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

 

지난 5월 17일 한국에서 귀국하면서 필자는 후쿠오카에서 1박을 했다. 현지 일본인 친구 니시모토씨의 안내로 그날 오후 조선의 민비(명성황후)를 기리는 석불이 있는 셋신인(節信院)이라는 절을 찾았다.
민비의 석불은 셋신인의 정문을 지나서 바로 왼쪽 편에 있었다. 셋신인은 후쿠오카의 번가로(藩家老)이며 후쿠오카 근황당 수령이었던 카토시쇼의 보제사였다.
석불은 아리따운 자안관음보살이었는데 자상한 그녀의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왼손으로는 어린애를 안고 있었고 오른손엔 연꽃잎을 들고 있었다.
그옆에 세워진 석비에는 자안관음보살의 유래가 새겨져 있었는데, 1895년 민비살해사건에 의해 희생된 민비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자안보살을 제작했다고 밝혔다. 원래 석불은 금속제였는데 대동아전쟁중 공출되었기 때문에 다시 석불로 복원시켰다고 한다.
이를 봉납한 사람은 토카츠아키라는 현양사 사원으로 그는 민비살해 시행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민비를 자안관음으로 만들어 봉납하여 영구히 명복을 빌기 위한 참회의 마음에서 그리 했다.
그리고 별도로 민비 참살에 사용한 일본도를 이 절에 봉납하려 했지만, 사람을 벤 칼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거절당했다. 그래서 칼은 하카다의 총진수 쿠시다 신사에 봉납돼 있다고 한다.
칼은 히젠도라 하는 칼로 16세기 큐슈의 히젠국의 타다요시란 장인이 제조했다고 한다. 칼집에는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라는 글씨가 적혀 있다.
뜻인즉 늙은 여우를 한순간에 베어버린다는 말이다. 이 일곱자를 쓴 사람은 몽암으로서 토카츠아키의 호이기도 하다. 물론 '늙은 여우'는 민비를 가리킨다.

후쿠오카 셋신인에 있는 자안관음보살. 민비를 기리기 위해 제작됐다. [사진=김문학]

 

그렇다면 왜 민비는 참살당해야 했을까. 19세기 말 조선과 일본의 역사 진상을 다시 캐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역사교과서에는 민비의 살해사건을 을미사변이라 통칭하고 있다. 을미사변은 주지하다시피 1895년 10월 8일 조선 고종의 부인인 민비가 살해당한 사건이다. 한국 국정교과서에서도 "일본 침략자들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대하드라마 '명성황후'는 그녀의 파란만장한 생을 묘사한 대작이다.
지금까지 한국사회에서는 민비 살해사건을 두고 일본의 죄악을 규탄하고 살해에 이르게 된 원인 분석, 그 당시의 국내·국제적 정세에 대한 심각한 성찰엔 게을리하고 있어 아쉽다.
필자는 근대사에서 을미사변과 그 뒤에 전개되는 아관파천은 조선 내부의 약점을 노정한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보고 있다. 그러면서 이 사건들은 늘 목에 걸린 가시처럼 그대로 방치해둘 것이 아니라 좀 더 깊숙이 원인 및 배경 분석을 내부 성찰을 통해 유도해내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좀 더 거친 표현을 하면 민비라는 인물은 총명다재하지만 권모술수에 능했고 음험하고 잔인하다는 요부형 일화도 많이 남아 있다. '일한 2천년의 진실'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예술적 미화와 가공을 버리면 그녀 역시 서태후 형의 여제일지도 모른다.
1905년 일본의 보호정책에 이르기 전까지 조선의 망국은 사실 일본의 야심보다 민비와 고종에 더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우선 일본인이 왜 조선 내부와 결탁해 민비를 제거하려 했을까. '이유 없이 일본이 조선의 왕비를 살해할 리 없는' 배경엔 무엇이 있었을까. 이런 국제적 정세에 대해 얽힌 일본, 러시아, 중국 관계 등 넓은 시야에서 고찰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
1884년 갑신정변이란 조선 최초의 근대개혁시 실권을 쥔 민비는 청군을 끌어들여 갑신개혁을 탄압했으며 그뒤 암살자를 파견해 잔혹하게 김옥균을 죽인다.
당시 조선 말기에 고종 국왕이 있었지만 그는 우유부단하고 유교의 왕도정치 원리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실제로도 역할을 하지 못했다. 고종의 아버지인 대원군과 왕비인 민비가 주도권을 두고 시아버지와 며느리 간 전쟁이 전개된 셈이다.
그래서 결국 대원군이 허수아비로 키운 고종이 민비의 허수아비로 된 것이다. 일본인도 조선시대 옛적부터 벌어져 온 내부 권력투쟁, 세도정치의 약점을 잘 숙지하고 있었던 바 이들은 이 약점을 역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1882년 임오군란 시기 민비가 시아버지 대원군을 누르고 실권을 쥐게 되면서 우선 민비 일족의 영달을 도모해 대원군 배제에 필요한 책사를 망라해 대원군의 재기 가능성을 제거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임오군란 전후 민씨 세도기에 조선 국가체제의 부패는 극한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민심은 민씨정권을 떠나 예전의 대원군 시대로라도 돌아가고 싶어했고, 이는 대원군의 부활 발판이 되었다(김기협). 조선군인들이 이 시기 민비를 암살하려 했는데 여기서 민비가 민심을 잃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민비가 있는 한 조선 개화도 독립도 이룰 수 없다'고 여긴 것이 조선인 내부 개혁파의 심정이었고 민비를 없애려는 심정을 이용한 것이 바로 일본인이었다. 여기에 흥미로운 자료가 하나 있다. '거인 토야마미츠루 옹'이란 1922년에 나온 책이다. 이 전기에 당시 민비살해사건의 주모자인 미우라 고로가 "누가 살해했냐 하면 내가 했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고 자백하면서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과 조선군의 혼성군이 경복궁에 침입하여 민비를 살해하고 그 시체를 능욕한 뒤 불태운다. 미우라의 증언에 따르면 왕궁에 이르니 고종은 피가 낭자한 전상에서 벌벌 떨고 있었고 대원군은 고종을 꾸짖고 있었다. 대원군은 미우라에게 고개숙여 인사를 하는데 "희색이 만연하여" 여러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대원군은 또 "숟가락으로 내 입 안으로 밥을 떠 주었다"고 말했다고 미우라가 증언한다.
대원군은 민비의 죽음을 바랐던 바이며 이것이 일본인과 조선인의 혼성군에 의해 실행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민비 살해는 대원군의 소원을 이뤄준 것이며 내부 투쟁과 일본인의 가세로 실현된 사건이다. 조선인 암살자는 이주회 장군, 이두황과 세계적 식물학자 우장춘의 아버지인 우범선 등이었다.
사학자 김기협씨는 "왕권몰락의 더 큰 책임을 가진 것은 고종과 민비 자신이다. 그들은 온 백성의 어버이로서 본분을 생각하지 않고 탐욕을 위해 정권을 운용하는 모리배들 틈에 스스로 끼어들어 자기 몫 챙기기에 바빴다"고 지적한다.
대원군과 연합한 혁명세력은 일본군의 힘을 빌어 민비를 없애고 그 일족을 배제하여 다시금 혁명정부를 수립하게 된다. 민비세력을 중심으로 한 친러파가 결국 친일파 세력에 패배당하는 순간이었다.
유약한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을 대피하는 소위 아관파천에 의해 조선의 굴욕적인 사태가 벌어진다. 을미사변은 조선왕조의 굴욕적인 사건인 동시에 일본의 역량을 이용한 혁명가들의 투쟁이기도 했다.
민비살해사건의 실행범으로 토카츠아키와 츠키나리 히카루가 있었다. 츠키나리는 조선개화당 김옥균을 지원한 사람이기도 했다. 김옥균이 청국에서 민비일족이 파견한 자객 홍종우에 의해 암살당한다. 그러므로 토카츠아키와 츠키나리가 민비살해에 가담한 이유는 김옥균의 꿈이었던 조선의 개혁을 성취하기 위함에서였다.

토카츠아키는 자신들이 살해한 민비에 대한 참회와 자비심으로부터 민비의 관음보살을 만들어 기리기로 했던 것이다.
한국인에게는 그러한 일본인의 행동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여기엔 한국인이 잘 모르는 일본인의 '적아쌍방영혼평등'이란 사고방식이 있다. 전쟁터에서 아무리 격렬하게 대립하여 싸운 적이라도 적이 전사했다면 이미 적이 아니라 동일한 영혼을 공유한 인간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사실 중일전쟁 중 일본군과 싸우던 중국군이 희생되면 중국군에게 위령제를 지냈다는 신문기사가 16건이나 있다(1937-1945년 아사히신문).

이는 유교문화에 젖은 한국인의 '적아불구대천'이란 사고방식과는 대조적이다. 원한이 깊은 적과는 한 하늘 아래서 살수 없다는 한국·중국식의 원한사고는 상대에 대한 증오의 수위를 높일 뿐이다.
필자는 일본인의 '적아쌍방영혼평등'에 기반을 둔 행동양식에는 어디까지나 상대를 적개심으로 증오하기보다는 넓은 인간애로 포용해주는 화해의 지름길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일의 역사문제를 원만이 해결하는 방책이 바로 이같은 '적아쌍방영혼평등'사상에 기초를 둔 원한을 넘어선 평등박애의 인간애가 아닐까.

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현 일본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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