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렘린궁 "흑해 곡물 협정 종료" 선언
기아·식량불안 수억명 영향" 전망
러시아와 흑해곡물협정 맺은 후 
흑해서 1년간 수출된 우크라 곡물 3300만t
세계 식량난에 '단비'
러 "서방이 러 수출 제재 풀면 연장"
전쟁 중 근본 해결은 난망
美 백악관 "즉각 철회하라" 규탄

우크라이나의 밀밭. [AP연합]
지난 4월 우크라이나 오데사주(州) 이즈마일 항구에서 인부들이 곡물을 적재하고 있다. [AP연합]

급격한 기후 변화 여파 등으로 세계 농업 생산에 타격이 예상되는 가운데 러시아가 흑해곡물협정 종료를 선언하면서 세계적인 식량 위기 우려가 커지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전쟁 중에도 국제 곡물 가격을 안정시켜온 이 협정이 파기될 경우 기아·식량 불안 상태에 놓인 저개발국을 중심으로 수억명이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17일(현지시간) AP통신 등에 따르면 드미트리 페스코프 러시아 대통령실(크렘린궁) 대변인은 이날 "지난 5월 18일 60일간 연장된 협정이 오늘 만료되며 흑해 곡물 협정은 효력이 없어졌다"며 "러시아가 관련된 부분(러시아산 곡물과 비료 수출)이 실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흑해곡물협정에 따른 곡물 수출은 지난 16일 우크라이나 오데사 항구를 떠난 곡물선을 마지막으로 당분간 끊기게 됐다. 

우크라이나는 밀, 보리, 해바라기유, 옥수수 등의 주요 수출국으로 특히 전 세계 밀 수출량의 10%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농업 대국이다.  그래서 '세계의 빵바구니'로도 불린다. 

우크라는 전쟁 전 1년 동안 8400만t의 곡물을 생산해 5000만t 가량을 수출할 방안이었다. 전쟁 중인 지난해 수확량은 5300만t으로 줄었다. 인구 5200만 명의 한국 국민이 1년에 소비하는 총 곡물 량은 1900만t이다.

[연합뉴스 그래픽]

러시아가 작년 2월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의 주요 경로인 흑해를 봉쇄하자 국제 밀 가격이 폭등하고, 중동·아프리카 저개발국에선 식량난이 초래된 것도 그 때문이다. 

세계 식량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유엔식량농업기구(FAO) 식량가격지수는 지난해 3월 159.7포인트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여파에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위기 등이 겹치며 세계 각국의 물가가 급등하기 시작했고, 일부 개도국에서는 그같은 민생고가 정국 불안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당시 유엔의 안토니우 구테흐스 사무총장 등은 동 아프리카 등지에서 4000만 명이 추가로 굶주림의 위기에 빠졌다며 러시아에 흑해 봉쇄 해제를 호소했다.

지난해 7월 유엔과 튀르키예의 중재 아래 맺어진 흑해곡물협정은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 선박이 흑해를 안전하게 다닐 수 있도록 하고, 러시아의 농작물과 비료 수출을 보장해주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이 협정으로 농업대국인 우크라이나는 전쟁 중에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농산물을 수출할 수 있었고, 이후 우크라이나는 농산물 3290만t을 수출했다.  

유엔은 흑해곡물협정으로 공급이 안정화하면서 국제 곡물 가격이 20% 이상 하락했으며 이는 이집트, 레바논 등 수입 식량에 의존하는 개발도상국들에 큰 도움이 됐다고 보고 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 등 5개 유엔 산하 기구들이 이달 12일 발간한 식량 안보·영양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굶주림에 직면한 세계인구는 평균 7억3500만명, 식량을 제때 공급받지 못하는 인구는 24억명에 달한다.

흑해곡물협정이 이대로 파기될 경우 이러한 취약층이 가장 큰 위협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는 흑해곡물협정 이후에 협정의 합의한 만료 기간을 몇차례 연장하면서도 러시아의 곡물과 비료가 서방의 제재로 제대로 수출되지 못하고 있어 이에 대한 획기적인 개선이 없으면 우크라 곡물의 흑해 수출 합의를 종료할 것이라고 위협해 왔다.  

그러나 러시아산 농산물과 비료 자체는 제재 대상이 아니며 수출도 원활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런 요구는 '생트집'일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 농무부에 따르면 러시아의 밀 수출량은 2022∼2023 무역연도에 4550만t에 달했으며 2023∼2024년에는 사상 최대치인 4750만t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러시아가 노리는 것은 미국 등 서방의 대러 제재로 막힌 러시아 은행의 국제 자금 거래를 풀려는 의도로 분석되고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 후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에서 퇴출당하면서 국제 결제 업무에 지장을 받고 있다.

미국과 유럽연합(EU) 등은 현재 러시아 농업 은행 자회사를 통해 곡물·비료 수출 대금 결제를 허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같은 위협에 대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세계 식량사정을 볼모로 흑해 곡물협정과 같은 기존 합의들을 파기하겠다고 위협하는 '전투외교' 행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러시아는 자국 관련 협정 사항이 이행된다면 협정에 복귀할 것이라고 했으나, 이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둘러싼 서방의 제재와 직결된 문제인 만큼 근본적 해결은 쉽지 않은 상황이다.  

러시아의 흑해곡물협정 종료 선언 이후 美 백악관은 즉시 이를 규탄하고 나섰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은 이날 브리핑에서 "러시아의 곡물협정 중단 결정은 위험하고 무책임한 일"이라며 "이는 식량 부족을 악화하고 전세계 수백만 명의 취약계층을 한층 위험에 빠트린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미 국제적인 밀과 옥수수, 콩 가격 폭등을 목도하고 있다"며 "러시아 정부는 즉각 이 같은 결정을 철회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커비 조정관은 "미국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곡물이 세계 다른 나라에 도달할 수 있도록 국제적 노력을 이어갈 것"이라며 "러시아의 흑색 선전과 달리 우리의 제재는 러시아의 식량이나 비료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김경동 기자 weloveyou@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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