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이 ‘사법부 수장 공백’ 장기화를 사전 예고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친명계인 홍익표 민주당 원내대표는 연일 “부적격자를 대법원장 후보자로 보내면 낙마시킬 것”이라는 협박을 일삼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지난 6일 국회 본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국회에 도착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지난 6일 국회 본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국회에 도착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홍익표 원내대표는 7일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유세장에서 최근 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 임명동의안을 야당 주도로 부결시킨 것과 관련해 “부적격으로 거부된 것에 대한 책임은 대통령에게 있다”면서 “부적격자 제3, 제4 (인물을) 보내도 다 거부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홍 원내대표는 이날 특히 한동훈 법무장관 해임을 협치의 조건으로 제시해 주목된다. 이재명 대표의 다양한 개인 비리 의혹에 대한 수사의 정당성을 강조해온 한 장관을 해임하라는 것은 사실상 이 대표에 대한 검찰 수사를 중단하라는 요구로 풀이된다.

윤석열 대통령이 한 장관을 해임하면 ‘협치’를 할 수 있다는 홍 원내대표의 발언은 야당 대표의 사법리스크 해소를 정치적 흥정의 대상으로 타락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정치의 ‘흑역사’로 기록될 전망이다.

야당의 작심 부결은 헌정 사상 이균용 사태가 최초...1988년 정기승 임명동의안 부결은 정치적 해프닝

헌정사상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이 부결된 것은 이번이 두 번째이다. 노태우 정부 당시인 지난 1988년 7월 2일 국회는 정기승 전 대법관에 대한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을 부결시켰다. 정 전 대법관은 박정희 정권과 제 5공화국 시절에 독재정권에 협력했다는 비판을 받았고, 찬성 141표 반대 6표 기권 134표 무효 14표로 부결됐다. 야당인 평민당과 민주당 소속 131명 의원 전원은 반대표가 아니라 백지투표를 해서 기권했다.

가결을 위한 의사정족수에서 7표가 부족했다. 당시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총재는 소속 의원들에게 가결을 지시했지만 공화당 초선 의원들이 ‘가’로 표기하는 대신에 ‘정기승’이라고 적어서 무효표를 만들었다는 게 정설이다. 역대 대법원장 임명동의안 표결에서 무효표는 1~4표 정도에 불과했다. 정기승 임명동의안 표결에서만 무효표가 무더기로 나온 것이다. 즉 당시 야당인 평민당과 민주당은 자신들이 상징적인 정치행위로 ‘기권’을 선택한다고 해도 정기승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은 국회에서 통과될 것으로 예상했던 셈이다.

[사진=나무위키 캡처]
[사진=나무위키 캡처]

즉 정기승 임명동의안 부결사태는 당시 야당이 의도한 게 아니다. 야당이 백지표를 던져도 범 여권 찬성만으로도 가결될 수 있었다. 공화당 초선의원들이 표기 방식에 서툴렀기 때문에 빚어진 해프닝이었다. 민주당과 정의당에 의한 이균용 대법원장 임명동의안 부결은 대통령이 지명한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을 작심하고 부결시킨 사건으로, 건국 이래 초유의 일이다.

민주당의 요구는 ‘무뢰배’ 행태= 국민이 선택한 보수 대통령에게 보수성향 배제를 요구

민주당과 정의당이 이균용 후보자 임명동의안을 작심하고 부결시키면서 내세운 ‘부적격 이유’가 설득력이 부족한 것도 심각한 문제이다.

민주당과 정의당은 공식적으로 이 후보자의 가족 명의 비상장 주식 재산 누락, 농지법 위반 의혹과 같은 개인과 가족 비위 그리고 가해자들에게 온정주의적 감형을 내린 다수의 성범죄 사건 판결과 뉴라이트에 경도된 역사관 등을 임명동의안 부결의 이유로 제시해왔다.

하지만 부결의 진짜 이유는 사상검증 탈락에 있다는 게 정치권의 공통된 분석이다. 보수성향이 아닌 법관을 대법원장 후보로 지명할 것을 윤석열 대통령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대의민주정치의 기본을 뒤흔드는 ‘무뢰배의 요구’이다. 선거를 통해 다수 국민의 선택을 받은 대통령이 정치적 이념을 공유하는 인물을 대법원장으로 임명하고, 중대하고도 결정적인 하자가 없는 한 야당은 임명동의안을 가결시켜주는 것이 건국 이래 지속돼온 정치관행이자 헌법 존중의 태도였다.

그러나 민주당은 차기 대법원장 후보로 ‘민주당 편’을 기용하라고 윤 대통령에게 요구하는 모습이다. 대의민주정치의 기본을 파괴하는 이런 생떼나 어거지를 부린 야당은 대한민국 헌정사상 존재한 적이 없다.

협치 조건 1은 한동훈 파면= 이재명 사법리스크에 대한 면죄부 요구나 다름 없어

나아가 대법원장 임명동의안 가결을 정치적 흥정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홍 원내대표는 7일 “인사청문제도와 임명 동의는 국회 권한이고 제대로 된 후보를 검증해 적합한지 아닌지 결정하는 게 국회이다. 그것을 못 하면 국회는 무능한 것이다”면서도 “지금까지 검찰 정치, 무도한 수사와 압수수색을 앞세웠던 한동훈 법무부 장관을 일단 파면시키고 국회가 의결해 보낸 총리 해임건의안을 수용해야 한다. 대통령이 이런 주장을 받아 국정 기조를 바꾼다면 대화와 협치로 간다면 그렇게 (협치로)하겠다”고 밝혔다.

이재명 대표의 사법 리스크에 대해 원칙론을 고수하면서 야당의 압력에 대항하는 한 장관을 파면시키는 것은 이 대표의 ‘사적 이익’에 해당된다. 홍 원내대표의 논리에 입각해 한 장관을 해임한다면, 이 대표가 무리한 검찰 수사의 피해자였다는 민주당의 주장을 고스란히 수용하는 행위가 된다. 즉 ‘한동훈 해임’은 ‘이재명 사법리스크 해소’와 동격이다. 윤 대통령의 대법원장 임명에 협조하는 대가로 ‘이재명 구하기’를 공식 요구한 것이다. 한국 정치의 ‘흑역사’로 기록될 것으로 예상되는 대담하고도 뻔뻔한 정치적 요구이다.

협치 조건 2는 한덕수 해임= ‘대법원장 공백’ 해소하려면 ‘행정부 수장 공백’ 감수하라는 요구

그 뿐만이 아니다. 한덕수 총리 해임안까지 요구하는 것은 국가운영의 한 축을 담당하는 공당의 자세가 아니다. 정치적 잇속 계산만 하는 정상배의 사고방식이다. 대통령 중심제인 우리나라 헌법상 ‘3부요인’은 국회의장, 대법원장·헌법재판소장, 국무총리 등이다.

대법원장은 임명하도록 해줄테니 국무총리는 해임하라는 게 홍 원내대표의 요구이다. 윤 대통령이 새 국무총리를 기용하려면 국회 임명동의를 거쳐야 한다. 다수당인 민주당이 반대하면 윤 대통령은 새 국무총리를 임명할 수 없다. 3부 요인중 한 명인 김진표 국회의장은 민주당 출신이다. 따라서 민주당은 윤 대통령이 선택할 수 있는 2명의 3부 요인 중 한명은 공석 상태로 남겨두는 ‘국정 파행 구조’를 공개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홍 원내대표는 이균용 후보자 인준 표결을 사흘 앞둔 지난 3일 CBS라디오에서 “윤석열 정부에 경고한다. (이균용 같은)이런 인물들을 계속 (대법원장 후보자로) 보내면 제2·제3(의 인물)이라도 부결시킬 생각”이라고 공언했다. 7일 발언과 동일한 내용이다. 차이점이라면 부결 대상이 3일에는 ‘제2·제3 인물’이었던 반면, 7일에는 ‘제3·제4 인물’이라고 확장한 것뿐이다.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지난 3일 CBS라디오에서 "(이균용 같은) 이런 인물들을 계속 보내면 제2, 제3의 인물이라도 부결시킬 생각"이라고 밝혔다. [사진=CBS 유튜브 캡처]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지난 3일 CBS라디오에서 "(이균용 같은) 이런 인물들을 계속 보내면 제2, 제3의 인물이라도 부결시킬 생각"이라고 밝혔다. [사진=CBS 유튜브 캡처]

‘대법원장 부재’는 민주당의 이득= 친민주당 성향의 권한대행체제가 법원 인사권 행사하고 총선도 치르게 돼

이처럼 오만하고 비상식적인 요구를 윤 대통령이 수용할 가능성은 없다. 그렇다고 해도 민주당은 정치적 이득을 챙길 수 있다는 게 심각한 문제점으로 꼽힌다.

이균용 후보자 임명동의안 부결로 인해 안철상 대법관이 대법원장 권한대행을 맡게 됐다. 안 권한 대행은 ‘현상 유지 및 관리’ 정도로 역할이 제한될 것으로 보인다.

법관 인사와 상·하급심 재판이 줄줄이 지연될 것이라는 관측이 유력하다. 대법관 제청, 법관 임명, 헌법재판소 재판관 9인 중 3인 지명 등과 같은 대법원장의 헌법상 권한 수행은 지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임기 6년인 대법원장은 법원조직법상 대법원 전원합의체 재판장으로서의 권한, 사법행정사무 총괄과 관계 공무원 지휘·감독 권한, 판사 인사와 업무 관련 허가 권한도 갖고 있다. 안 권한대행체제 하에서 대법원 전원합의체 선고가 이뤄지기 어렵다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대법원 소부에서 이견이 있는 상고심에 대해 대법원장이 재판장을 맡아 대법원장을 포함한 대법관 13명이 최종 판단을 하는 제도다. 사회적 파급력이 큰 사안을 다루는 전원합의체 선고는 대법관 12명의 의견이 찬반으로 갈릴 경우 대법원장이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하게 된다.

더욱이 안 권한대행과 민유숙 대법관은 내년 1월 1일 퇴임한다. 대법원장이 공석이면 후임 대법관을 제청할 수 없다. 대법관이 10명으로 줄어드는 기형적 사태가 장기화될 수 있다. 내년 8월에 김선수·노정희·이동원 대법관, 내년 12월에 김상환 대법관이 각각 퇴임할 예정이다.

더욱이 내년 1월 안철상 대법관이 퇴임하면 친민주당 성향인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회장 출신인 김선수 대법관이 안 대법관 후임으로 대법원장 권한대행을 맡게 된다. 김선수 권한대행 체제에서 내년 2월로 예정된 전국 3100여 명 법관 정기 인사를 추진하는 ‘사법부 대파행’이 벌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이다. 친민주당 성향의 김선수 권한대행 체제하에서 사법부 인사가 단행되고 내년 4월 총선까지 실시되는 것은 최악의 헌정 파행 사태이다.

이같은 파행사태로 이득을 보는 측은 사법리스크에 시달리는 이재명 대표와 민주당이고, 최대 피해자는 윤석열 정부와 다수의 국민들이다. 정부 여당이 치열한 여론전을 통해 이번 대법원장 임명동의안 부결사태의 정치적 손익계산서를 홍보함으로써 국민적 지지를 기반으로 민주당을 압박해나가야 한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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