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년 9월 28일 – 에밀 졸라 사망

 

 에밀 졸라는 프랑스의 자연주의‧자유사상 소설가, 극작가, 시인, 비평가, 저널리스트이다. 그는 19세기 최초의 베스트셀러 작가, 프랑스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작가로 꼽히는 등 문학가로서 큰 성공을 거뒀다. 그의 작품들은 출간될 때마다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화제의 중심에 섰다. 여성 세탁부 제르베르의 비참한 일상을 통해 파리 하층 노동자들의 삶을 묘사한 <목로주점>, 파리 고급 매춘부의 성공과 몰락을 다룬 <나나> 등이 그 대표작이다. 이 작품들에서 졸라는 당시 문학적 금기로 여겨졌던 하층 여성 노동자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렸다. 작품에 대한 논란은 에밀 졸라의 명성을 드높이는 데 한몫을 했고 그에게 ‘19세기 문학의 거장’이라는 칭호까지 안겨주었다. 

에밀 졸라.
에밀 졸라.

 

 1898년 1월 13일 <로로르지>에 ‘공화국 대통령 펠릭스 포르 씨에게 보내는 편지(나는 고발한다!)’라는 글을 발표한 이후 에밀 졸라는 평범한 소설가가 아닌, 행동하는 지식인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이 글을 통해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재심을 청원했고 프랑스 지식인들이 이에 힘을 더하면서 마침내 드레퓌스의 재심에 이르게 하였다. 당시 프랑스 사회를 뒤흔들었던 드레퓌스 사건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프로이센-프랑스전쟁에 패하고 독일에 배상금까지 물어준 프랑스의 반(反)독일 감정은 한창 고조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청소부가 군사 기밀이 담긴 문서를 발견했다. 문서에는 ‘D’라는 암호명이 쓰여 있었고 사람들은 프랑스 육군 포병 대위였던 알프레드 드레퓌스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그는 유대인으로 독일계 프랑스인이었다. 반유대주의와 반독일주의가 팽배했던 당시 분위기에서 드레퓌스는 이내 군사 기밀을 팔아넘긴 반역자가 되었고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런데 변호인을 부르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고 재판의 내용은 ‘국가 기밀’이라는 명목 아래 공개되지 않았다. 

 결국 1894년 12월 22일 프랑스 육군 군법회의는 그에게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내렸고 종신형을 선고하였다. 불명예스럽게 군에서 쫓겨난 그는 치욕적인 군적 박탈식을 군중이 모인 가운데 공개적으로 치러야 했다. 드레퓌스는 끝까지 자신의 무죄를 외쳤다. 하지만 군중은 “유대인을 죽여라”, “독일 놈을 몰아내라”라고 외칠 뿐 그의 호소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적도 근처에 있는, 프랑스령 기아나 앞바다의 악마섬으로 유배되었다. 영화 <빠삐용>에 나오는 바로 그 지옥 같은 섬이다. 

 이후 페르디낭 에스테라지 소령이 진범임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레퓌스의 명예가 회복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자신들의 잘못을 은폐하려는 군부와 진실을 밝히려는 지식인들의 싸움이 계속되었고 급기야 프랑스를 분열시키는 사회 문제로 커지게 되었다. 에밀 졸라를 비롯한 프랑스의 지식인들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지식인의 양심’은 불의를 은폐하는 데 눈감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에밀 졸라는 유대인 드레퓌스를 옹호했다는 이유로 프랑스 군부와 가톨릭 신자들에게 야유와 비난은 물론 죽이겠다는 협박까지 받았다. 그러나 졸라는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는 데 그때까지 자신이 이룬 모든 문학적 성과와 명예, 목숨까지 걸었다. 그는 군법회의를 모략했다는 이유로 명예훼손죄로 기소되어 징역 1년, 벌금 3천 프랑을 선고받았으며 레종 도뇌르 훈장도 박탈당했다. 졸라는 끝내 런던으로 망명을 떠나야 했고 1년 후, 드레퓌스의 재심 진행이 결정된 후에야 파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에도 가톨릭 교회와 군부는 끝까지 졸라를 괴롭혔다. 이에 졸라는 “진실이 전진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늪지대를 지나야 하는 것일까”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1895년 1월 13일자 '르 프티 주르날(Le petit Journal)'에 실린 그림. 드레퓌스가 불명예스럽게 해임되는 장면을 그렸다.
1895년 1월 13일자 '르 프티 주르날(Le petit Journal)'에 실린 그림. 드레퓌스가 불명예스럽게 해임되는 장면을 그렸다.

 

 드레퓌스 구명에 힘쓰던 에밀 졸라는 1902년 9월 28일 밤에 사망하였다. 공식적으로 발표된 사인은 질식사였다. 나중에 누군가의 지령을 받은 굴뚝 청소부가 굴뚝을 막는 바람에 졸라는 일산화탄소에 중독되어 사망했다는, 즉 암살되었다는 설도 나왔다. 

 에밀 졸라의 장례식에서 아나톨 프랑스는 “우리는 그를 부러워합니다. 방대한 저작과 위대한 참여를 통해 조국을 명예롭게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를 부러워합니다. 걸출한 삶과 뜨거운 가슴이 그에게 가장 위대한 운명을 선사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양심의 순간이었습니다”라는 내용의 조사를 낭독했다.  

 그날 장례식에는 수만 명의 군중이 몰려들었다. 그중 광부들은 세 시간 넘게 졸라의 묘지 앞을 돌면서 “제르미날!(대규모 파업을 벌이는 광산 노동자들의 투쟁을 그린 졸라의 소설 제목)”을 외쳤다. 노동자의 삶과 투쟁을 그려낸 ‘위대한 소설가’에 대한 경의의 표시였다. 에밀 졸라의 유해는 나폴레옹 등 프랑스가 추앙하는 인물들이 잠든 판테옹에 안장되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가 프랑스인들에게 어떤 의미의 인물이었는지 알 수 있다. 

 결국 1906년 6월, 드레퓌스를 재판한 상고법원은 지금까지의 그에 대한 모든 판결 내용을 뒤집었다. 7월 22일 드레퓌스는 유죄 판결 후 12년 만에 공식적으로 복권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 군 복무를 계속하다가 전쟁이 끝나자 중령으로 예편했다.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졸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군인과 성직자 같은 겁쟁이 위선자 아첨꾼들은 한 해에도 백만 명씩 태어난다. 그러나 잔 다르크나 졸라같은 인물이 태어나는 데는 5세기가 걸린다.” 

황인희 작가(다상량인문학당 대표·역사칼럼니스트)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작권자 © 펜앤드마이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