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
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

 

'일제의 극악무도한 이미지 만들기'는 오래전부터 한국 근대사 기술, 인식의 일종의 '신화 만들기'로 정착되었다. 특히 역사기술에서 정확하고 치밀한 수치가 소요됨에도 불구하고 숫자를 불리거나 작위해내는 일은 이영훈 교수가 지적하다시피 '한국의 비선진국성'을 발현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가 사료를 읽으면서 발견된 것은 이러한 '일제악'의 이미지, 신화 만들기에서 숫자 불리기는 현재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1920년대에 상해에서 출간한 박은식의 명저 <조선독립운동혈사>에도 숫자 불리기의 치명적인 결함이 존재하고 있다. 박은식(1859-1925)은 근대 조선의 계몽운동의 지도적인 사상가, 역사가, 정치가로서 필자가 좋아하는 민족인물의 한 사람이다.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역사연구, 독립운동에 종사하면서 1925년에는 이승만의 후임으로 상해임시정부의 제3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가 건강의 악화로 그해 11월 상해에서 67세의 생애를 접는다. <한국통사>는 불후의 명작이며 그 자매편인 <조선독립운동혈사(이하 혈사)> 역시 독립운동사의 고전적 사료이기도 하다.

역사에 촉발된 '민족정신'을 고양시키고 민족의 회생, 독립을 쟁취함을 자극 고무하기 위해 집필한 이 책은 필자가 몇번 읽은 양서이다. 필자는 이 책을 일본서 발행한 <평범사 동양문고수록>역사를 먼저 읽었다.

번역자 강덕상 교수는 조선근대사 연구자로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이 책의 해설에 부친 글에서 "저자 박은식이 쓴 중국문에는 꼭 원전에 충실하지 못한 창작된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과대한 형용사이기도 했으며 격렬 강개의 문장으로서 나타나기도 했다"고 저작의 결함을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는 이보다도 박은식의 <혈사>에 숫자 불리기의 결함이 존재함을 지적하고 싶다. 그 대목을 아래 옮겨본다.

"동학당은 낫과 호미 등 농구를 무기로 해 농민이 봉기하여 우리 관군이나 일본군과 교전, 9개월 이상에 걸쳐 사망자는 30여 만에 이르렀는바 고래 미증유의 참상으로 되었다(16p)."

고명한 학자로서 박은식의 이 저작은 독립운동연구의 효시로 되고 있으며 그만큼 귀중하다. 그러나 그럴수록 숫자적 불림은 상식을 일탈하고 있다.

1890년대 조선후기 관군이라 해 보았자 그 숫자는 1000명 단위로 헤어릴 수 있었다. 단 조선 독자적 관군이란 것은 겨우 무장경찰 정도의 수준이었으므로 여기서 말하는 '관군'은 종주국 청국의 군대일 것이다. 내란과 외환 등 분쟁이 발생시 조선은 줄곧 청국에 의뢰하여 해결해왔던 것이다.

동학당 봉기시기 청국은 일본에 무통고 출병했으며 이에 일본도 출병했다. 청일 양국이 조선에 출병할 때에는 서로 통고하는 것을 약속한 천진조약에 어긴것을 빗대고 일본은 청국과 개전한 것이며, 동학당 농민군과 교전한 것은 거의 없었다. 또한 청일 갑오전쟁 전야의 일본군은 공사관 호위로 2개 소대밖에 조선에 배치하지 않았다.

동학당 사망자가 '30여 만명'일 정도로 사망자를 내자면 적어도 백만 이상의 군대가 필요한 것이 군사적 상식이다. 그리고 당시 조선반도 전체 인구가 1천만도 안 되었으니 그 정도로 사망자를 내려고 하면 동학당 외의 시민도 학살하지 않으면 계산이 맞지 않는다.

단 2개 소대의 일본군이 제아무리 일당백이라 해도 그 많은 동학당군을 대항하기는 바위에 계란 부딪치기가 아닌가. 따라서 분명한 것은 학살에 가담한 주력은 일본군이 아닌 것이다.

게다가 사망자가 30여만이라는 숫자는 그야말로 황당무계한 숫자로서 박은식이 무엇을 근거로 이 숫자로 통계했는지도 밝히지도 않고 있다. 또 하나의 실례를 들자면 송건호의 저작 <일제지배하의 한국근대사>에는 "일본군에 패퇴한 30-40만의 희생을 내고 막을 내렸다"고 동학당 봉기를 기술하고 있다.

이 숫자 역시 박은식의 숫자로 그대로 본떠서 적은 것이라 추측된다. 동학당이 근대사상 최대의 농민봉기였으나 그것은 일본에 대한 반란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조선왕조, 청조에 대한 반란의 봉기였다. 사실 일본군이 조선반도에 상륙하기 전에 이미 청군에 의해 탄압당했던 것이다. 일본은 청국이 천진조약 위배를 구실로 조선에 출병하여 청일전쟁을 전개시킨 것이다.

물론 일본군과 동학당과의 소규모전은 있었으나 일본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청국이었다. 그리고 대규모 본격전쟁인 청일전쟁에서도 일본군의 사망자는 8395명에 불과했으니 30만 동학당 사망자는 엉터리숫자다. 그뒤 조선의 '의병투쟁'이라 불린 항일투쟁에서도 사망자는 천 내지 만 단위에 그쳤다.

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현 일본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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