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선우 작가(전국청년연합 바로서다 대변인)
황선우 작가(전국청년연합 바로서다 대변인)

이 말은 1953년 7월 27일 6·25 휴전협정 직후 이승만 대통령이 북한 주민들에게 전한 메시지다. ‘북한 동포 희망 챌린지’에 참여하며 이 말을 되새겨본다. 공산주의의 실체를 진작 알고 있었던 이승만은 북한 동포들의 참담한 미래를 예측할 수 있었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는 것과 함께, 우리가 누리는 자유를 북한 주민들에게도 꼭 전하리라 약속했다. 그 약속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당분간 공산 압제하에서 계속 고생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우리들의 동포들에게 우리는 다음과 같이 외친다.

동포여, 희망을 버리지 마시오. 우리는 여러분을 잊지 않을 것이며 모른 체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한국 민족의 기본 목표, 즉 북쪽에 있는 우리의 강토와 동포를 다시 찾고 구해내자는 목표는 계속 남아있으며 결국 성수되고야 말 것입니다.”

노예의 삶을 사는 북한 주민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 그것이 이승만 대통령의 비전이었다. 북한 주민들만을 위한 비전은 아니었다. 죽기 전에도 성경의 갈라디아서 5장 1절을 되새기며 “우리 민족이 다시는 종의 멍에를 지지 않게 하소서”라 기도했던 그였고, 그 시작은 조선 천민(노비, 백정)들에게 선물한 자유였다.

조선 천민들의 절규, “자유를 달라”

한반도 내 최초의 서양의학 학교, 제중원 의학교의 1회 졸업생 박서양은 이렇게 절규했다.

“누가 좀 말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만큼만 맞고, 꼭 언제까지만 당하고 나면 그 어떤 괴롭힘이나 방해도 더 이상은 없을 거라고 그렇게 약속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무얼 어떻게 하면 이 모든 것을 끝내고 자유로워질 수 있을 거라고 누군가 말해준다면 얼마나, 정말 얼마나 좋을까.”

박서양은 백정의 아들이었다. 그는 세브란스 간호원 양성소의 교수가 되었음에도,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학생들에게 무시당했다. 사실 박서양이 의사로 활동하던 때는 이미 갑오개혁(1894)으로 신분제가 폐지된 이후였다. 그러나 정책만 바뀐, 즉 형식적인 변화만 있었을 뿐이었다. 일할 땅과 교육권을 양반 출신들이 대부분 변함없이 착취하고 있었기에 천민 출신들은 여전히 양반의 노예일 수밖에 없었다. 박서양은 교육도 받고 일자리를 얻었음에도 천민 출신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괴로움에 시달려야 했을 정도였다.

불평등 제도 무너뜨리는 ‘자유’

조선이 무너지고 일제시대와 미 군정기가 지난 후 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의 최초 헌법이 제정된다. 이승만 정부는 이 헌법의 제86조에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며 그 분배의 방법, 소유의 한도, 소유권의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써 정한다’라는 농지개혁 조항을 명시한다. 이로써 이제 ‘땅’이라는 것이 양반 출신들만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법치주의의 시작이요, 백성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주는 발판이 되었다. 이는 현행 헌법 제121조에 남아있다.

또한, 대한민국이 건국된 후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들의 교육권 보장에도 열을 올린다. 이로써 문맹률을 80%에서 20%로, 그리고 중학생·고등학생·대학생 수를 각각 10배·3.1배·12배로 변화시킨다. 이제 ‘교육’도 양반 출신들만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이러한 농지개혁과 교육권 보장은 천민 출신들에게 결과적으로 ‘신분제 폐지’라는 평등을 가져다줬다. 하지만 그 시작은 노예 상태에 있는 천민 출신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었다. 천민 출신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평등이 아닌 자유였다. 이 자유가 조선을 대한민국으로 거듭나게 했다.

조선의 신분제보다 더한 불평등을 자아내는 제도 ‘성분제’ 속에서 살아가는 북한 주민들은 어떠한가. 그들을 구하기 위해 필요한 것 역시 자유다. 북한에 돈이나 쌀을 줘서 그 주민들을 구하겠다는 취지의 ‘햇볕정책’은, 평등을 자유보다 우선시한 나머지 북한에 돈이나 쌀을 줘서 평등을 먼저 이룬 후 개혁을 이루겠다는 발상에서 나온 정책이다. 하지만 조선에서도 그랬듯, 북한에 자유를 줘야 그 주민들이 돈과 쌀을 가질 수 있다.

농지개혁과 교육권 보장으로 조선 천민들이 메던 종의 멍에를 풀어준 이 대통령, 그러나 여전히 종의 멍에를 메고 있는 북한 주민들의 해방을 지켜보지 못한 그였다. 이에 필자는 이승만 대통령이 지켜본 비전 그리고 지켜보지 못한 비전까지도 기억한다. 조선이 어떻게 대한민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는지를 기억하면서, 이승만이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에서 선포했듯 대한민국 건국은 결코 사람의 힘만으로 된 것이 아님을 고백한다. 또 1953년 7월 27일 6·25 정전협정 직후 이승만이 북한 주민들에게 약속했듯, 노예 상태에 있는 북한 주민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해방하는 것을 필자와 대한민국의 목표이자 사명이라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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