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

 

인류 역사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사상(事象) 중 전쟁을 통한 문명, 문화의 충돌이 이문화 교류, 이문화 접촉·전파의 가장 빠른 구실을 하게 된다.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렇게 말했다. "전쟁이야말로 문화의 아버지다."

20세기 동아시아에서 벌어진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은 대폭 세계에 알려지며, 조선 역시 19세기보다 널리 알려지게 됐다. 일본이 러시아 제국을 격파한 계기로 일본인의 '무사도'가 그 국민성을 제시한 키워드로 인식되기도 한다.

1899년 니이토 베이나로의 영문저작 '무사도'의 영향은 지대했다. 이 책은 무사도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아니었다. 러시아에 승리한 일본 정신의 근저를 서양의 기사도와 비교함으로써 무사도 정신이야말로 일본의 국혼이며 일본 정신이라는 점을 서양인에게 알리고자 한 비교문화론적인 '일본론'이었다.

당시 영일동맹을 맺어 일본과 가장 친숙한 관계에 있던 서양의 대표적인 국가 영국이 일본인의 '무사도'적 국민성에 공명을 일으켰다. 이안·해밀튼은 '겸허'와 '엄청난 자존심'으로 무사도를 칭찬하는가 하면 1904년에는 '일본인이 쓴 일본'이란 논집을 낸 영국인 식자도 있었다. '타임즈' '재팬 메일' 등 신문에서도 일본 정신의 '고결함'을 예찬하는 글을 대폭 실었다.

그러나 사실 서양인을 향해 발사한 '무사도' 정신은 메이지 시대 '충효'나 '충군애국'을 골자로 만들어낸 것이지 본래의 '무사도'와는 이질적이었다.

사상사 연구자이며 교토대학 인문연구소에 몸담고 있는 교수 야마무로는 일본 "무사계급의 논리가 '신국(神國)'으로서의 전통 탓으로 국민성이 되어 뿌리박은 것이라는 의론 자체가 만들어진 허구에 불과하다"고 설파한다.

그런데 우리의 눈길을 다시 당시의 동양으로 돌려보면 일본 내에서 '무사도론'이 유행처럼 일세를 풍미하고 있었는데, 일본에는 중국에서 온 많은 젊은 유학생들과 양계초 등 정치적으로 망명한 젊은 리더들이 있었다.

그들은 일본이 강대국 러시아에 전승할 수 있었던 이유와 일본이 급속히 아시아 최강의 근대국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던 까닭은 일본 '국민성'으로서의 무사도와 애국심에 있었다고 인식하게 된다.

"일본을 따라배우자"란 슬로건을 내걸고 일본에 온 유학생과 망명 정치가들은 청국의 전쟁 패배, 무술변법의 조절에서 일본만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품고 일본 학습의 공전의 붐을 일으켰다.

유학 직전 베이징에서 러일전쟁의 개전을 알게 된 추근은 일본의 용무(勇武)와 독립정신을 칭송하는 시를 읊는다. 그뒤 1904년 일본땅을 밟은 후 집필한 '우리 동포에게 경고한다'는 글은 당시 유학생들의 공통된 심정을 토로했다.

"정말 무척 부러웠던 것은 일본의 어린이들이 큰 아이, 작은 아이 할 것 없이 길가에 서서 손을 흔들며 만세를 외치는 광경이었다. 실로 사랑스러웠고 너무 부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우리 중국에 언제나 이런 정경을 볼 수 있을까. 일본인들은 이렇게 한마음 같이 군인을 존경한다. 오늘 러시아라는 대국이 작은 섬나라 일본에 패한 것도 이것 때문이리라."

이는 중국 유학생들이 "전사를 기원한다"란 말이 적힌 깃발을 들고 전장터로 나가는 군인을 배웅하는 열렬한 광경을 보고 많은 충격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문(文)을 중시하고 무(武)를 경시하는 중국의 풍토에서 "남아는 병사가 되지 않는다"는 속담과 같이 군대를 경시하는 습속이 있었다.

그때 양계초가 일본에서 발견한 것이 '일본혼'이라는 국혼이었다. "일본인이 늘 말하는 것으로 일본혼이라는 것이 있다. 무사도라는 것도 있다."

그는 '중국혼'이란 책을 집필했는데, 여기서 일본 성공의 이유가 '대화혼(大和魂)'이라 결론 내린다. 일본에 따라 배워서 중국인도 중국혼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산해혼(山海婚), 모험혼(冒險魂), 군인혼, 평민혼, 사회혼"등 다양한 중국혼을 전개했다.(왕민, '중국인의 애국심')

양계초는 중국인으로서 최초로 1899년 10월 15일 '청의보(淸議報)'에서 '국민'이란 단어를 사용한 인물이며 '애국주의' '애국심'을 창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일본 체류 때 그는 애국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애국가 '애국가 四章'을 요코하마 중화대동학교의 창설자로서 학생들에게 부르게 한다. (야마시타 신이치)

양계초가 애국교육으로서 창도한 '덕육, 지육, 체육' 3개의 방침은 일본에서 본을 뜬 것인데, 그것이 그 뒤 마오쩌둥을 통해 신중국에도 이식된다.

그리고 양계초가 쓴 '중국혼'은 장지연에 의해 1906년 조선에서 번역 출간되면서 같은 맥락에서 '조선혼'을 창출하고자 하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최석하는 빼앗긴 주권을 되찾기 위한 '조선혼'의 중요성을 설파하며, 박은식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무력을 갖춘 '한국혼' 양성설을 전개한다.

그리고 신채호는 '국민혼', 신규식은 '한국혼'을 보급시킬 필요성을 역설한다. 나라와 민족의 독립 자주를 회복시키는 데서 누락할 수 없는 국혼, 국민혼 사상이 일본을 통해서 수용, 전파되면서 민족독립운동의 애국적 핵심사상으로 간주됐다. 이리하여 장래 국혼과 애국심을 길러 국가를 빼앗은 일본을 타도하는 정신적 힘을 기르자는 인식이 형성, 정착돼 간다.

당시 일본유학 중이었던 노신이 발표한 '스파르타의 혼'이란 글에는 국가를 위해 죽는다는 정신을 예찬한 모티브가 설정된 것이 그 시대의 조류를 반영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일본을 통해 배운 무사도의 상무정신, 국혼, 애국심 등 사상의식은 훗날 중국이 일본과 싸운 항일전쟁에서 발휘되었던 것이 아닌가. 그리고 조선의 항일독립운동에도 이같은 국혼, 애국심이 동원된 것도 일본에 대한 아이러니이며, 이 역시 근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일본에서 배운 것을 일본을 무찌르는 예리한 무기로 활용했으니 말이다. 

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현 일본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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