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
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

 

'관성그룹'이란 용어가 있다. 쉽게 풀이하면 수구파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세력이다. 18세기 프랑스 혁명 당시 이러한 낡은 정치, 구식 수구파를 가리켜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이라 칭했다. 반동세력이라고도 했다.

근대는 큰 변혁 가운데서 늘 이러한 수구세력, 반동세력의 저항을 겪으면서 이들의 저항을 제거하면서 완성해온 하나의 과정이었다. 일본에 의한 강제적 개국이었지만 근대화란 시점에서 평가하면 이는 '민족'을 넘어서 의미가 있는 시대의 변혁 그 자체였으며 시대의 흐름에 따른 시대의 발전이었다.

일본과 얽힌 근대사를 평가함에 있어서 병합에 이르기까지의 일본에 저항한 세력은 구태의연히 유교이념을 고집하고 조선왕조에 충성한 근대화개혁을 저항한 '관성그룹'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조선의 근대는 개화파와 수구파 관성그룹의 대립, 투쟁이란 구도로 노정된다.

1876년 조일수호조약(강화도조약)의 체결로 조선은 세계를 접촉하고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나서게 되는 계기가 마련된다. 쇄국양이를 짓부순 조선 근대의 첫걸음이었다고 평가해야 한다.

개국에 따라 조선정부는 일본, 청국에 사절, 유학생, 시찰단 등을 적극적으로 파견하고 세계와 접촉하기 시작한다. 그 실례를 아래 몇 가지만 들어보겠다.

1876년 5월 김기수를 정사로 한 제1차 수신사를 일본에 파견, 1880년 7월 김홍집을 정사로 하는 제2차 수신사를 일본에 또 파견, 1881년 5월 어윤중 등 62명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하였으며 그중 3명이 일본 유학생으로 됨. 1881년 10월 조병호를 정사로 하는 제3차 수신사를 일본에 파견. 그해 11월 김윤식이 영선사로 되어 군기학습생을 인솔하여 청국 천진에 파견. 1882년 3월 국왕의 명으로 청년관료 김옥균을 일본시찰에 파견.

그중 김기수는 귀국후 <일본견문기>를 썼으며 김홍집은 청국 주재 일본공사 서기관 황준헌의 저작 <조선책략>을 증정받아 조선으로 귀국했다. 어윤중은 귀국 후에 일본과 청국의 견문체험기 <중동기>를 집필했다.

이들이 집필한 책은 메이지 유신을 거친 일본에서 근대화와 부국강병이 매우 신속히 효과적으로 추진되는 양상을 정확히 전달하고 있었다. 그리고 김홍집이 지니고 온 <조선책략>은 조선에 대한 위협은 남쪽으로 침습하는 러시아인 바, 조선은 마땅히 "친청국, 결일본, 연미국" 책을 취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미 여러나라와 외교관계를 맺고 통상을 하고 기술도입, 산업무역의 진흥을 꾀해야 함과 동시에 부국강병책을 추진시켜야 한다고 호소했다. 또한 청일 양국에 유학생 파견, 외국인 교사 초빙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민씨 조선정부는 정책적 전망도 없이 강제적 개국을 했지만, 수신사들의 보고 등에 의해 방향성을 잡은 셈이 되었다. 조선은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 개화파 세력 관료와 개국, 개화 정책을 추진해갔다.

그러나 수구파 관성그룹의 필사적인 저항을 받았다. 조선왕조를 환원시키고 유교이념으로 위정척사를 주장한 관성그룹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그리하여 민씨정권은 <조선책략>을 복사하여 전국의 유생들에게 배포하였다. 시대의 추세를 알게 하고 개국, 개화정책의 필요성을 깨닫게끔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역효과를 빚어내 관성그룹은 더욱 맹렬히 반발했다. 영남지구에서만 해도 만인이 상소하는 개화반대운동이 도도히 전개되었으며 유학도들은 연명으로 조정에 상소하고 각지에서 반대운동을 펼쳐 개화파를 국적이라고 격렬히 규탄, 비난했다.

이런 규모는 아마 1898년 강유위를 위시로 한 '공거상서'와 유사했을 것이다. 유교를 국교로 한 조선에서 유생들의 상소는 무시할 길 없었는 바, 정부는 이 맹렬한 반발에 당황했다. 사극 '명성황후'에서도 이런 유생들이 왕궁문전으로 모여들어 도끼를 들고 시위하는 장면이 영상화되었다. "상소를 접수하지 못한다면 이 도끼로 목을 쳐서 죽겠다"고 외친 유생들의 투지는 가관이었다.

물론 그들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었다. 외국과의 통상은 외국 의존을 초래하며 따라서 외국 학문이 아닌 자력으로 부국강병을 이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당당히 외쳐도 시대의 흐름을 외면한 완고한 '위정척사론'에 지나지 않았다.

이무렵 개화를 반대한 유학도와 대원군 세력의 정치가들이 손잡고 쿠데타를 하다가 실패한 사건이 생겼다. 고종을 폐하고 서장자인 이재선을 국왕으로 추대하려 했다. 민씨정권은 관계자 30여명을 사형에 처한 탓으로 유생과 대원군파의 반대는 더욱 심해갔다.

한편 1881년 개화파관료의 주도로 관제의 일부를 근대적으로 개편하는 개혁을 하고 통리기무아문을 설립했다. 일본인 교관을 고용해 근대적 군대 양성에도, 군제개혁에도 착수했다. 민씨정권의 세도정치, 부패성은 그들의 개국, 개화에 주체성이 없다고 수구파 관성그룹은 반대해 나섰으며 근대개혁은 늘 내부의 관성그룹에 의해 걸림돌에 부딪쳤다. 시대는 수구그룹을 물리칠 수 있는 신형의 개화파를 부르고 있었다.

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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