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객원 칼럼니스트
김태우 객원 칼럼니스트

7월 27일은 정전협정 70주년 기념일이다. 한국은 이 날을 ‘정전협정 및 유엔군 참전의 날’로 부르면서 한국군 및 유엔군으로 참전했던 용사들을 기리고 전사자들을 추모한다. 금년에도 그랬다. 26일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성남공항에서 하와이에서 돌아오는 6·25 참전용사들의 유해를 맞이하는 행사를 엄수했고, 27일에는 부산 유엔기념공원과 ‘영화의 전당’에서 22개 참전국의 대표단과 유엔 참전용사들을 모시고 기념식을 열었다. 북한이 이 전쟁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방식은 판이하게 다르다. 북한은 이 날을 ‘조국해방전쟁 승리 기념일’이라고 부르며 ‘전승절’로 약칭한다. 매년 6월 25일에서 7월 27일까지를 ‘반미 공동투쟁 월간’으로 정하여 승리를 기념하는 행사들을 벌인다. 금년에도 러시아 국방장관과 중국 전인대 상무위 부위원장을 초대한 가운데 기념공연과 열병식을 벌였다. 열병식은 화성17,18형 ICBM, 미국의 고고도 무인정찰기 RG-4를 본딴 ‘샛별4형’ 무인정찰기, 역시 미국의 MQ-9리퍼 무인공격기를 모방한 ‘샛별9형’ 무인기 등을 선보이는 무력과시 행사였다.

그렇다면, 6·25는 진정 북한이 주장하는 대로 미국과 한국이 도발한 북침전쟁에서 북한이 승리한 전쟁이었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정전 70주년을 맞이하여 되돌아보는 6·25 전쟁은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1,129일간의 동족상잔이었고, 비긴 전쟁이자 모두가 패배한 전쟁이었으며, 동시에 자유와 번영을 수호한 전쟁이었다.

‘북침론·북침유도론·수정주의 이론’이라는 궤변들

1953년 정전 이래 북한은 6∙25를 미국과 남한의 침략전쟁이었다고 선전해왔으며, 국내 좌파들도 이 주장을 따랐다. 그러나, 전쟁 발발 나흘째인 6월 28일에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북침설의 허구성을 증명하는데 부족하지 않았다. 이어서 등장한 것이 북한이 남침한 것은 맞지만 “남조선 괴뢰정부와 미 제국주의자들이 북한의 군사행동을 유도하는 각종 도발을 저질렀다”는 소위 ‘북침유도론’이었다. 하지만 한국과 미국이 사전에 모의한 전쟁에서 40여일 만에 북한군이 대구-부산 축선의 경상도 일부 만을 남긴채 남한국토의 90%를 점령할 수 있었겠는가? 이후 한·러 수교 직후인 1994년 러시아가 당시 김영삼 정부에게 공개한 극비문서에서 김일성 주석이 남침계획을 승인받으려 소련과 중국을 왕래한 기록이 밝혀지면서 북침론이나 북침유도론은 설득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래서 그 중간에 등장한 것이 ‘수정주의 이론’이었다. 1981년 브루스 커밍스는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을 통해 미소 대결이라는 국제환경과 남한내 모순들이 전쟁을 불러왔다고 주장함으로써 전쟁의 핵심적 원인인 평양정권의 적화통일 야욕에 대해서는 면죄부를 주었다. “누가 전쟁을 일으켰는가라는 것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라는 해괴한 논리도 펼쳤다. 이후 수정주의 이론은 한국내 좌파들의 좌우명이 되었고, 이 이론은 지금도 좌파들이 새내기 운동권들을 양성하는 ‘성서’로 맹위(?)를 떨치고 있다.

하지만, 북침론, 북침유도론, 수정주의 이론 등은 아직도 생존해 계시는 6·25 참전용사들이 들으면 펄쩍 뛸 얘기다. 전쟁 발발 당시 인민군은 20만 병력에 전차 242대, 야포 652문, 전투기 211 대 등의 전력을 가졌던 반면 한국군은 10만 병력에 전차는 한 대도 없었고 항공기라고는 훈련기 22대가 전부였다. 6월 28일 서울과 홍천을 점령한 인민군은 7월5일 오산 죽미령에서 일본에서 급히 날아온 미 24사단 스미스 대대를 휩쓸고 남하하여 7월 24일에 대전을 점령했으며, 7월 말에는 호남 전역과 김천, 진주 등을 장악했다. 하지만 이후 미군을 중심으로 하는 유엔군의 본격적인 참전, 백선엽 장군의 다부동 전투 승리, 유엔군의 9·15 인천상륙작전 등으로 서울을 수복하고 북진했으나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다시 후퇴해야 했다. 사전에 전쟁을 준비한 북한이 중국과 소련이라는 뒷배를 믿고 기습 남침하지 않았다면 발생할 수 없는 시나리오다.

비긴 전쟁이자 모두가 패배한 전쟁

북한이 7월 27일을 북한이 ‘조국해방전쟁 승리 기념일’로 부르는 것도 말이 안 된다. 6·25 전쟁은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되어 유엔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뒤집혔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역전된 후 중부지방에서 전선이 교착되면서 1951년 7월부터 휴전협상이 시작되어 1953년 7월 27일에 멈춘 전쟁이었다. 즉, 38선에서 시작되어 1년 동안의 기동전과 2년 간의 고지전이 이어진 끝에 현재의 휴전선으로 마감된 전쟁으로 남북 간 경계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비긴 전쟁’이었다.

쌍방 간에 엄청난 인명이 희생되고 국토가 파괴되었다는 점에서는 ‘모두가 패배한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맞다. 이 전쟁에서 한국군은 전사 13만8천 명, 부상 45만1천 명, 실종 2만 4천5백 명 등의 인명피해를 입었으며, 북한군은 52만 명의 전사자와 13만 명의 실종자를 기록했다. 유엔군은 전사 3만8천 명, 부상 10만3천5백명, 실종 4천 명을 기록했는데, 가장 큰 인명피해를 낸 나라는 전사 3만3천 7백 명, 부상 9만2천 명, 실종 3천7백 명 등을 기록한 미국이었다. 중공군도 공식적으로는 전사 14만 1천 명, 부상 22만 명, 실종 2만9천 명 등의 피해를 본 것으로 나와있지만 인해전술을 즐겨 사용했고 수많은 민간인들을 전투에 투입한 중국의 인명피해가 100만 명에 육박한다는 추정도 있다. 어쨌든 이런 피해 측면에서 보면 6·25는 모두가 패배한 전쟁이었다. 숱한 인명 피해와 국토파괴 이외에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한 공연한 전쟁을 도발했던 북한이 정전 이후 줄곧 미국과 남조선이 도발한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선전해왔다.

그러나 자유와 번영을 지킨 전쟁

정전 후 70년 동안 남과 북이 걸어온 길도 판이하게 달랐다. 북한은 체제 유지에 모든 것을 걸고 ‘북한식 사회주의’라는 미명 하에 폐쇄경제와 독재정치를 고수하면서 최빈국의 길을 걸었다. 주민의 삶보다는 핵무기를 만드는데 더 많은 심혈을 기울여왔다. 반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택한 대한민국은 ‘산업화와 민주화’ 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았으며 2018년에 개인소득 3만 달러 이상에 인구가 5천만 명이 넘는 나라를 가리키는 ‘30-50 클럽’에 가입하여 서유럽 및 일본과 함께 개인소득 4만 달러 시대를 구가하는 선진국이 되었다. 현재 한국 이외의 30-50 클럽 국가는 미국, 독일, 프랑스, 일본, 영국, 이탈리아 등 6개국뿐이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1년 기준 한국의 개인소득은 북한의 28.5배나 되고 무역액은 890배, 자동차는 100배, 전력생산량은 20배 그리고 휴대폰은 12배라고 한다. 그래서 북한을 가리켜 ‘핵무기 말고는 가진 것이 없는 나라’로 그리고 한국을 향해서는 ‘핵무기만 빼고 모든 것을 가진 나라’로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따지고 보면,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경제기적의 출발점은 이승만 대통령의 집념으로 이룬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 체제 대한민국 건국이었고, 그 대한민국은 6·25 전쟁 동안 하느님이 보우하사 한국군과 유엔군의 피로 지켜졌다. 이후 대한민국은 박정희가 주도한 부국강병 정책으로 산업화와 자주국방의 기초를 닦았으며, 한미동맹이 제공하는 안정성 토대 위에서 산업대국, 무역대국, 기술대국 그리고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결국, 6·25는 대한민국의 자유와 번영을 수호한 전쟁이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에는 이승만의 건국과 미국의 6·25 참전을 ‘분단의 원흉’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 모두는 인권도 언론·종교 자유도 없는 극빈의 땅에서 살고 있어야 한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은 그런 통일을 ‘민족이 하나가 되는 길’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김태우 객원 칼럼니스트(한국군사문제연구원 핵안보실장, 전 통일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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