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쩌민(96) 중국 전 국가주석이 30일 사망했다.

신화통신은 30일 낮 12시 13분(현지시간) 장 전 주석이 백혈병 등으로 인해 상하이에서 치료를 받다 9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장 전 주석은 덩샤오핑에 이어 집권해 중국을 세계 2위 경제 대국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1985년 상하이 시장이 된 그는 2년 뒤 당 정치국원에 오르면서 중앙 정치무대에 등장했다.하지만 그를 중국의 지도자감으로 주목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평범한 기술관료였던 장 전 주석의 발탁은 1989년 톈안먼(天安門)사태가 계기였다. 그는 시위 사태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도, 메가폰을 들고 거리로 나가 학생들과 직접 대화함으로써 극단적 시위로 흘러가는 것을 막았다. 유혈 진압으로 이어진 수도 베이징과 비교됐다.

덩샤오핑은 즉각 장 전 주석을 공산당 총서기로 발탁했다.그는 덩샤오핑 개혁·개방 노선의 충실한 이행자였다. 그는 이를 발전시켜 2000년 ‘3개 대표론’을 발표했다. 공산당은 노동계급의 선봉대라는 이전의 규정을 뒤집고 ‘자본가, 지식인, 노동자·농민의 이익을 대표한다’고 공산당 당헌에 명시했다. 당을 계급정당에서 국민정당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경제 전문가 주룽지(朱鎔基) 총리를 발탁해 계획경제 체제 당시의 금융, 국영기업 체제에 대수술도 단행했다.1989년 1조6922억위안이었던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15년 뒤 10배로 커졌다. 장쩌민은 경제성장에 발맞춰 중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2001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성사시켰다.  1995년11월 중국 최고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해 김영삼 당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장 전 주석은 반대 세력과 정치적 조정에도 능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태자당(혁명 원로나 고위 지도자 자제들의 모임) 소속의 쩡칭훙(曾慶紅) 전 국가부주석과 협력해 당과 정부, 군에 방대한 상하이방(上海幇) 인맥을 구축함으로써 권력 기반을 쌓았다.이로인해 정치적 균형감감과 유연성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장쩌민은 2007년 17차 공산당 대회에서 시 주석을 후진타오 이후의 지도자로 내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2012년 군부에 “중앙군사위 주석과 총서기는 시진핑이 맡아야 한다”고 못박았다. 

장 전 주석은 1926년 중국 장쑤성 양저우에서 태어나 상하이 자오통(交通)대 전기과를 졸업했다. 어린시절 한학을 비롯한 엘리트 정규 교육을 받아 시문과 음악에 능했다. 피아노와 기타, 중국 전통 현악기인 얼후 등을 연주할 줄 알았고, 영어와 러시아어도 구사했다. 재임 중 정상 외교 현장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거나, 피아노를 연주하는 파격적인 모습을 선보이기도 했다. 부인 왕예핑(王冶坪)과 사이에 몐헝(綿恒),몐캉(綿康) 등 두 아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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