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규 전 조달청장

 동로마 교회와의 공동 공의회 개최로 인기를 회복한 에우제니오 4세는 비잔틴 황제에게 많은 빚을 졌다. 투르크의 위협을 받고 있는 비잔틴을 지원하기 위한 십자군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십자군은 예루살렘 탈환처럼 멀리 중동지역을 원정하는 공격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투르크가 세르비아를 함락시키고 빈 근처까지 다가오고 있는 절박한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의 삶의 터전과 종교를 지키는 일이었다. 명분이 분명했고, 성공한다면 교황의 영예는 드높아질 것이었다. 
  에우제니오 4세 교황은 십자군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사면령도 내리고 면죄부도 팔았다. 기독교세계도 콘스탄티노플이 이슬람에 넘어가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에 교황령, 헝가리 왕국, 폴란드 외에 부르고뉴, 베네치아, 제노바도 호응하였다. 특히 헝가리는 투르크와 국경을 맞대는 최전선에 있었다. 싸울 수밖에 없었다. 마침 폴란드 왕인 브와디스와프3세가 헝가리 왕이 되었는데, 에우제니오 교황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젊은 왕은 교황에게 보은을 해야 했고, 젊음의 충동 때문인지 조속히 업적을 쌓고 싶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십자군전쟁에 나섰다. 전쟁이 어느 정도 비참하고 본인에게도 얼마나 위험한지 잘 몰랐다. 용감하다는 것은 어쩌면 상황을 단순하게 보는 것인지 모른다.    

  초반의 쉬운 승리

  교황청의 대표로는 체사리아 추기경이 나섰는데, 십자군의 핵심 전력인 헝가리·폴란드 군과 함께 콘스탄티노플로 향했다. 마침 투르크와의 전쟁에서 많은 승리를 거둬 투르크군의 두려움인 야노시 후냐디도 함께 했다. 십자군의 사기는 높았다.   
  1443년 말 십자군은 니시와 소피아를 큰 전투 없이 점령했다. 투르크군은 지구전을 예상했는지 주변을 황폐화하며 물러났다. 즐라티카 고개에서는 강력한 투르크 군에 십자군이 밀렸으나 쿠노비카 전투에서 술탄의 사위이자 할릴 파샤의 동생인 마흐무드 비예 등 4천명을 포로로 잡는 승리를 거두었다. 오스만 투르크의 역사가는 다른 지휘관들의 협력 부족으로 투르크군이 패배했다고 적고 있다<나무위키>. 십자군의 행운이었다.
  특히 이 전투에서 나중에 알바니아의 영웅이 되는 스칸데르베그가 투르크 측에서 탈영해서 기독교 진영으로 귀화했다. 스칸데르베르는 알바니아의 세습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어릴 적부터 투르크에 인질로 보내져 투르크의 전사로 활약하다보니 성경보다는 쿠란에 더 친숙한 인물이었다. 300명의 병력과 함께 투르크 측을 배반했는데 그 후 게릴라전으로 투르크를 괴롭히며 알바니아 지역의 독립을 유지했다. 십자군 측이 열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화협정의 체결  

 다급해진 투르크의 원로회의는 사절단을 보내어 평화협정을 요청했다. 세르비아를 반환하고 포로들의 몸값을 지불하며 헝가리국경에서 투르크 군대를 철수시키겠다는 조건을 제시 했다<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쇠망사>. 세제드에서 열린 휴전 회담에서 브와디스와프 3세와 요노시 후냐디, 세르비아의 군주가 10년간의 휴전 협정에 동의했다. 양측은 복음서와 코란에 대고 협정을 맹세했고, 1444년 8월 15일 세제드 평화협정이 발효되었다.
  투르크 측에서 급하게 서둔 이유는 아나톨리아의 카라만 공국이 동쪽에서 오스만투르크를 공격한데 있었던 것 같다. 무라드는 1444년 8월 카라만에 영토를 일부 할양하는 등 십자군과 비슷한 협정을 맺어 국경을 안정시켰다고 한다<나무위키>. 다만 투르크 황제 무라드 2세는 평화협정 후에 더 이상 전쟁과 황제업무를 수행하기를 거부하며, 12살의 아들에게 권좌를 물려줬다. 

  전쟁의 재개

  그러나 체사리니 추기경이 대오스만 십자군 전쟁을 계속해야한다고 촉구했다. 상황이 십자군에 유리해 보였기 때문이다. 알바니아의 스칸데르베그의 반란이 성공했고, 제네바, 베네치아 부르고뉴의 함대가 헬레스 폰투스를 차지했다는 반가운 소식도 전해왔다. 추기경은 강경해졌다. “이런 유리한 상황에서 기독교인의 숭고한 의무를 저버리고 교황의 재가없이 함부로 굴욕적인 언약을 맹세해서는 안 된다”며 강력히 평화협정 파기를 주장했다<에드워드 기번>. 결국1444년 9월 20일 헝가리 왕은 2차 십자군 전쟁을 재개했다.  

 십자군이 평화 조약을 파기하며 공격을 재개했다는 소식에 투르크의 소년 황제 메흐메트 2세는 아버지(무라드 2세)의 술탄 복귀를 요청했다. 무라드는 처음에는 자신이 더 이상 술탄이 아니라며 아들의 요청을 거절했으나, 메흐메트 2세의 편지에 허를 찔렸다. "당신이 술탄이시거든, 돌아와 당신의 군대를 이끌어주소서. 만약 내(메흐메트 2세)가 술탄이라면 당신에게 술탄으로서 명령하니, 돌아와 나의 군대를 이끄시오." 무라드는 다시 황제자리에 오를 수 밖에 없었다. 

  평화협정 체결 후의 십자군은 예전의 규모에 미치지 못했다. 평화의 분위기 속에서 많은 군사들이 전쟁터를 떠났기 때문이다. 십자군은 불가리아 평원을 통과한 뒤 해안근처의 바로나에 도달했고, 방금 술탄으로 복귀해서 6만의 병력을 이끌고 온 무라드와 마주쳤다. 

처음 전투에서 십자군의 좌측이 무너지자 우측도 위험해졌다. 중앙을 지키던 총사령관 후냐디는 브와디스와프 3세에게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움직이지 말고 기다리라고 말하면서 오스만 기병을 격퇴하러 출전했다. 후냐디는 추격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중앙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없는 데까지 진격하고 말았다. 
  한편 무라드 2세도 자신의 부대가 패주하는 것을 보고 절망하며 후퇴하려했다. 그 때 늙은 병사가 술탄이 탄 말의 재갈을 움켜잡았다. 군주의 도피를 용감하게 저지한 것이다. 술탄은 곧 정신을 차리고 노병을 칭찬했다. 그리고 기독교도들이 배신한 증거인 평화협정 문서를 꺼내어 모든 병사들이 볼 수 있게 높이 내걸고는, 눈과 손을 하늘로 향하며 신의 가호를 빌면서 예언자 예수에게도 그의 이름과 종교를 모욕한 무리들을 처벌해 달라고 기도했다<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 쇠망사>.  

젊은 왕의 무모한 돌격

이때 오스만의 좌측이 후퇴하는 것을 보고 브와디스와프 3세는 후냐디의 경고를 잊었는지500명의 폴란드 근위기병을 이끌고 오스만의 중앙으로 돌진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다리우스2세에게 달려들어 페르시아군의 본진을 무너뜨렸듯이…. 
  그러나 젊은 왕은 알렉산더 대왕이 아니었다. 오스만 제국의 기록에 의하면 무라드 술탄이 던진 창에 브와디스와프 3세의 말이 쓰러지면서 왕의 머리가 창에 매달려 졌고, 십자군은 급격히 붕괴하기 시작했다
  사실 십자군이 거의 이긴 전투였다. 정위치를 지켜달라는 야노시 후냐디의 충고를 무시한 브와디스와프 3세의 무모한 돌진이 직접적인 패배원인이었다. 후냐디도 작은 승리와 추격에 열중한 나머지 젊은 왕을 너무 오래 혼자 내버려둔 잘못이 있었다. 십자군측은 왕이 탄 말의 재갈을 움켜잡을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가장 큰 잘못은 평화협정의 파기

  그럼에도 가장 큰 잘못은 평화협정을 파기한 것이라 생각한다. 안 해도 될 전쟁을 재개한 것이다. 초반의 쉬운 승리에 자만한 십자군 수뇌부, 전쟁의 위험을 잘 모르는 왕의 경험부족, 후냐디의 공명심이 원인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추기경의 고집이 결정적이었다. 
  체사리니 추기경은 교황의 특사 자격으로 바젤 공의회를 주재했는데도, 에우제니오 4세 교황에 반대하는 역할에 앞장섰다. 바젤공의회와 교황의 대립이 7년이나 지속되는 데 그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생각이 꽂히면 끝까지 밀어붙이는 고집스런 반골기질이 있었던 것 같다. 또한 자신의 신학적 소양을 뽐내고 싶었든지 동서교회 일치를 위한 공의회 장소가 페라라로 결정되자 갑자기 교황편으로 전향하였다<에드워드 기번>.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으로 역사의 흐름을 바꿔버렸다.
  신은 평화를 원했던 게 아닐까. 평화협정으로 비잔틴을 지킬 영토와 10년간의 시간 등 십자군의 목표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 바르나 전투는 안 해도 되었다. 신에게 맹세한 유리한 협정을 깨고 전쟁을 재개함으로써 오히려 비잔틴의 몰락을 재촉했다. 동서교회일치도, 모든 권위와 체면을 내려놓고 조국을 구하기 위해 서방세계에 머리를 조아린 비잔틴황제의 노력도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전쟁은 마지막 수단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라지만 마지막 수단이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의 목숨과 재산을 앗아가는 파괴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전쟁을 하지 않고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면 그만두는 게 정답이다.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이 8개월 넘게 계속되고 있다. 수많은 인명피해와 각종 시설의 파괴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세계경제까지 힘들게 하고 있다. 핵무기 사용까지 거론되는 등 점점 더 위태로운 상황으로 가고 있다. 조속히 타협해서 전쟁을 종식시켰으면 한다.  /김상규 전 조달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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