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통제에 맞서는 ‘권력의 파수꾼’ 본분 버리고
오히려 정부와 한통속 되어 높은 자리 무더기 진출
사양은커녕 낙마 아쉬워하는 추한 모습
금도와 염치 던져버리고 ‘시민운동의 죽음’ 자초하는 꼴

홍찬식 객원칼럼니스트(언론인, 전 동아일보 수석논설위원)
홍찬식 객원칼럼니스트
(언론인, 전 동아일보 수석논설위원)

좌파 시민단체인 참여연대의 전성시대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지 1년, 청와대와 정부 요직에 참여연대 출신들이 즐비하다.

시민들이 시민단체를 신뢰하고 지지하는 것은 시민운동가들이 정치적 욕심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시민의 편에서 일할 때다. 문재인 정부로부터 높은 자리를 제의받은 참여연대 관계자 중 몇 명이라도 “시민단체와 정부는 서로 긴장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며 정중하게 거절하는 사람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정반대로 몇몇 참여연대 출신들은 사퇴 여론에 직면한 뒤에도 “인사청문회에서 평가해 달라”(안경환 전 법무부장관 후보자)거나 “비판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김기식 전 금융감독원장)는 말을 남기고 낙마하는 추한 모습을 보였다.

이들을 과연 시민단체로 불러도 되는지가 의문이다.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시민단체가 등장한 것은 민주화 이후인 1989년의 일이다. 당시 시민단체를 조직한 사람들은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신(新)사회운동’에 착안했다. 이전까지의 사회운동이 노동자들에 의한 마르크스 식 계급투쟁이었다면, 신사회운동은 노동자와 구분되는 시민을 주체로 하는 ‘새로운 사회운동’이라는 의미였다. 예컨대 여성운동, 환경운동, 소수자 인권운동 같은 것이었다.

이 신사회운동의 기본 개념은 시민들의 자율 영역을 최대한 확보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무릇 국가권력이란 통치를 위해 과도한 행정력을 행사하려는 속성이 있고, 이로 인해 시민들의 자치 영역이 중대한 침해를 받기 때문에 시민사회 스스로 방어에 나서야 한다는 발상이다. ‘권력의 파수꾼’이라는 시민단체의 역할이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사회운동은 그 나라 실정에 맞춰 변형되기 마련이지만 참여연대처럼 감시 대상인 정부와 한통속처럼 움직이면 더 이상 시민단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다.

참여연대의 정권 유착은 이번 정권에서만이 아니다. 과거 김대중 노무현 좌파 정부 때도 마찬가지였다. 참여연대 임원들은 김대중 정부 때 113개 공직에, 노무현 정부 때는 158개 공직에 진출했다는 통계가 나와 있다. 문재인 정부에선 벌써 1년 만에 청와대 쪽에 장하성 정책실장부터 탁현민 선임행정관까지 9명, 정부 쪽에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등 4명이 자리 잡은 걸 보면 앞으로 얼마나 더 확대될지 궁금하기까지 하다.

한편에서는 시민단체 출신들도 공직에 진출할 자유가 있는 것 아니냐는 반론이 나온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정도의 문제다. 참여연대처럼 좌파 정부가 집권할 때마다 일개 단체가 전체 판을 점령하듯 무더기로 공직에 나선다면 그 단체는 시민단체를 가장한 정치적 이익공동체에 불과하다.

행정안전부 명단에 올라 있는 시민단체 숫자가 1만3800개에 이른다지만 시민단체는 언제든 한순간에 무너져 내릴 수 있는 모래성 같은 존재다. 1989년 출범해 한 때 국내 대표적인 시민단체로 각광 받았던 경실련의 영욕이 생생한 사례다.

경실련이 1993년 한 매체의 여론조사에서 44.6%의 지지율로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집단’에 선정됐던 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잘 나가던 이 단체의 몰락은 김영삼 정부 시절에 주요 간부들이 정계로 진출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1997년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 씨가 YTN 사장 인사에 개입했음을 보여주는 비디오테이프를 경실련 간부가 훔친 사실이 드러나 도덕성에 치명적 타격을 입었다.

경실련 측은 2014년 자체 보고서를 통해 지난 25년의 활동을 회고하며 이렇게 썼다. ‘정부나 정치권과의 관계에서는 엄격하게 중립적이고 비정치적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내부적 통제장치로서 정기적으로 임원들의 정치적 참여나 정부 위원회 참여에 대한 적절성 여부를 심사하고 제한해야 한다.’ 또한 박원순 서울시장은 시민운동가 시절인 2006년 한 강연에서 “시민운동을 하다가 정부조직에 들어간 사람이 은근히 많아 시민단체가 정부의 친위대라는 빌미를 제공한 측면이 있다”면서 “시민단체의 비정파적이라는 성격이 다수 시민을 끌어들이기 위해 중요한 가치”라며 자성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 벌어지는 일은 그 시절이 그나마 양식과 자정기능이 살아 있던 ‘순수의 시대’였다는 개탄이 나올 정도다.

좌파 단체장이 있는 지자체에선 시민단체 출신들이 공직 자리를 차지하기 바쁘고, 문재인 정부는 정부대로 시민단체 활동 경력을 공무원 호봉에 반영하겠다며 선심을 쓰려다 철회하기도 했다. 시민단체를 지지기반 확대 같은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할 속셈임이 뻔하다. 그럼에도 염치나 금도 같은 건 집어던지고 제각각 잇속 챙기기에 바쁘다. ‘시민운동의 죽음’을 스스로 재촉하고 있다.

다수 시민들이라도 이들에게 냉담한 눈길을 보내면 나으련만 정권 지지율이 80%에 육박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분위기다. 도대체 나라가 어디로 굴러가고 있는지 막막하기 짝이 없다.

홍찬식 객원 칼럼니스트(언론인.전 동아일보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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