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문근찬 교수] 존 롤즈의 정의론과 분배 정의에 관하여
[기고/문근찬 교수] 존 롤즈의 정의론과 분배 정의에 관하여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근찬 숭실사이버대학교 교수
문근찬 숭실사이버대학교 교수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모임의 이번 달 주제는 “존 롤즈의 정의론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제목이었다. 롤즈는 1970년대 이래 그의 학제적 연구를 종합하여 약자를 위한 분배 정의를 주장하는 정의론을 제시하여 많은 추종자를 확보했다. 어느 정도 분배 정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복지가 자존심을 높일 수 있게 일종의 권리가 되어야 한다면 이는 정도가 지나치다. 오늘날 한국이 지향하는 복지 정책이나 분배 중시 정책의 뿌리도 존 롤즈의 정의론에 맞닿아 있다. 우리가 정의라는 단어를 쓸 때 그 뜻은 이제 분배 정의를 말하는 것이 되었다. ‘부의 대물림’이니 ‘양극화’ 같은 말을 많이 쓰게 된 데에도 롤즈의 정의론이 있다. 관념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정교한 이론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롤즈의 이론이 강한 흡인력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롤즈의 이론을 실제 경제에 적용하려 한다면 그리 지속 가능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롤즈는 분배정의를 동유럽 사회주의가 붕괴하는 것을 보고 세상을 떠났지만, 자신의 이론이 현실에서 한계가 있다는 점을 말하지 않았음을 볼 때 그는 내면적으로 사회주의자였을 것이다. 롤즈를 좌파적 자유주의자라고 지칭할 때, 수식어로 쓰인 ‘좌파적’이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자유주의자’라는 말이 오히려 장식품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자유주의의 근간은 개인의 자유를 최상의 가치로 여겨 개인의 인권을 존중하고, 개인들이 시장에서 자유롭게 경쟁하고 자신의 능력을 살려 기업을 할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며, 법치 즉 법 앞에 누구나 평등한 사회다. 롤즈는 서민층을 위한 사회로서 소위 ‘따뜻한 사회’를 지향하지만, 다음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우선 롤즈의 정의론이 추구하는 사회는 서민층이 특별한 권리를 갖게 되지만 그 밖의 사회 계층은 지속해서 경제적 자유를 침해당하는 구조가 된다. 이런 사회가 진공 속에 존재하는 실험실이라면 부유층의 자유를 침해화는 문제로 그칠 수 있지만, 글로벌화된 열린 세계에서는 국가경쟁력이 다른 나라에 비해 급속히 추락하므로 지속 가능하지 않다. 사실 후자의 문제 – 지속 가능하지 않은 사회 – 때문에 롤즈의 정교한 이론은 철학적으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현실적으로는 공허한 이론이다. 마르크스가 착취라는 개념으로 그랬듯이 롤즈는 기회평등이라는 개념을 일종의 종교적인 신념으로 만들어 현실 정치경제에서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되었다.

롤즈의 정의론은 인간과 사회 문제를 이성에 의해 설계하고 개조할 수 있다는 프랑스 전통의 이성주의의 산물이다. 시장이라는 오랜 전통의 산물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스코틀랜드 전통의 자유주의와는 출발점부터 다르다. 불행히도 오늘날의 주류경제학은 실험실적인 균형이론과 그 속에서 오직 경제적 이해에만 반응하는 원자적 인간을 가정함으로써 프랑스적 이성주의의 전통에 가까운데, 그래서 경제학계에서 롤즈를 친숙하게 추종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롤즈는 자신의 정의 이론을 전개하기 위해 사고 실험을 고안했는데, 그 핵심은 원초 상태(original position)라는 초기 조건이다. 원초 상태에서 구성원은 다른 사람이든 자신에 대해서든 누가 어떤 계층에 속해 있으며, 천부적 재능은 무엇인지 등 자신의 판단에 영향을 미칠만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고 전제되는데, 이를 그는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이라 했다. 무지의 베일 속에서 구성원은 이타적 생각이나 가족의 내력이나 전통 같은 것은 무관하게, 오직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선택을 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런 초기 조건 아래에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사회계약을 한다면 어떤 원칙을 세워야 하는가? 이 질문의 답을 구한 것이 바로 롤즈가 제시한 정의 이론이다.

그의 이론 전개과정을 보면 롤즈가 프랑스적 이성주의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은 명석한 이성을 갖는 데카르트 같은 철학자이므로 정교한 사고실험과 해답을 제시할 수 있지만, 그 실험 속의 개인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오직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원자적 인간이다. 그 결과 만들어진 롤즈의 정의론이 루소의 자유의지(general will)처럼 그런 것이 있는지 증명할 수는 없지만, 선동적인 효과가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루소와 같이 프랑스적 이성주의라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한 탓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프랑스적 이성주의적 주장은 현실적으로는 작동하지 않지만 선동적이다. 롤즈가 자신의 정의론을 세우는 과정을 보면 하이에크적 발견 과정인 시장 메커니즘과는 거리가 먼 실험실 속의 정적인 세계를 상정했음을 알 수 있다. 시장 메커니즘의 발견적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식(knowledge) 요소는 무지의 베일이라는 사고 속에서는 완전히 배제된다.

롤즈의 정의 이론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원칙으로 구성된다.

1. (기본자유의 평등) 각 개인은 정치, 언론, 사상, 종교, 양심, 인신의 자유, 사적 재산을 보유할 권리 등 기본 자유(basic liberties)는 평등하게 보장되어야 한다.

2. 기본 자유가 보장된 조건 하에, (1)(기회의 평등) 직업과 지위는 공정한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조건에 의해 모두에게 열려 있어야 하며, (2) (차등의 원칙) 직업과 지위에 결부된 불평등은, 그와 결부된 수입과 부의 분배에서 가장 혜택을 못 받은 계층에게 가장 큰 이익이 돌아가도록 될 때만 허용되어야 한다.

제1원칙에 나오는 자유의 항목에는 생산재를 소유하고 계약하는 경제적인 자유는 빠져 있다. 이는 자유주의 사회의 바탕을 이루는 기업경영의 자유가 빠져 있다는 것을 말한다.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집과 그 속에 있는 가재도구는 사유재산으로 각자 보유한다. 그러나 문제는 국가 경제를 이끄는 근간인 ‘기업 하는 자유’가 보장되느냐는 것인데, 이것이 보장되지 않는 사유재산 보장이란 국가 경제의 규모에서 보자면 아주 작은 부분만을 보장한다는 것이나 다름 없다. 또한 롤즈가 기업하는 자유를 기본 자유에서 뺀 것은 경제를 균형 속에서 영위되는 존재라는 주류경제학적 관점을 반영한 것이다. 기업가 정신을 소유한 기업가의 존재 없이도 정부가 임명하는 사람 아무에게나 맡겨도 별문제 없이 돌아가는 것이 기업이라면 구소련이 왜 망했겠는가?

롤즈의 정의론에서 자유의 평등원칙에 따라 보호받을 수 있는 기본적 자유는 정신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이다. 반면에 생산수단의 재산권이나 계약의 자유같이 기업을 경영하는 자유 같은 것은 기본적 자유와는 수준 차이가 있으므로 보호받지 않아도 별문제가 없는 것처럼 취급된다. 그러나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재산권이 없으면 출판사, 방송사 같은 기관을 사업주의 경영 철학에 따라 경영할 자유가 없게 된다. 대신 언론, 출판사는 국가에서 운영하거나 재산권과 관계없는 어떤 종류의 위원회가 경영하는 구조가 될 것인데, 이런 체제는 필연적으로 책임 없이 논리만이 난무하는 관료주의에 빠질 것이다. 개인이라는 다양성이 실종되고 집단주의적 관료주의에 휩쓸린 언론, 출판사만이 남는 세상에서 개인들이 사상의 자유를 지킬 수 있을 것인지는 상상하기 어렵다.

롤즈의 제2원칙 중 기회평등의 원칙은 누구나 자신의 능력에 따라 사회 속의 지위와 직업에 도전하고 선택될 기회가 평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롤즈는 기회의 평등을 극한까지 확장하여 사람이 타고난 재능에 차이가 있는 것은 자연적 복권을 받은 것과 같아서 불공정하므로 그 차이를 보상해 주어야 한다는 데까지 나갔다. 이는 부자로 태어난 사람이 교육의 혜택을 더 많이 받는 식으로 시장경제 속에서의 경쟁할 때 그 사람의 사회적 처지에 의해 출발점부터 불평등을 만들고 부익부 빈익빈을 조장하므로 그들의 출발선을 가지런히 맞추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공교육의 평준화로 학교로부터 학생의 선발권을 국가가 회수하고, 교과 과정도 획일화하여 차등화된 교육의 기회를 없애는 것은 바로 이런 사고가 바탕이 되었다. 젊은이들에게 열심히 자기 계발을 해서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공부를 안 해도 차별 없는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부추기는 꼴이다. 능력을 타고났다는 자체가 죄인 것 같은 사회, 능력이 없게 태어났다는 것이 무슨 권리인 것 같은 사회는 발전적이지 않다. 더욱이 능력이라는 것은 시장이라는 발견의 장에서 부단히 노력하면서 개발되는 부분이 큰 것인데 롤즈적 관점은 개인의 능력을 복권의 당첨금처럼 정적인 재화로 보고 있다. 지위와 직책에 대한 기회의 평등 원칙에서 또 한가지 문제는 노조에 의해 새로이 사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기회가 제한되는 현상이다. 이미 대기업 조직의 직위를 차지한 개인들이 결성한 노조는 임금 가격을 시장가격에서 이탈시킴으로써 새로 일자리를 찾는 사람이 가져야 할 공정한 기회를 박탈한다. 이런 형편을 생각할 때 어쩌면 롤즈의 기회평등은 사회의 전체 구성원이 모두 완전고용이 된 사회를 가정하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실업자에게 노조의 임금 협상은 기득권층의 팔자 좋은 놀이 같은 것이다.

롤즈의 제2원칙 중 차등원칙은, 능력의 차이를 인정하여 차등분배를 해야 할 때는, 그 차등으로 인해 가장 열악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더 나아지는 조건에서의 차등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이 원칙의 원래의 취지는 이렇다. 어느 회사의 CEO 자리는 기업가정신을 갖고 기업 경영의 수많은 노하우와 전문성을 보유한 사람이 맡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주의 경제에서 대기업의 CEO는 일반 사원보다 비교할 수 없는 높은 보수를 받는다. 만약 차등을 허용하지 않고 CEO 자리에 사원 중 하나를 제비뽑기로 선발하여 앉히고, 보수도 다른 사원과 평등하게 주기로 했다고 하면 어떤 결과가 예상되는가. 아마도 그 회사는 실력 없는 선장이 모는 배가 풍랑을 만난 것처럼 조만간 경쟁에서 도태되고 시장에서 퇴출당할 것이다. 그 결과 무조건적 평등을 내세우다가 회사 내에서 가장 열악한 처지에 있는 말단 직원이 직업을 잃게 되므로, 그런 평등이 최선책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차등을 허용하더라도 실력 있는 경영자를 세워야 하는데, 단 그 차등은 말단 직원이 받을 보상이 최상이 되는 선까지만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지의 베일이라는 가정에서 어쩌면 내가 가장 열악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될 수도 있으므로 이런 차등의 원칙이 안전하다는 점은 이해가 간다. 다만 사회 전체를 생각하면 진취적이지 않고 위험회피적 또는 안전 추구적인 정책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롤즈의 차등원칙을 해석하면서, 불평등을 허용하려면 그 타당한 증거를 대라는 식으로 몰아갔다. 그 결과, 차등원칙은 원래의 취지에서 한 단계 더 비약하여 사회적으로 열악한 계층에게 평등분배를 위해 인센티브를 주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더 나아가 사회적으로 상위 계층에게는 누진적 세금과 높은 상속세 등으로 의무를 부과하고 열악한 계층에게는 무상 복지를 권리화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해석되었다. 부자는 죄인이 되고 빈자는 보상받을 권리를 부여받아야 한다는 풍토를 만든 것이다. 제1원칙에서 기본적 자유를 공평하게 배분했으므로 롤즈가 보기에 덜 중요한 경제적 자유는 사회적 최소 수혜자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전통의 경제학의 시조라 할 애덤 스미스에 의하면 사유재산제도는 건물의 대들보와 같다. 물론 그가 말하는 사유재산 속에는 가재도구나 집을 소유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기업 하는 자유와 계약의 자유를 포함하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롤즈가 말하는 최소 수혜자의 보호 같은 이타심은 중요하긴 하지만, 열린 거대 사회에서 이런 덕목은 대들보가 아니라 실내 장식품 같은 보조적인 가치라고 본다. 이는 인생에 성공한 개인과 NGO 단체 등이 자발적으로 할 일이지 기업에 의무를 부과한다거나 사회를 인위적으로 재단하려고 하면 필연적으로 국가 개입주의로 빠지고, 결국 사회주의 국가가 된다. 장식품 없이는 살아도 대들보 없이는 건물이 무너지는 것인데, 한국 사회의 현상은 대들보는 없애고 장식품만 주렁주렁 매단 집을 만들려는 모습을 보인다.

자유주의 관점에서의 정의의 원칙은 롤즈적 분배정의가 아니라 열린 사회에서 사는 ‘정의의 규칙’이다. 자유주의는 타인의 무원칙에 의한 피해자가 되지 않도록 ‘자의적 강제’로부터 보호받기 위해서 정의의 규칙이 필요한데, 이는 개인의 사적 영역 특히 재산과 생명을 침해하는 행동을 금지하는 것이 최우선 원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계약을 지키고, 사기나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 남의 재산과 사적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데 이런 것이 애덤 스미스가 보는 정의다. 이렇게 정의의 규칙이 지켜지는 가운데, 누구나 보호된 범위에서 자신의 방식대로 자신의 이해관계를 마음껏 추구할 자유를 누리게 된다. 그 결과 사람들은 창의, 지식의 활용, 다양한 행동 가능성 속에서 개인은 정신적 자유를 포함하여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키워갈 수 있게 된다. 즉 기업을 창업하고 경영하며 계약하는 사유재산제도가 철저히 보호되어야 롤즈가 말하는 정신적 자유도 확립될 수 있다. 생산수단에 대한 사유재산권이 없는 체제에서는 우리의 육신은 무엇을 창조하고 발견하는 일을 할 기회조차 없다. 더욱이 생산수단에 대한 사유재산권이 없으면 사회주의 체제가 그렇듯이 가격이 없고 가격이 없으면 경제계산이 불가능하여 낭비와 불합리가 만연한 관료주의만이 남을 뿐이다.

자유주의적 접근만이 사회를 동적이고 성장하는 사회로 만들며 그렇게 창출된 부를 이용하여 꼭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선별적 복지도 할 수 있다. 롤즈적 정의론은 조만간 글로벌 경쟁에서 도태된 국가 경제에 의해 사회적으로 열악한 계층이 가장 먼저 극단에 몰리는 베네수엘라 같은 사회를 만들 것이다. 먹을 것을 사려고 새벽부터 줄을 섰지만, 저 앞에서 물건이 동나고, 사람들은 사회가 제공하는 ‘강제적 다이어트’에 의해 평균 몸무게가 줄고, 먹고 살려고 약탈과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는 전혀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다. 그런데도 한국 사회는 나라 전체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활력을 잃고 망조가 들지언정, 재원은 있든 없든, 우선은 퍼주기 공약을 내세우는 지자체장을 뽑겠다는 포퓰리즘으로 기운다. 한국인의 속성은 원래가 롤즈적인가? 이 점은 별도로 논의할 필요가 있다.

문근찬 숭실사이버대학교 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5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