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하순으로 예정된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에 경제사절단으로 참여하는 4대 그룹 총수들은 저마다 과제를 안고 있다.

특히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나 구광모 LG그룹회장보다 생각이 많을 수밖에 없다. 조 바이든 미 행정부의 정치경제적 압박을 받으면서 미국 내에 천문학적인 규모의 반도체 설비를 투자하기로 약속했지만 ‘반도체법(Chips Act)’에 의한 보조금을 받는 데 어려움이 많기 때문이다.

지난 3월 한일 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 참석한 주요 그룹 총수들. [연합뉴스 자료사진]
지난 3월 한일 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 참석한 주요 그룹 총수들. [연합뉴스 자료사진]

윤 대통령 국빈 방미에 경제사절단으로 4대그룹 총수 참여...이재용과 최태원 고민 깊을 듯

경제논리와 상충되는 ‘정치적 독소 조항’을 돌파하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경제적 이익을 지켜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들 조항은 시장경제 논리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중국을 고립시킨 채 미국 중심으로 반도체 공급망을 재구축하겠다는 정치논리일 뿐이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하는 이재용 회장과 최태원 회장으로 하여금 고민에 빠져들게 만드는 독소조항은 크게 두 가지이다.

오는 10월부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중국 공장에 첨단 장비 도입 규제 받아

첫째, 지난해 10월 발효된 ‘반도체법(Chips Act)’이 중국내에서의 반도체 생산을 규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중국내에서 D램과 낸드플래시를 생산하고 있다. 중국 생산 비중이 막대하다. 그런데 반도체 법에 따르면 중국내 반도체 생산시설로의 첨단장비 반입이 철저하게 제한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오는 10월까지 1년간 유예기간을 뒀다. 수개월 이내에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의 중국 공장들은 첨단장비를 반입하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에 봉착하게 될 예정이다.

더욱이 지난 3월 미 상무부는 ‘반도체법 가드레일(투자제한 장치)’ 세부 규정을 발표했는데 여기에도 한국 반도체기업의 발목을 잡는 독소조항을 심어놓았다. 미국 정부에게 반도체 보조금을 받은 기업은 중국내 생산시설에서 향후 10년간 5% 이내 범위에서만 첨단 반도체 공정 생산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족쇄를 채우고 있다. 끊임없는 설비투자와 첨단 장비도입을 통해 집적도와 수율 등을 높여야 하는 반도체 기업의 특성상 미측의 가드레일은 “앞으로 중국에서 첨단 반도체를 만들지 말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네덜란드 ASML 그리고 미국의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 KLA, 램리서치, 또 일본의 도쿄 일렉트론 등과 같은 반도체 장비 생산기업들의 수출통제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 기업들로부터 첨단 장비를 도입하지 못한다면 중국내 첨단 반도체 공장들은 제대로 작동할 수 없게 된다.

미 국무부, 한미정상회담 앞두고 대중국 반도체 수출 통제의 당위성과 한국의 협력을 강조

미국 국무부는 12일(현지시간) 반도체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해야 한다는 점을 다시 압박했다. 한미정상회담을 앞둔 민감한 시점에 보니 젠킨스 국무부 군비통제·국제안보 담당 차관은 한국국제교류재단(KF)과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벨퍼센터가 공동 개최한 '한반도 안보 서밋' 기조연설에서 “미국이 중국의 안보 우려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수출통제가 외교 정책의 전면에 자리잡게 됐다”면서 “중국이 군사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첨단 반도체 등 핵심 기술을 확보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한국 등 동맹과 협력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젠킨스 차관은 “중국이 첨단 반도체를 자율무기체계 개발, 핵폭발 모델링과 미사일 모의실험 등 대량살상무기(WMD) 개발에 필요한 프로그램, 그리고 주민 감시장비 등에 사용할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미국이 작년 10월에 발표한 반도체 수출통제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우리는 미국, 미국의 동맹과 파트너의 기술 우위를 유지하면서 중국이 기술, 특히 첨단 반도체를 군사력 강화와 인권 침해에 활용하는 것을 막는 데 전념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보니 젠킨스 미국 국무부 군비통제·국제안보 담당 차관이 12일(현지시간) 한국국제교류재단(KF)과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벨퍼센터가 공동 개최한 '한반도 안보 서밋'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줌 화면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보니 젠킨스 미국 국무부 군비통제·국제안보 담당 차관이 12일(현지시간) 한국국제교류재단(KF)과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벨퍼센터가 공동 개최한 '한반도 안보 서밋'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줌 화면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국 생산량은 전체의 40% 육박...첨단 반도체 국내 비중 확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전체 반도체 매출의 40% 정도를 중국에서 생산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에 낸드플래시 공장을 가동 중이다. 낸드플래시의 37%를 시안공장에서 생산한다. SK하이닉스는 우시에 D램 생산공장과 다롄에 낸드플래시 생산공장(솔리다임)을 각각 가동하고 있다. D램의 40%를 우시 공장에서, 낸드플래시의 20%를 다롄에서 각각 제조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 기업들을 대상으로 오는 10월부터 반도체법의 규제가 적용되면, 첨단 생산장비의 중국 반입이 불가능해질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국공장의 구형화가 불가피한 것으로 분석된다. 대신 첨단 반도체 공정의 국내 비중을 확대해간다는 시나리오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안은 중국이 원치 않는 상황이라는 점도 부담이다.

둘째, 미 행정부가 사실상 보안해제를 강요하고 있는 것도 독소조항이다. 미 상무부가 지난달 발표한 가드레일 세부지침에 따르면 보조금을 받으려는 반도체 기업들은 영업기밀에 해당되는 사항들을 낱낱이 보고해야 한다. 웨이퍼 종류별 생산능력, 가동률, 예상 웨이퍼 수율(결함이 없는 합격품 비율), 생산 첫 해 판매 가격, 이후 연도별 생산량과 판매 가격 증감 등을 엑셀 파일에 입력해서 미 상무부에 제출해야 한다.

가드레일 세부지침은 미측과의 협상에 의해 조율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문제이다. 대중국 수출통제는 미국의 안보와 직결된 사안이라는 입장이지만 동맹국 기업들로부터 영업기밀을 받아내는 작업은 약간 느슨하게 봐줄 수도 있다는 분위기이다.

10일(현지시간) 폭스뉴스 보도에 따르면, 세계 최대의 파운드리 반도체 기업인 대만 TSMC가 미국 정부와 보조금 지급 조건을 놓고 협의를 벌이고 있다. TSMC는 약 53조원을 투자해 애리조나에 반도체 공장을 건립중이다.

이재용 회장이나 최태원 회장도 민감한 영업기밀을 최대한 제출하지 않으면서 미국의 보조금을 받기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일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장과 최 회장은 방미 기간 중 미 정부 고위 관계자와 연방의회 핵심 의원들과 잇달아 만남을 갖고 협력을 이끌어낼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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