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철 객원 칼럼니스트

2016년 영국 브렉시트, 같은 해 트럼프를 당선시킨 미국 대선, 2017년 한국 대통령 탄핵이라는 사건은 정파간의 치열한 대립으로 나타나는 국민국가의 정치적 분열 양상을 보여주었다. 다원주의를 추구하는 민주정은 다양성을 수용하고 평등을 보장하지만 다양한 정체성이 세분화되고 이것이 권리로써 주장될 때에 나타나는 대립과 분열은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흔든다.

국민국가는 국민 모두가 국가 사회에 참여하도록 다양성을 보장한다. 모든 시민을 차별없이 동등하게 대우함으로써 국가 통합을 지향한다. 문화다양성의 보호와 증진에 관한 법률은 국제연합 조약의 국내 이행을 위해서 만들어진 법으로서 다양성을 인권 차원에서 다룬다. 문화 다양성은 국가가 수행해야 할 의무이기도 하다. 다양성과 통합은 민주정의 본래적 과제다.

다양성이 정체성 혼란의 원인이 되고있다. 난민으로 인한 대규모 이주로 이질적인 문화가 유입되어 기존 문화와 충돌하는 서유럽 국가에서 다문화 사회로 인한 갈등이 크다. 페미니즘이라는 정체성정치는 성정체성에 대한 기존 인식에의 도전을 넘어서 남성성을 공격하고 불평등을 야기하는 주장으로 정치적 대립을 초래함으로써 불공정문제의 원인으로 지적된다. 인터넷기술과 네트워크 사회의 진전은 국경을 넘어서 개인을 연결함으로써 다양한 문화적 정체성을 더욱 세분화해서 구성하면서 연대를 가능하게 하여 정체성 기획에 힘을 실어준다. 마누엘 카스텔의 지적처럼 21세기는 정체성 권력 현상이 세계적으로 전개되는 정체성 정치의 시대다.

2016년 영국의 브렉시트와 같은해 미국 대선에서의 가짜뉴스 논란은 국민정체성 분열의 배경으로서 정체성 집단간의 대립이라는 상황이 있다. 국내에서는 2017년 탄핵 정국 이후의 양극화된 정치 상황에서 페미니즘과 관련된 차별금지법 반대 운동에서 다양성 논쟁이 전개되었다. 세계화가 저물어가는 시대는 정체성으로 구축된 정체성 진영간의 투쟁이 국민 국가를 혼돈으로 몰아가는 상황이다.

정체성정치(Identity Politics), 정치적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포퓰리즘(Populism)으로 규정되는 대립 양상에서 혐오와 배제의 문화전쟁이 전개되고 있다. 상대방을 악의 세력으로 규정하여 공격하는 명명법에 따른다면, 우리 사회에서 기성세대는 토착왜구와 죽창부대간에, 젊은세대는 메갈과 일베간의 전쟁이 진행 중이다.

사회적 갈등은 법원의 판결을 요청한다. 작년도 낙태 합법화 관련 판결을 폐기한 미국 연방대법원에는 소수인종 보호를 위한 잠정적우대조치(Affirmative Action)의 적법성 여부에 대한 사건이 다루어지는 중인데 이 사건에 대한 사회적 논쟁이 진행 중이다. 법원이 어떤 결론을 내려도 정체성 논쟁을 쉽게 잠재울 수 없을 것이다.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 아니라 정체성 정치와 포퓰리즘 논란을 앞세우고 있는 정체성 집단 간의 다양성을 이유로 한 대립 상황이 전 지구적으로 전개 중이다.

민주정의 진전에 따라 제기된 다양성 주장을 국민국가체제가 수용하지 못하고 혼란으로 이어지는 상황은 민주정의 위기라고 논해진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에서 다음과 같이 통합적인 국민정체성의 제시가 필요하다고 했다. “좌파와 우파 모두 점점 더 좁은 집단의 정체성을 보호하는 어젠다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은 결국 소통의 가능성과 필요한 집단 행동의 가능성을 위협한다. 이에 대한 해법은 정체성이란 개념 자체를 버리는 것이 아니다. 정체성은 현대인들이 자신과 사회를 바라보는 방식에 이미 너무 깊숙이 들어와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해법은 현재의 자유 민주 사회가 지닌 실질적인 다양성을 고려하는 보다 넓고 통합적인 국민 정체성을 정의하는 일이다.” 변화된 환경과 변화된 상황을 담을 새로운 그릇이 마련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정치의 과제다.

대한민국은 과제를 하나 더 가지고 있는데 한반도 북에 있는 전체주의 왕조국가 김씨조선이다. 민족이라는 관점에서 김씨조선까지 포함해서 한반도의 현재와 미래를 다루어야 한다는 기존의 태도를 유지하는 한 김씨조선은 대한민국의 정치는 물론 모든 영역에 개입될 수 밖에 없다. 김씨조선의 존재가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의 발목을 잡고 있다.

문화전쟁으로 이어진 국민정체성 분열의 양상은 통합의 과제를 제기하였다. 분열에 이른 다양성 논의는 중단되지 않으며 중단할 수도 없다. 변화된 상황에서의 문제라는 것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경우가 아니며 현재의 상황에서 현재의 문제로서의 해결을 모색해야 한다. 과거의 틀을 벗어버리는 구조의 조정이 필요하고 제도가 변화해야 하며 그 제도를 운영할 새로운 주체와 새로운 운영 방식이 필요하다. 현실에 적합한 새 거버넌스가 요구되는 것이다.

건국과 산업화, 그리고 민주화를 성취한 이후 대한민국은 이런 과제에 마주쳤다. 그러나 제6공화국은 지난 30여년간 과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시간을 흘러보낸 것이 아닌가 싶다. 그동안 문제를 다루어야 할 정치세력이 몰락했다. 먼저 보수가, 이어서 진보가 무너졌다.

정체성 정치와 포퓰리즘으로 드러나는 분열의 문제 상황을 해결하기 보다는 정치가 그 문제 자체에 함몰되어 버렸다. 문제 상황은 기성 정치 세력 자체의 문제가 되었다. 스스로 문제가 되어버린 정치는 역할을 수행할 수가 없다. 책임질 수 없는 정치는 더 이상 정치가 아니다.

제6공화국의 끝자락에 등장한 문재인 정권은 5년간 분열을 극대화함으로써 권력유지를 추구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정권교체 후에도 국회 다수의석을 차지한 민주당이 단독 입법을 밀어붙임으로써 윤석열 정부의 앞길은 물론 대한민국의 미래를 가로막는 상황은 정당이 국가 정치 세력으로서 역할을 하지않고 자기 정파의 유지만을 목적으로 하는 상황을 보여준다. 정권이 바뀌었음에도 권력을 양여하지 않고 과거 권력의 저항이 계속되는 상황은 실질적인 대선 불복으로 선거제도를 무력화시키고 있다. 실천되지 않는 제도는 제도로서의 의미가 없다. 대한민국의 거버넌스가 작동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제도를 무력화시키는 정치세력은 더 이상 정치세력이 아니며 분파주의를 추구하는 파벌에 불과하다. 총체적으로 거버넌스가 사라진 암울한 시기가 새로운 정치가 나타나는 징표이자 새로운 정치세력이 만들어지는 진통기라고 생각하여 본다. 길 것 같던 겨울이 지나면 봄이 찾아오고, 깊은 밤의 어둠이 아무리 짙어도 새벽은 다가온다.

이인철 객원 칼럼니스트(변호사, 전 MBC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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