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북한 주석과 만났다.
1972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북한 주석과 만났다.

통일부가 6일 공개한 1941년 11월~1979년 2월까지의 남북회담문서에 따르면 북한은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 간의 남북정상회담의 대가로 주한미군 철수를 집요하게 요구했다.

1971년 10월과 이듬해 2월 닉슨 대통령이 직접 중국을 방문하는 등 미중 간 데탕트 분위기가 전개됐다. 당시는 베트남 전쟁(1960~1975년)의 장기화로 인해 미국에 불리한 전황이 전개되던 시기였다. 1972년 5월 2~3일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대북 밀사’로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의 동생이자 당시 북한의 2인자였던 김영주 북한 노동당 조직지도부장과 회담했다. 김일성과도 두 차례 만났다. 그달 29일에는 박성철 북한 제2부수상이 서울에서 이 부장과 면담하고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했다.

그 결과 남북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에 전격 합의했다.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통일원칙을 담은 7.4 남북공동성명은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간섭받지 않고 자주적으로 해결하며,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고, 사상과 이념·제도의 차이를 초월해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해야 한다’는 원칙을 내세웠다. 7.4 남북공동성명에는 남쪽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북쪽의 김영주 로동당 조직지도부장 명의로 “서로 상부의 뜻을 받들어” 합의문을 발표한다고 명시됐다. 통일문제 해결을 위해 ‘남북조절위원회’를 발족시켜 협의에 들어갔으나 분과위원회 설치를 둘러싼 남북 간 의견 차이로 회담은 결국 결렬됐다.

통일부가 이날 공개한 남북회담문서에 따르면 김영주는 회담에서 “통일 문제는 우리 급에서 되지 않는다”며 “총비동지(김일성)와 박 대통령 간 정치협상을 한다면 긴장 완화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남북정상회담을 요구한 것이다. 또한 김영주는 닉슨 대통령이 3개월 전 중국을 방문해 마오쩌둥 중국 주선과 회담한 사실을 언급하며 “닉슨이 중공(중국)을 방문해 많은 문제를 해결했다고 한다”며 “(우리도) 수뇌자 회담을 해야 한다”고 거듭 남북정상회담을 요구했다.

1972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청와대를 예방한 박성철 북한 제2부수상과 악수하고 있다.
1972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청와대를 예방한 박성철 북한 제2부수상과 악수하고 있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북한의 남북정상회담 제안에 응하지 않았다. 이후락은 “처음부터 김 수상(김일성)과 박 대통령이 회담을 하면 잘못될 경우 실망이 크게 된다”며 “단계적인 방법을 착안했다”고 했다.

박정희 정부가 남북정상회담 제안을 거부한 이유는 북한이 회담의 대가로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이날 공개된 사료에서 김영주는 “이남에서는 제국주의(미국) 군대가 철수하겠다는데 대해 남쪽이 반대하고 있지 않느냐”며 주한미군 철수를 직접 요구했다. 이후에도 북한은 줄곧 “외세를 배제해야 한다”며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해 회담을 교착상태에 빠졌다.

베트남전 장기화로 불리한 상황에 빠진 미국이 아시아에서 단계적으로 철군하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고 미 7사단을 철수시키자, 북한이 주한미군 철수를 통해 한반도를 적화할 야욕을 품었다는 해석이 나온다.

박정희 정부는 이후락 방북 후 1972년 5월 29일 박성철 북한 제2부수상의 답방 때도 남북 정상회담 요구를 거절했다. 7.4 남북공동성명은 남북정상회담을 피하기 위한 일종의 우회로였다는 분석이다.

통일부는 이날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 당국 간 합의인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위한 남북 간 비밀 접촉 과정을 보여주는 남북회담 사료를 공개했다. 1971년 11월부터 1979년 2월까지 정치 분야 남북회담문서는 총 2권(총 1,678쪽)이다.

이번에 공개된 사료에는 ▲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전 비밀접촉(11회, 1971년 11월∼1972년 6월) ▲ 7·4 남북공동성명(1972년 7월) ▲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회의(3회, 1972년 10∼11월) ▲ 남북조절위원회 회의(3회, 1972년 11월∼1973년 6월) ▲ 남북조절위원회 부위원장 회의(10회, 1973년 12월∼1975년 3월) 진행과정과 회의록 등이 포함됐다.

그러나 이후락과 김일성 면담, 박정희와 박성철 면담 기록은 공개심의 결과 공개 대상에서 제외됐다. 공개된 남북회담문서 원문은 남북회담본부, 국립통일교육원, 북한자료센터에 마련된 남북회담문서 열람실에서 열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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