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
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

 

"과거는 현대인이 살아보지도 못하고 다만 상상의 환경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서양의 한 독설가 비평가이다. 우리는 흔히 살아보지도 못한 100여 년 전의 조선에 대해 일종의 환상, 공상으로 메우면서 "매우 깨끗하고 아름답고 멋있는 나라였는데 일제가 들어와서 엉망으로 짖이겨 놨다"고 생각하기 일쑤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우리의 상상과는 어긋나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럼 당시 외국인의 조선에 대한 기록을 보기로 하자.

"못살겠네 못살겠네 오염물을 다 제하고 신선 공기 받는 것이 위생상에 필요인데 똥통 설시한 이후로 게딱지와 같은 집에 방문 열고 나서면 똥통 부엌 한데 붙어 음식기운 똥냄새가 바람결에 혼합하니 구역질나서 못살겠네."(대한매일신보, 1909.4.16)

사실 20세기 초두 동아시아 전역에서 일본을 제외하고는 중국대륙도 대만도 다 "똥냄새가 가득한" 지극히 더러운 환경이었다는 외국인의 기록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1894년부터 조선반도를 방문한 영국의 비숍 여사는 서울의 모습을 "겨우나 쌓은 모든 쓰레기, 발목까지 오는 진흙탕, 악취 투성이"(30년 전의 조선)로 더러움과 악취의 세계제일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시민은 지상의 짚이엉, 기와를 깐 1층옥의 아래서 허리를 굽히고 생활하고 있었다. 아니, 불결한 도로에서 준동하고 있다고 형용하는 편이 더 낫겠다. 그 도로라는 것은 넓다 쳐도 말 두필이 나란히 걸아갈 수 있을 정도가 아니며 좁은 데는 큰 짐을 진 자가 지나가면 그것으로 타인의 왕래가 막힐 정도다. 길 옆에는 악취가 만연하는 물구덩이가 있고 길 위는 온통 먼지 투성이의 반나체의 아이들과 무서운 개들에게 점령돼 있었다."

조선인을 사랑한 유명한 미국인 할버트도 참지 못해 "조선인은 매우 초보적인 위생 상식마저도 몰라서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이 빠져나갈 수 있는 수채만 있으면 만사가 충분한 듯 하며 도로는 갖가지 오물의 집적소이다"고 그의 저작 <조선멸망>에서 지적하고 있다.

당시 20만 서울 주민이 매일 배설하는 분뇨는 처치가 곤란하였으며 길거리는 외국인이 견디기 어렵게 더러웠다. 문명과 야만은 위생과 비위생으로 구별되었으나, 길거리에서 대소변을 누며 집 밖으로 이를 버리는 것은 문명국에서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보통학교 학도용 수신서>)

호소이 하지메라는 일본의 기자이며 평론가인 인물이 <한성의 풍운과 명사>라는 글에서 비숍여사와 같은 내용을 기술하고 있어 흥미롭다. "한국내지를 여행하면 길가가 가로에 쌓인 황금꽃(분뇨)이 아무데나 상관없이 낭자하게 되어있어 발 디딜 곳도 없어서 그 불결과 악취에 놀란다.."

"이 나라 서울에는 가는 곳마다 인분 또는 우마분이 널려 있으며 그 분분한 취기는 코와 눈을 사정없이 습격한다." "경성시내에 흐르는 강물은 각 집에서 배설하는 분뇨에 섞여 물 색깔은 누렁색을 띠며 찐득찐득하다..." "매년 여름이 되면 전염병이 유행하여 전염병에 걸린 한국인은 수천 명에 이른다..."

이어서 호소이는 서울의 똥은 담뱃대, 이, 기생, 호랑이, 돼지, 파리와 함께 조선의 7대 명물이라고 칭한다. 그는 1890년대 서울의 불결에 대해 10여 페이지에 걸쳐 기술하고 있다.

서울이 이러하니 전 조선은 말할 것도 없었다. 우리는 흔히 조선 민족을 청결하기 때문에 백의를 즐겨 입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흰 옷감을 염색할 염료가 결핍한 경제사정으로 백의를 사용했다는 중요한 근거가 있다. 그러니 조선 민족이라고 특별히 청결했다는 말은 그리 타당한 것도 아닌 듯하다.

불결한 환경과 비위생적 관념으로 찬 조선에는 의료사나 역병사를 보아도 1749년 한 해에도 50만 명이나 사망자를 냈다. 조선사 500년에 이 같은 사망자는 얼마나 됐을까. 무척 걱정스럽기만 하다.

조선에 근대 의료제도와 위생의식을 가져다 준 것은 다름아닌 일본이었다. 박기주 성신여대 교수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일본인의 이주가 늘어나자 통감부는 경찰력을 동원하여 서울의 주거환경을 강제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1907년 12월 한성위생회를 창설한다. 일본인 내부 차관이 위생회장이고 실행위원장은 경시총감이었다. 이듬해 4월 제예 규칙을 공포하여 위생회가 쓰레기와 분뇨를 반출토록 하고 노상에서 응변 보는 것을 금했다. 한성위생회는 분뇨 운반용 마차와 지게를 갖추고 자루 달린 바가지로 1말 크기 나무통에 분뇨를 퍼담아 마차나 지게로 반출했다. 매월 평균 500명의 인부가 각 지역을 분담하고 순사가 이를 감독하였다."(조선일보 2010년 2월 2일)

근대적 위생제도를 조선에 의식한 일본은 총독부 설립 이후 대한병원, 경성제국대 부속병원 등 근대 의학, 의료 발전을 위해 족적을 남긴다.

1910년부터 각 도시에서 엄격한 방역, 검역제도를 실시하고 역병침습 예방에 노력하여 콜레라, 천연두, 페스트 등 유행은 1918-1920년에 종지부를 찍었다. 1930년대에 이르러 근대의료제도의 확립으로 중국 대륙에서 들어오는 역병을 완전히 차단했으며 역병이 많이 돌았던 중국 대륙에 비해 별천지였다.

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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