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투쟁 이어지는 나라에서 4.19 같은 국민적 투쟁 터져 나와
역사에 이런 불균형 더 있어...바로 전두환 5공 정권
우리 현대사, 산업화와 민주화의 대립구도로 보면 안 돼
결국 건국과 그 이후는 '근대화'라는 키워드로 모아진다
구한말과 일제 식민지배 시기도 마찬가지
우리는 여전히 근대화의 도정에 있다

주동식 객원 칼럼니스트
주동식 객원 칼럼니스트

구체적인 내용까지 기억할 수는 없지만 강준만의 <한국 현대사 산책_1940년대편>에는 주목할만한 에피소드가 소개된다.

여순 사건 당시 현지의 분위기는 말할 수 없이 살벌했다. 반란군과 진압군이 교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이 학살당하는 일도 많았다. 국군이 현지에 진주해 이적분자를 색출하는 과정에서 고문과 구타, 인권 유린 사례가 빈발했다. 이때 현지의 이장 한 사람이 진압군 본부를 찾아가 “억울한 피해 사례가 많으니 좀더 신중하게 조사해줬으면 한다”는, 일종의 민원을 전달했다.

살벌한 분위기에서 이런 민원이 먹혀들 리 없었다. 민원은 간단히 묵살됐고 이장은 오히려 진압군에게 폭행을 당해야 했다. 그나마 공직의 신분이었기에 더 이상의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해방정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례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장은 폭행을 당한 후에도 계속 진압군을 찾아가 자신의 요구를 전달했다. 이장의 요구에 무시와 폭행으로 대응하던 진압군도 나중에는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진압과 수사 방식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런 결과를 낳을 수 있었던 것은 이장 한 사람의 용기도 용기지만 당시 대한민국 땅에 기본적인 법치 체계가 자리잡고 있었던 영향이 크다고 본다. 이장의 요구가 그런 법치의 질서와 논리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지의 살벌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진압군이 그런 요구를 일방적으로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또 하나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6.25전쟁은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이 체결됐다. 3년 넘게 이어진 전쟁에서 벌어진 잔인한 동족상잔의 참상은 필설로 표현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인권을 따질 수 없는 분위기였다. 정식으로 휴전이 이루어진 뒤에도 지리산 등에서는 빨치산 토벌이 이어졌고 마지막 빨치산인 정순덕이 체포된 것은 1962년 10월이었다.

그런데, 휴전이 성사된 지 7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60년에 4.19가 터져나왔다. 누가 뭐래도 4.19는 평범한 국민 대중이 자신의 정치적 권리를 찾아 과감하게 목소리를 내고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운 사례이다. 당시의 투쟁은 서울 등 일부 지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전국 각지에서 광범위한 대중이 참여한 상태에서 진행됐다. 일부 지역, 일부 계층에 의한 투쟁이 아니고 말 그대로 전국적인 민중항쟁이라고 봐야 한다.

생각해보면 묘한 위화감이 생긴다. 해방정국의 혼란과 무질서, 법치의 실종과 잔인한 인권 유린 그리고 6.25전쟁의 잔인한 동족상잔의 비극과 4.19 같은 민권 투쟁이 어떻게 현실 속에서 나란히 존재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한쪽에서는 빨치산 투쟁이 이어지고 그에 대한 진압이 진행되는 땅에서 4.19처럼 앞선 권리의식이 뒷받침된 국민적 투쟁이 터져 나왔다는 게 쉽게 상상이 되는가? 기묘한 불균형이라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우리 역사에서 이런 불균형은 더 있다. 전두환의 5공 정권은 광주 5.18의 원죄를 뒤집어쓰고 어마어마한 인권 유린과 학살의 원흉으로 인식되곤 한다. 하지만, 사실 단일 정권의 기준으로 보자면 5공 정권처럼 유연화 개방화 합리화 다양화의 혁신을 수행한 정권도 없다.

야간 통행금지 해제, 중고등학생의 두발 및 교복 자율화, 미니스커트와 장발 단속 폐지, 연좌제 폐지, 스크린산업 규제 해제, 프로 스포츠 육성 등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조치 외에도 5공 정권은 5대 국가기간전산망을 구축하여 사실상 세계 최초의 인터넷 컨셉의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한국의 정보통신 발달은 김대중 정권의 업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실제 기반을 구축한 것은 5공 당시의 일이었다. 5공이 씨앗을 뿌렸다면, 김대중 정권은 그 열매를 거두었다고나 할까.

전두환 정권은 또 중화학공업 구조조정을 통해 현재 대한민국이 먹고사는 기틀을 마련했다. 박정희 정권의 몰락이 사실상 중화학공업에 대한 무리한 투자의 후유증이었다고 봤을 때 이를 정비하고 결과적으로 지금까지도 유지되는 한국 경제의 근간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전두환의 업적은 새롭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1980년 10월 국민투표를 통해 확정된 8차 개헌안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대통령의 중임을 금지하여 장기집권을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이는 권력 독점과 독재를 방지하자는 당시의 국민적 합의를 반영한 장치이다. 유신체제에 대한 전향적 극복인 셈이다. 1987년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도 크게 보자면 1980년 8차 개헌안의 문제의식이 연장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현대사를 바라보면서 독재와 민주화의 대립 구도에만 착안하기 쉽다. 그래서 권위주의 정권은 독재이자 악(惡)이며 민주주의와 대립하는 가치만 추구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방법론과 단기 목표만 달랐을 뿐 권위주의 정권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민주화에 대해 상당한 기여도가 있는 것 아닐까? 지금 민주화 세력의 부패와 타락은 민주주의의 명분과 지분을 독점하는 데서 연유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민주화의 성과에 대해서도 오해가 많다. 민주화 즉 1987년 체제의 성립 이전에 파출소는 대부분의 국민에게 공포의 장소였다. 경찰을 가리키는 ‘민중의 지팡이’라는 그럴싸한 호칭이 있었지만 실제로 그 민중의 지팡이는 민중을 보호하는 역할보다 민중을 두들겨패는 데 쓰이는 경우가 많았다. 파출소에 찾아갔다가 잘못하면 경찰들에게 폭행을 당할 수 있다는 공포가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잠재되어 있었던 시절이다. 동사무소 등 민원기관들도 비슷했다. 이들 민원기관을 찾아갈 때 ‘와이로’니 급행료니 하는 이름의 뇌물을 준비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1987년 민주화는 이런 낡고 부패한 관행을 쓸어냈다. 물론 민주화 이후에도 부정부패가 100% 사라졌다고 볼 수는 없고 어떤 측면에서는 더 구조화된 형태로 숨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더 적발하기 어려워졌다는 얘기다. 하지만, 부정부패가 고발과 단속을 피해 어두운 곳으로 숨어들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발전이고 개선이다.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데 따른 위험 부담이 커지고 비용이 늘어났다는 건 국민들 입장에서는 부정부패와의 싸움에서 좀더 유리한 입장에 선 것이라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변화가 미치는 파급효과이다. 민주화는 사회 전반의 분위기를 좀더 개방적이고 유연하게 만들었다. 개방과 유연화는 보다 많은 재능과 의견이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와 사회, 문화 등 전방위에 걸쳐 의사결정에 참여하게 만들었다. 이는 대한민국 전체의 합리성을 높이고 국제 경쟁력을 높이는 결과로 이어졌다. 한국의 민주화는 한 차원 높은 경제 발전과 선진화로 가는 디딤돌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거론한 현상들은 대한민국 역사 발전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일견 대립물처럼 보이는 힘이 사실상 보다 근원적인 지점에서 하나의 움직임으로 수렴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힘이 무엇일까? 지금까지 우리나라 좌파나 우파나 모두 그 힘을 찾아내는 데 실패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그리고 현재의 심각한 좌우 대립과 갈등은 그 힘의 정체를 밝히지 못한 데에 그 원인이 있는 것 아닐까?

산업화와 민주화 그리고 그 이전의 건국까지 모두 하나의 현상의 다양한 표현이다. 그 현상은 바로 근대화라는 키워드로 모아진다. 이 근대화를 한반도 근현대사의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키워드로 설정할 때 우리는 갈등과 대립의 역사 너머에서 작용하는 진짜 힘을 찾아낼 수 있다.

이 힘은 조선 말엽의 개항과 갑신정변, 갑오경장 그리고 개화파의 움직임에 자리잡고 있었고 이후 3.1운동과 상해임시정부 등 독립운동을 밀어붙이는 힘이기도 했다. 그뿐인가. 조선총독부의 지배 아래 꾸준히 성장하는 경제와 민권 의식의 바탕이기도 했다. 총독부에 의해 시행된 조선민사령에도, 토지조사사업에도, 철도 부설과 학교 설립 등 근대교육의 시행, 공중보건의 개선, 농토의 개간과 미곡의 증산, 쌀의 일본 수출에도 이 힘은 내재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일제 식민지배도 결국 한반도 민중들의 근대화를 향한 도정의 한 부분이었다고 평가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앞에서 보여준 것처럼 해방정국과 6.25의 잔인한 한계 상황에서도 이 힘은 죽거나 후퇴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순사건의 경직된 분위기에서도 어느 무명 이장의 과감한 항의가 나올 수 있었다. 이 에피소드는 일제 하에서도 법적 절차의 중요성과 그와 관계된 인권의식이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법적 절차에 대한 인식과 인권의식은 그 이장과 진압군 지휘관들에게 공유되고 있었다. 그 근대화의 코드가 공유되고 있었기에 항의가 먹혀들 수 있었다고 봐야 한다.

이 근대화의 코드가 있었기에 휴전협정이 체결된 지 불과 7년도 되기 전에 어마어마한 정치적 각성의 결과물인 4.19혁명이 가능했다. 나아가 이 힘이 5.16을 만들어냈고 유신과 중화학공업 투자를 이끌어냈다. 1980년 서울의 봄과 5.18 당시 격렬하게 대립했던 민주화 세력과 신군부 세력도 크게 보자면 이 근대화로 나아가는 움직임의 다른 측면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근대화의 힘을 제대로 평가할 때 우리는 대립적인 요소로만 이해했던 건국과 산업화, 민주화를 하나의 질서 안에서 제대로 위치시킬 수 있다. 이런 접근은 우리 근현대사에서 숱한 비극과 갈등, 분쟁을 유발했던 갈등 요소들을 조화시키고 화해에 이르게 만들 수 있다. 이를 통해 지금 대한민국이 실패하고 있는 국가적 어젠다의 설정과 나아가 구체적인 실행 로드맵의 작성에도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즉, 미래가 비로소 열리게 된다는 얘기이다. 우리는 여전히 근대화의 도정에 있다.

주동식 지역평등시민연대 대표 (前 국민의힘 광주서구갑 당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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