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6월 28일 – 자유시 참변

 ‘스보보드니(Свобо́дный)’는 러시아어로 ‘자유롭다’라는 형용사이다. 1921년 6월 28일 스보보드니에서는 ‘대학살’이 있었다. 교과서에는 그 사건이 ‘자유시 참변’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하지만 그뿐, 우리 역사인데도 그 내용을 자세히 아는 사람은 흔치 않다. 
 참변이 일어나기 바로 전 해인 1920년, 우리 독립군은 봉오동에서 일본군을 크게 물리쳤다. 일본군은 봉오동 전투에서의 패배에 보복하기 위해 간도를 침략했는데 이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마적단을 매수하여 훈춘사건을 조작하고, 그 수습을 빌미로 간도에 군대를 투입한 것이다. 하지만 일본군은 청산리에서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 독립군에 다시 크게 패했고, 이후 그들은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대대적인 보복 학살과 독립군 토벌 작전을 펼쳤다.

하바롭스크에서 기차로 열세 시간 걸리는 곳에 위치한 스보보드니 기차역

 

 당시 러시아는 공산주의자의 적군(赤軍)과 혁명을 반대하는 백군(白軍)과의 치열한 전쟁인 적백내전을 치르고 있었다. 처음 일본은 백군 편을 들었다. 백군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시베리아에 군대를 보낼 수 있었고 그 병력으로 러시아 내 한인 거주 지역을 습격했다. 
 일본의 대대적인 토벌 작전으로 잠시 몸을 사려야 했던 우리 독립군은, 분산되어 있던 여러 조직을 모아 전열을 정비하였다. 김좌진과 서일의 북로군정서, 이청천의 대한독립단,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 열 개 부대를 모아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했다. 3천5백 명 정도의 병력이 중국 헤이룽장성 미산[密山]에 집결했다. 무기를 포함한 군수 물자가 변변찮았던 독립군은 다른 나라의 군사 지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우리 독립군은 러시아의 적군(공산군) 편이 되었고, 대한독립군단은 러시아 적군 정부의 도움으로 무기를 공급받을 수 있었다. 적(敵)의 적(敵)은 우리 편이었고 당시 적군은 약소 민족의 독립을 돕겠다는 입장을 분명하게 내세웠기 때문이다. 러시아 적군을 아군으로 믿고 있던 대한독립군단에게 자유시로 집결하라는 명령이 내려왔고 대한독립군단은 우수리강을 건너 러시아 연해주의 이만(현재 달네레첸스크)에 이르렀다. 
 그런데 청산리대첩의 주역인 김좌진 장군은 당초부터 독립군이 러시아로 가는 것을 반대했다. 공산주의자를 믿을 수 없었고 한반도와 너무 멀어지면 독립군으로서 활동하기 어려워질 것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만에서 군사를 돌려 중국 미산으로 돌아왔다. 

자유시 참변 사건 날 이곳 급수탑 근처에서 최초로 총격이 시작되었다.

 

 김좌진 부대를 제외한 나머지 독립군은 1921년 6월 자유시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 사이 일본은 적군과 손을 잡고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적군은 일본으로부터 오오츠크해 어업권을 받고 독립군을 배신했다고도 한다. 1921년 6월 28일 자유시수비대 제29연대에서 파견된 소비에트 군대는 자유시에 집결한 우리 독립군을 포위하고 무장 해제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에 응하지 않자 집중 총격을 가해 우리 독립군을 학살하였다. 
 학살이 시작된 자유시의 수라세프카라는 작은 역에 가면 그날의 참상을 지켜본 급수탑이 아직도 덩그러니 남아 있다. 바로 그 급수탑 근처에 집결해 있던 우리 독립군에게 총격이 시작되었다. 아비규환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일부는 현장에서 사망하고 일부는 총격을 피해 무작정 달렸다. 이제 막 도착한 독립군에게 스보보드니는 어디가 어딘지 분간할 수 없는 낯선 마을이었다.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필사적으로 달렸지만 그들이 다다른 곳에는 제야강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고 총탄을 피하려면 강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날 그렇게 총에 맞아서 혹은 강물에 빠져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사람이 5백여 명에 이르렀다. 당시 자유시에 집결한 병력이 1천여 명, 살아남은 사람들은 포로가 되어 이르쿠츠크 등으로 끌려가 공산 치하 소련 사람으로 살아야 했다. 그중 극장 경비원으로 살다가 카자흐스탄 크슬오르다에서 숨진 봉오동 전투의 주역 홍범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 독립군은 그렇게 궤멸되고 말았다.  

스보보드니에 세워진 ‘자유시 사건 독립군 순절지’ 비석  

 

 물론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기까지는 여러 가지 배경과 알려지지 않은 속사정이 있었다. 일본과 소비에트 공산당과의 결탁뿐만 아니라, 고려공산당의 이르쿠츠크 파와 상하이 파 사이의 정치적 투쟁 등, 그 복잡한 배경들 자체가 이 사건의 심각성을 희석해버릴 정도이다. 배경이 복잡하니 그 복잡함을 따라가다가 우리 독립군이 학살당하고, 기개가 꺾이고 말게 된 그 사건의 전모 자체가 뒷자리로 밀리다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심지어 현재 스보보드니에 서 있는 ‘자유시 사건 독립군 순절지’ 비석에는 “다시는 우리끼리 싸우는 일이 없도록”이라는 글귀가 한글로 새겨져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명하다. 독립군을 궤멸시킨 이 사건을 정리하면 정말 한 마디로 단순해진다. 
 ‘우리 독립군이 공산주의자들에게 배신당하고 학살당한 사건’
 그 공산주의자가 상하이파든 이르쿠츠크파든 중요하지 않다. ‘우리끼리’에서 싸웠던 ‘우리’는 고려공산당의 두 파였을 뿐, 독립군은 그 사이에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학살을 당한 것이다. 분명 ‘우리끼리’ 싸워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당한, 말 그대로 ‘참변’이다. 

 이렇게 러시아의 자유시, 스보보드니는 우리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아픈 흔적을 아직도 품고 있다.

황인희 작가(다상량인문학당 대표·역사칼럼니스트)/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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