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9월 15일 – 인천상륙작전 개시

 1950년 6월 말, 서울이 함락되고 북한군이 물밀 듯 남쪽으로 내려올 때부터 상륙 작전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후 미군은 인천, 군산, 해주, 진남포, 원산, 주문진 등 한반도의 가능한 모든 해안 지역을 대상으로 상륙 작전 대상지를 물색하였다. 7월 초, 맥아더 장군의 지시에 따라 극동군사령부는 인천에 상륙하는 작전 100-B, 군산에 상륙하는 작전 100-C, 동해안 주문진에 상륙하는 작전 100-D를 제안했다. 작전명은 광석 이름인 ‘크로마이트’. 보안 유지를 위해 작전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단어를 골랐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상륙 작전의 초안이 만들어진 것은 7월 23일이었다. 
 
 북한군에 밀린 국군과 유엔군은 8월 초 낙동강까지 후퇴하였고 한반도의 끝인 부산을 지키려면 더 이상 밀려서는 안 되는 상태에 이르렀다. 낙동강 유역에서는 매일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북한군은 끝내 강을 건너지 못했다. 공군기가 북한군의 보급로를 집중 공격하여 북한군의 보급 체계가 완전히 무너졌고 파죽지세 같던 북한군의 기세를 간신히 꺾을 수 있었다.  
 그 무렵, 맥아더 사령부는 인천상륙작전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의 참모들과 상륙 작전을 실제로 수행할 미 합동참모본부, 해군본부는 인천에 상륙하는 것을 반대했다. 인천 앞바다는 상륙 해안으로서의 악조건은 모두 다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륙 부대 참모진의 장교였던 알리에 캡스 해군 중령은 “우리는 자연적, 지리적 장애들의 목록을 만들었는데 인천은 그것들을 모두 갖추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인천 자유공원에 있는 맥아더 장군 동상

 

 인천은 썰물과 밀물의 차이가 크고 바다가 얕은 편이다. 미국 해군의 상륙함은 7m, 전차를 실은 배 LST는 8.9m 정도로 바다가 깊어야 움직일 수 있다. 이런 정도의 수심은 밀물이 최고 높이에 이르는 만조 때나 만들어지는데 이런 날은 한 달에 한 번 사나흘 있을 뿐이었다. 항구로 들어오는 뱃길도 좁고 물살도 거셌다. 게다가 수백m 이상의 폭과 길이의 넓고 긴 갯벌, 돌로 쌓은 높은 방파제와 축대로 구성된 해벽, 항구에 인접한 시가지 등도 장애 요소로 거론되었다. 또 최소 5~6개월은 걸리는 상륙 준비를 한 달여 만에 해야 하는 문제도 있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인천이 상륙 작전에 적합하지 않은 곳이기 때문에 적군도 방어를 소홀히 할 것이라 주장하며 반대하는 사람들을 설득했다. 결국 9월 9일 크로마이트 작전은 미 합동참모본부로부터 최종 승인을 받았다. 1950년 가을, 인천 해안에서 상륙 작전이 가능한 날은 9월 15일, 10월 11일, 11월 3일과 이 날짜를 포함한 전후 2~3일뿐이었다. 그런데 10월은 상륙하기에 늦은 시기이므로 맥아더 장군은 9월 15일에 인천상륙작전을 펼치기로 했다. 적군의 허리를 효과적으로 끊기 위해서였다. 그날은 바다의 깊이가 9.6m에 이르는 만조 시기였다.  

상륙 작전 시 사다리를 타고 해벽을 오르는 미 해병대의 모습(인천상륙작전기념관)

 

 8월 26일 맥아더는 상륙 작전을 담당할 제10군단을 편성했다. 주요 부대는 미 제1해병사단과 미 제7보병사단이었지만 이로는 병력이 부족하자 한국 청년 8,000여 명을 선발하여 일본에서 훈련한 후 작전에 배치하였다. 주한 미군에 배속된 한국군 ‘카투사’가 이렇게 만들어졌다.
 미 제7함대를 주축으로 한 유엔군 함정 261척과 미 제10군단 예하 국군 2개 연대를 포함한 미군 2개 사단 등 총 7만여 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지상군 부대는 9월 15일 새벽 두 시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했다. 상륙 작전은 2단계로 전개되었는데, 제1단계는 월미도 점령, 제2단계는 인천 해안의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제1단계 작전에서 미군의 구축함과 전투기가 인천 시내와 해안을 포격하는 가운데 미 해병대가 월미도에 상륙하였다. 저항하는 북한군을 무찌르고 치열한 시가전 끝에 연합군은 인천을 장악했다.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연합군은 한강을 건너 서울을 되찾을 수 있었다. 서울까지 오는 중에도 치열한 교전이 계속되었지만 결국 9월 28일 오전 6시 10분 중앙청에 달려 있던 북한 인공기를 내리고 태극기를 게양할 수 있었다. 북한군에 의해 서울을 빼앗긴 지 92일 만이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의 모습을 담은 부조(인천 자유공원)

 

 
 낙동강 전선에 모든 것을 걸었던 북한군은 인천의 기습으로 독 안에 든 쥐가 되었다. 북한군은 무너졌고 수많은 병사가 부대에서 탈출했다. 강제로 끌고 간 의용군이 많았기 때문에 이탈자도 많았다. 모든 전선에서 북한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군사학자들은 인천상륙작전을 20세기 역사상 최고의 군사 작전이라고 평가한다. 미국의 군사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스펜서 C. 터커는 인천상륙작전에 “훌륭한 성공이며 거의 결점 없이 실행되었다”라고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무엇보다 인천상륙작전은 국군과 유엔군이 열세에 있던 전쟁의 전황을 단숨에 뒤집고 풍전등화였던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구해낸 위대한 작전이다.  
 그러나 인천 자유공원에 설치된 맥아더 장군 동상은 수시로 철거 위협에 시달려야 하고 인천상륙작전 때문에 석 달 만에 끝낼 수 있던 전쟁이 3년을 끌어 엄청난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얼토당토않은 주장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맥아더 장군을 비난하고 인천상륙작전을 폄훼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몸 담고 있는 대한민국이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 것일까?

황인희 작가(다상량인문학당 대표·역사칼럼니스트)/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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