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에 대한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를 두고 일부 친민주당, 좌파 언론들은 “검찰이 제1야당 대표에 대해 영장을 청구한 것은 헌정사상 처음”이라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1989년 8월 서경원 당시 평민당 의원의 밀입북사건을 수사하던 서울지검 공안부는 서 의원이 북한에서 받아온 5만달러 중 1만달러를 김대중 당 총재에게 전달한 혐의로 검찰 출두를 요구했지만 김 총재는 ‘야당탄압’이라며 이에 응하지 않았다.

결국 검찰은 김대중 총재를 강제로 조사하기 위해 법원에 구인영장을 신청했는데, 구속영장실질심사 및 영장전담 판사제도가 없던 당시 서울형사지방법원 당직판사로 이 영장을 발부해준 사람은 유모 판사로 유승민 전 의원의 형이었다.

당시 검찰 주변에서는 판사가 김대중 총재에 대한 구인영장을 기각할 가능성에 대비해 일부러 유 판사가 당직을 하는 날을 잡아 영장을 신청했다는 이야기가 ‘무용담’처럼 나돌기도 했다.

유 판사가 당직을 하던 날 저녁, 법원에 만화책 수십권이 들어갔다는 소식이 들렸는데,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새벽 4시가 넘어서야 김대중 총재에 대한 구인영장이 발부됐다.

제1야당 총재에 대한 영장심사를 일반 잡범(雜犯)처럼, 후다닥 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문제의 만화책은 ‘시간끌기용’이었던 셈이다.

서울중앙지법 유창훈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이재명 대표에 대한 영장기각을 결정, 결정문을 언론에 보낸 것은 27일 새벽 3시가 가까운 시각이었다. 34년만의 데자뷰가 아닐 수 없다.

문제는 34년전 김대중 총재에 대한 영장발부 때 그랬던 것처럼, 이번 이재명 대표에 대한 영장기각 또한 판사가 영장기각 입장을 먼저 정한 뒤, 시간을 끌면서 고심한 듯한 모양을 갖추고, 논리를 구성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는 점이다.

검찰이 영장을 청구한 피의자의 범죄혐의와 관련, 법정에서 다툼의 소지가 없는 사건은 없다. 아무리 극악무도한 살인사건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판사는 이재명 대표에게 적용된 도주 및 증거인멸 우려,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권리 같은 방어권 보장 필요성 등 기각논리를 박근혜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을 때와는 정반대로 적용했다.

이재명 대표는 국회의 압도적 과반수를 차지하는 제1야당 대표라는 ‘살아있는 권력’, 영장이 청구됐을 당시 박근혜 이명박 전 대통령은 ‘이미 죽은 권력’이라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다.

그러면서도 판사가 기각 결정문을 통해 “혐의 소명에 관하여 본다”거나 “백현동 개발사업의 경우, 공사의 사업참여 배제 부분은 피의자의 지위, 관련 결재 문건, 관련자들의 진술 등을 종합할 때 피의자의 관여가 있었다고 볼 만한 상당한 의심이 드나...” “대북송금의 경우, 이화영의 진술과 관련하여 피의자의 주변 인물에 의한 부적절한 개입을 의심할 만한 정황들이 있기는 하나...”와 같은 ‘사족(蛇足)’을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서울 서초동의 법원장 출신 변호사는 이를 두고, “하지 말았어야 할 행동”이라고 평가했다. “허위 진술을 교사한 혐의를 인정하고, 민주당 인사들이 핵심 피의자인 이화영 전 부지사를 회유·압박한 것이 의심된다면서도 증거인멸 우려가 크지 않다고 본 판단이 모순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냥 당직판사가 검찰의 기록만 보고 영장을 심사하던 과거나 영장실질심사 및 영장담당판사제도가 도입된 지금이나 판사는 영장의 발부 및 기각에 대해 특별한 이유를 적지않는 것이 오래된 관행이다.

그냥 간단하게 발부의 경우 “혐의가 중대하고 구속의 필요성이 있다”고 하거나, 기각할 때는 “도주 및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음”이라고 메모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재명 대표의 영장담당 판사가 쓴 장문의 결정문을 보면, 영장기각을 염원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영장발부를 기대했던 국민과 검찰을 배려(?)한 흔적이 보인다. “법과 양심에 따라 독립해서 재판해야 하는” 판사가 정치행위를 하는 듯한 모습인 것이다.

판사 출신으로 내년 총선 출마를 준비중인 한 변호사는 이를 두고 “법원이 아닌 서초동 판사당(黨)이 탄생한 것 같다”고 혹평했다.

이재명 대표의 영장기각은 추후 검찰에 의해 구속영장이 청구되는 많은 피의자들에게 영장기각에 따른 석방의 기대치를 높여줄 것이다. 하지만 법원이 박근혜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무에게나 방어권 보장의 필요성은 주어지지 않는다.

수백명씩 법원 앞에 몰려가  영장을 발부하면 판사와 그 주변에 테러라도 할 것처럼 시위할 수 있는 군중을 모을 수 있는 힘, 즉 살아있는 권력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이기 때문이다.

대법원 로비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像)’은 눈을 가린채 저울을 들고 있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기 위해 눈을 가리고, 공평하게 재판하기 위해 저울을 들었다. 한국판 정의의 여신상은 눈을 부릅뜬 채 재판을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 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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