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

 

'영웅' 안중근과 원훈(元勳) 이토 히로부미.
한국과 일본에서는 서로 대립되는 구도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필자는 안중근과 이토를 평상심으로 해독하면 할수록 두 인물의 많은면에서 공통점을 발견하게 됐다.

우선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고 인간의 정의감과 그 실현에 있어서 의지의 완강함은 양자에 있어 공통되고 있다. 그리고 '동양평화'라는 공통적 사상, 구상을 갖고 행동을 했던 인물들이다. 안중근의 동양평화사상에 대해서는 이미 독자들도 어느 정도 이해했으리라 믿지만, 이토는 문인형 정치가로서 서구적 문명관에 입각해 문명통치, 온건한 평화주의자였다. 러일전쟁에도 극력 반대한 이토는 비전론자였으며 1904년 3월 당시의 하라케이(그후 일본의 수상)의 일기에서도 이점이 입증된다. 러일전쟁 당시 1904년 4월 이토는 한국을 방문하여 고종을 배알해 의견을 상소했는 바, 그 내용은 동양평화 유지를 위해 구미제국을 모범으로 문명을 증진, 자립하는 것, 구미의 문명을 배워 러시아 침략을 배제하는 것, 아시아의 힘을 합쳐 문명을 이루어 서구의 폭력을 허용하지 말아야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이토의 러일전쟁 정당화가 밑에 깔려 있지만 서구문명으로 근대화를 이뤄 동양평화를 지키자는 이념은 안중근의 그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었다.

또한 이토는 안중근과 비교해 문명적 서구사상이 가미되어 중층을 이루고 있었다. 입장이야말로 서로 달랐으나 이들은 다 동양평화와 일청한 연대로 서양열강의 침략을 방지하자는 사상은 일치성을 보였다.

그리고 양자가 다 유학, 한문적 소양이 깊었으며 지적인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현재 이들이 남겨준 유묵을 보아도 달필, 명필이라는 단순한 차원을 넘어서 그들이 이것을 통해 완강한 신념과 의지로 살아왔다는 점을 후세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안중근의 의젓한 태도와 신조는 일본측의 감옥이나 법원 관계자들에게 존경의 대상이었다. 자기들의 원훈을 사살한 이국의 '테러리스트'에 대해 이 정도로 존경심을 품은 전례는 별로 없을 것이다.

현재까지 안중근을 의사로 칭하며 동정심을 품고 존경하는 일본인이 적지 않다.

그러나 안중근에 대한 일본의 경의에 비해 한국인의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태도는 그 인식 정도에서도 나타나는 바, 인식이 옅고 왜곡된 부분이 상당히 많다. 그냥 무조건 이토라는(영웅 안중근의 대척점에 선 자) 인물을 '침략의 원흉'이라는 고정된 관념으로 일축시키고 더이상 알려고도 하지 않고 '악자'로서만 고착시키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일본과 한국에 있어서 이토와 한국의 '방정식'이다. 이토와 안중근의 방정식을 푸는 것은 곧 '한일근대사의 방정식'을 해독하는 것으로 통한다고 필자는 여긴다.

이제 성숙한 민족이라면 한국인들도 일본인이 안중근에 일정한 이해나 경의를 표했듯 이토에 대한 이해를 표하는 정도의 인식에는 도달해야 하겠다. 이토에게 경의를 표하라고까지는 강요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이토에 대한 인물상, 성격, 그가 진정 지향했던 이념, 구상을 좀더 평상심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와 아량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게 필자의 제안이기도 하다.

인물상에 대해 잘 모르던 면들을 필자가 더 들어보겠다. 안중근 사진이 현재 10매 정도 유포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여순감옥의 돌담을 배경으로 한 상반신 사진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 사진은 근년 한국의 포스터나 출판물에 잘 사용되고 있다. 안중근은 북반부 남자의 일반적 풍모를 하고 있으며 왼쪽눈이 쌍커풀, 오른쪽 눈은 단커풀이다. 키는 163cm, 왼손잡이다. 왼손 약지의 제일 관절에서 끝은 단지동맹 때 잘라버렸다. 이 단지의 왼손바닥으로 찍은 손도장이 그의 상징이기도 하다.

하얼빈역에서 이토 저격 직후, 러시아 관헌에 잡힐 때의 기록화를 보면 러시아 헌병이 안중근의 왼팔을 비틀어 잡고 있으며, 심문중 권총을 넣은 곳이 "오른쪽 옷 우라의 호주머니에 넣었다"고 안중근 본인이 공술한다. 왼손잡이니까 권총을 꺼내기 좋게 오른편 가슴에 품었던 것이다. 또한 안중근은 건강상태가 매우 양호한 청년이었다.

한편 이토는 키가 161cm, 체중 58kg(1909년 7월)로서 작은 키에도 몸은 건강해 3시간만 자고서도 아무 문제 없이 건강했으며 "오관으로부터 흉부 복부 내장에 이르기까지 약점이 없었다. 실로 강장자의 표본이다"라고 주치의 코야마가 증언한다.

이 두 인물은 다 왜소한 체구였지만 품은 뜻은 또 다 웅대한 사나이들이었다. 기하게도 생일이 다 9월 2일이었다. 만일 그들이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났다면 어떻게 대면했을까. 궁금해진다.

안중근 회상기나 주변 증언에 따르면 안중근 역시 일본인의 태도에 영향을 받고 미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자신이 이토를 죽인 것에 대해 "나는 실로 죄인이다"라고 간수 치바 토시치에게 고백한다. 그리고 이토에게 사적인 원한이 아니고 이토 가족에게도 죄송하다고 말한다. 1937년 10월 이토의 아들 이토 후미요시와 안중근의 차남 안준생이 서울에서 만나 서로 악수하고 화해를 했다(조선일보 1937년 10월 17일).

동양평화의 뜻을 둔 선친들의 유지를 이어 서로 화해하는 것은 '동양평화'의 길이 아닐까. 원념을 넘어 평화를 지향하는 미래지향의 21세기 한일양국에 기대하고 싶다.

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현 일본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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