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

 

한국인들이 더없는 자호감과 긍지감으로 느끼는 '한국의 전통문화'가 있다. 이른바 '한국 전통문화'에 대하여 현대 한국인들은 일점의 회의도 없이 한국인 선대들이 스스로 만들어왔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른바 '한국적인 한국전통문화'라는 것은 사실 근대 일본의 본을 따서 만들어진 것이 철두철미한 사실이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필자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이 떠오른다. "사실을 말하면 일본 전체가 전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 나라는 없다. 물론 그 국민도 있지 아니하다."

1889년 예술론저 『거짓말의 쇠퇴』에서 한 말이다. 서양인의 자발적으로 그리고 인위적으로 만든 '자포니즘'에 대해 오리엔탈리즘이라 비판을 가했다. 

필자는 와일드의 표현을 빌어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실은 한국인이 믿고 있는 한국전통문화라는 것은 일본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 일본의 전통문화를 본 따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기실 '전통'이란 단어 역시 '유구한 전통' 운운하는 것 만큼 긴 역사가 아닌 근대에 만들어진 신조어였다. 100여년 전 서구 근대어의 '문화의 계승성'이란 의미의 단어 'tradition'을 일본에서 전통이란 일본제 한어로 창작하였는데, 이것이 한국과 중국에 전파된 것이다.

이렇게 근대 국민국가로 거듭나기 위해 조선은 일본에서 수입한 '전통'을 만들게 된다. 거기에는 당연히 일본이 모델로 되어 본을 뜨는 것이다. 그럼 아래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석굴암은 한국의 국보이며 역사교과서의 권두화로 실린 한국의 전통 문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신라시대 호국사상을 나타내는 석굴암의 불상은 1909년 일본인 우편배달원이 비를 피해 동굴에 들어갔을 때 무너진 천정 탓에 비에 젖은 불상을 발견할 것이다.

조선총독부에서는 대규모의 보호, 수복공사를 벌여 석굴암을 보호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조선에서는 많은 불상들이 파괴되고 또 쓰레기처럼 버림받는 신세였다. 일본인이 아니었으면 석굴암은 훼손되어 오늘의 '국보 석굴암'은 없었을 것이다.

한국의 민족시조로 칭송되는 단군 역시 일본의 국조 신앙에 본을 따서 탄생된 것이다. 일본 근대의 조선사학대가이며 교토대학 교수였던 아마니시 류가 『현대의 단군』(1934)이란 논고에서 단군이 등장한 상황을 밝히고 있다. 당시 선진국 일본에는 민족의 신이 있었으니 1987년 대한제국을 출범시킨 한국에서는 방치해둔 단군을 모셔다 일본의 개국시조처럼 조선의 개국시조로 앉히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유명한 조선학연구자이자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지낸 타카하시 도모루도 이렇게 지적한다 "천조황대신(天照皇大神)에 본따서 조선민족의 시조로 칭하는 단군을 세워 신으로 섬겼다."

그런데 단군이 시조라는 근거로 사실 문헌자료는 없었다. 그냥 조선시조 만들기에 급급해 조선인들은 "우리나라는 옛부터 단군을 믿어왔다"고 언급할 뿐이다.

'대한제국' 국명 역시 '대일본제국' 국명을 본딴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듯 개천절 역시 일본의 기원절을 본따서 만든 것이다.

향가 역시 일본의 『만요슈』(萬葉集)를 본딴 것이다. 국문학자 김동욱은 『국문학사』(1976)에서 향가를 조선 고대 문학의 정화라고 언급한 것은 사실 그가 향가에 만요슈의 이미지를 투사했기 때문이다.

화랑도도 일본의 무사도에서 본딴 것이다. 일본의 근대 발전의 에너지는 상무 정신에 있었다고 신채호도 「20세기 신국민」에서 지적하면서 한국은 무(武)를 억누르고 민기(民氣)를 좌절시켰다고 역설했다. 한국에도 무사도와 같은 존재가 필요하다고 여겼던 지식인들은 고문헌에서 화랑을 찾아 전혀 무사와 관계없는 미소년 화랑을 무사로 억지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검도도 19세기 말 일본에서 전수됐다. 니시오 다츠오의 『일본식민지하 조선의 학교체육정책』에 의하면 대일본무덕회의 조선지부가 1928년 설립되면서 학교교육에 검도가 도입됐다. 그무렵 일본 검도를 배운 검도가들이 해방 후 한국검도계의 지도적 역할을 했다.

유도 역시 그렇다. 1910년 한일병합이 되면서 유도장은 경성에 12개 생겨났고, 1917년엔 고도관(講道館)의 조선지부가 설립, 그후 학교의 교육프로그램에 투입되면서 검도가 조선 땅에 보급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다도교육은 1930년대부터 이화여대전문학교 등에서 실시되었다. 당연히 다도는 일본에만 있던 전통문화였기에 한국이 다도는 일본 다도다. 그런데 1970년대 유도처럼 다도 역시 한국이 시조라고 역설하는 한국안이 있었지만, 그것을 입증하는 자료도 전승도 전무하다.

재대한민국대사관 참사관과 사이타마대학 교수를 역임했던 한국연구자 마츠모토 코지 씨는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직언한다. 

"고대 벽화에 있는 격투기 비슷한 것이 발전하여 태권도로 된 것도 아니며, 옛날 오차를 마시는 곳에서 다도가 생긴 것도 아니다. 단군신앙, 향가, 화랑도가 기나긴 역사 속에서 발전되고 지금의 국격을 형성한 것도 아니다. 인과는 거꾸로인데, 일본에 의거하여 그렇다 할 나라의 형태를 만들고, 그것에 안성맞춤인 것들을 모아왔다 흔적같은 것, 그림자가 희미한 것, 있었다 하면 그럴거라고 믿을 만한 것들이지만, 그것들은 일본 문명의 위치매김에 따라서 배열하고 전체를 자국의 전통으로 관념한다. 나라 전체가 일본과 똑같게 되었고 일본문화에 대응하는 것들이 거의 갖춰진 것은 바로 그렇게 하여 나라를 조형했기 때문이다.(『한국「반일주의」의 기원』)

근대 조선은 일본인에 의해 만들어졌고 그 아이덴티티 역시 '일본인'에서 자기를 찾았듯 소위 '한국적 전통문화' 역시 일본을 떠날 수 없었던 게 엄연한 사실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史実)을 정확히 알고 섣불리 반일감정으로 편향되기보다는 우리의 '아이덴티티'에 얼마나 많은 일본문화의 기여가 있었는가를 진지하게 연구하고 인식할 때에 이르렀다.

증오의 수위를 낮추고 이성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 전 한국민의 자발적 과제가 되었으면 하고 필자난 바랄 뿐이다.

(본 칼럼은 마츠모토 코지 씨의 『한국「반일주의」의 기원』 등 연구성과에 힘입었음을 밝히며 아울러 감사의 뜻을 전하는 바이다.)

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현 일본 거주)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작권자 © 펜앤드마이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