부터 계엄사령부는 전국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고 계엄군을 투입했다. 국회가 계엄의 해제를 결의할 가능성에 대비해 국회를 점거했고, 김대중 김종필 등 정치인을 연행하고 김영삼을 연금시켰다.

최규하 대통령은 10·26 직후에는 국무총리로서 대통령 권한대행이었지만, 1979년 12월 이후에는 박정희 대통령과 같은 절차로 통일국민회의가 선출한 대한민국의 제10대, 정식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때문에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통해 비상계엄 확대를 결의한 것, 국무회의장에 진입해 이를 관철한 것 등이 빼도 박을 수도 없는 내란행위가 된 것이다.

12·12 이후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중앙정보부장까지 겸직하면서 비상시국을 이끌었다. 여기에 최규하 대통령은 국민들의 직접 투표가 아닌, 유신헌법의 ‘체육관선거’로 선출된 대통령이었다는 점에서 리더십을 발휘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전두환 신군부로 하여금 5·17을 결행하도록 만든 결정적 명분은 1980년 봄에 대학이 개강하자 봇물처럼 터져나온 대학생시위였다.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대학생 시위의 절정은 5월15일에 있었던 서울역시위였다. 대학생 수만명이 계엄철폐와 신군부퇴진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다 경찰과 충돌해 다수의 부상자가 나왔다.

대학생들의 민주화 시위와 더불어 4월에는 강원도 사북에서 탄광노동자 수천명이 어용노조 간부 및 가족들에게 집단린치를 가하는 폭력시위가 발생하는 등 노동계로 까지 시위와 파업사태가 확산되고 있었다.

이에대해 전두환 전 대통령은 법정에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수차례 대책을 만들어 올리는 등 시국수습을 위해 노력했지만, 아무것도 제대로 결정하지 못하는 등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였다”고 주장하면서 군이 나서게 된 동기를 설명했다.

특히, 자신이 주도하는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대통령 및 국무회의 권한인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의결한 것에 대해 “당시 대부분의 군 장성들은 한달만 더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북한의 남침 등으로 대한민국은 붕괴되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권력탈취, 내란이 아니라 나라를 구하기 위한 ‘구국의 결단’이었다는 것이다.

1980년은 북한 공산군의 남침에 의해 발생한 6·25 전쟁이 끝난지 27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2002년 월드컵때의 함성이 벌써 20년이 지난 점을 생각해보면 전 전 대통령의 이같은 주장이 과장만으로만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1980년 당시 우리 군의 주요 장성 대부분은 6·25때 초급장교 등으로 총을 들었던 사람들이었다. 실제 12·12때 신군부의 일원이었던 차규헌 정호용 같은 사람은 물론,정승화 참모총장,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등 모두 학도병 소대장 중·대대장으로 참전했다.

1980년 서을의 봄 당시 서울의 모 대학 총학생회장으로 시위를 주도했고, 나중에 국회의원이 된 한 인사는 “그때 우리가 대규모 시위 대신 최규하 대통령을 상대로 대통령 직선제 등 평화적 민주화를 요구했으면, 전두환 대통령의 5공화국 노태우 대통령의 6공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잘모르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그는 “그때 이미 주요 대학을 움직이는 학생운동 지휘부는 우리의 상황을 프랑스혁명 직후 파리꼬뮨, 1905년 러시아혁명 후 1910년 레닌혁명 때의 과도기와 비교하는 등 10·26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완성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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