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규 전 조달청장

탁월한 전임자를 이어서 순진한 후임자가 조직을 맡게 되면 평소에 잠복해있던 온갖 문제가 한꺼번에 발생하는 현상을 종종 보게 된다. 정치적 수완이 뛰어났던 마르티노 5세가 서거하고 에우제니오 4세가 교황이 되었다. 새 교황은 정치가라기보다 수도사에 가까웠고 금욕적이었다. 검소하게 먹고 잠도 조금만 자면서 열심히 일하고 적들을 기꺼이 용서했으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친족들을 등용해서 자기의 친위세력으로 만드는 앞선 교황들의 흔한 선례도 따르지 않았다. 주변의 추기경들은 새 교황의 이런 어리숙함을 이용해서 투표하기 전에 ‘모든 교회 세입의 절반과 중요한 사안의 상의, 연설의 자유와 관직보장’을 자신들에게 약속하게 했다<윌듀런트, 문명이야기 5-2>. 추기경들은 카리스마 있던 전임교황 밑에서 숨도 쉬지 못하다가, 세상물정에 어둡고 마음씨 좋은 교황에게서 자기들 이익을 최대한 늘리려 했을 것이다.

새 교황에게 몰려드는 적들

새 교황은 이 약속을 제대로 지킬 수 없었고 추기경들은 곧 적으로 돌아섰다. 또한 새 교황은 전임교황 마르티노 5세가 지나치게 많은 교회재산을 친족인 콜론나 가문에게 넘겼다고 생각했고 그들의 재산을 돌려받기 위해 노력했다. 교황령의 자치를 강화해서 사실상 독립된 왕국을 소망한 콜론나 가문도 새 교황에게 칼을 겨누게 되었다. 내홍으로 교황청이 흔들리자 외부의 적들이 달려들었다.

바젤공의회가 시작되었으나 참가자가 많지 않았다. 이에 에우제니오 4세는 바젤공의회를 해산하고 장소를 페라라로 옮기려 했다. 그러나 공의회 측은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선언된 공의회 우위설을 상기시키며 공의회가 이미 시작된 이상 교황이 이를 취소할 수 없다고 주장했고, 각국의 왕들이 편을 들자 교황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교황이 양보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지지한 피렌체·베네치아 연합의 적수인 밀라노 군대가 교황령을 침공했고, 로마에서는 콜론나 가문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1434년 6월 교황은 베네딕도회 수도복으로 갈아입은 후 테베레강에서 돌 세례를 피해가며 피렌체로 탈출했다<위키백과>.

마르티노 5세 때에도 파비아 공의회에 참석자가 적어 시에나로 공의회를 옮긴 적이 있었다. 그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에우제니오 4세 때는 왜 쟁점이 되었는지 의문이 생긴다. 아마 가문의 힘과 정치력으로 주변을 안정시킨 마르티노 5세와 달리, 추기경 및 콜론나 가문과의 불화로 에우제니오 4세의 권력이 약해 보였고, 이에 공의회 측이나 왕들이 공세를 펴며 교황의 양보를 받아내려 했을 것 같다. 둘째 바젤은 지역적으로 독일과 프랑스에 가까웠고 이탈리아를 벗어나 있어 독일과 프랑스 군주의 입김이 더 강하게 작용했다. 군주들은 공의회를 이용해서 교황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이탈리아로 가는 부를 자기들이 가로채려 했다. 실제로 바젤공의회에는 프랑스 성직자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었다.

공의회는 집단지성을 발휘하여 개혁을 추진할 수도 있지만, 특정 그룹의 주도하에 단순한 이익집단으로 변질되거나 외부세력을 대변하는 역할로 전락하기도 한다. 바젤공의회는 십 수년간 계속 열려 상설화되고 있었는데, 오랜 기간 공의회를 계속하려면 군주들의 지원이 없으면 불가능했다. 교황보다 공의회가 우위에 있다는 단순 논리만 되풀이한 바젤공의회는 교황청을 약화시키려는 군주들에게 이용당했을 뿐이었다.

에우제니오 4세의 험난한 역정

에우제니오 4세는 공의회를 불순한 의도를 가진 집단으로 봤다. 그래서 1438년 1월 페라라에 공의회를 소집하고 바젤 공의회에 참석한 고위 성직자들을 파문했다. 이에 1438년 7월 프랑스 왕 샤를 7세는 프랑스 성직자들의 페라라 공의회 참석을 금지했다. 프랑스의 성직자들은 교황직을 이탈리아 사람들에게서 빼앗아 오든지 교황의 권한을 축소하는데 목표를 두고 바젤공의회가 직접 사면령을 내리고 성직 첫해 수입을 이 공의회에 바치게 했다. 더욱이 샤를 7세는 성직을 왕이 추천하고, 지역수도원이나 기사단 총회 또는 지역성직자가 선출토록 했으며 교황이 성직 첫해 수입을 걷는 일을 금지 시켰다. 사실상 프랑스 교회를 교황청에서 독립시키고 왕이 그 수장이 된 것이다<윌듀런트, 문명이야기 5-2>. 1년 후에 독일도 이 선례를 따랐다.

그러나 신은 에우제니오 4세를 버리지 않았다. 투르크와의 전쟁에 서방의 지원을 얻으려는 동로마 황제가 그리스정교와 로마 카톨릭을 결합하기 위한 공동공의회를 제안했다. 바젤 공의회도 사절을 보내서 군대지원을 약속하며 자기들과 협상하자고 제안했지만 그리스 측은 에우제니오 교황을 파트너로 선택했다. 그러자 바젤공의회에 있던 고위성직자들이 교황편으로 돌아왔다. 1438년 2월 비잔틴황제, 콘스탄티노플의 요셉장로, 대주교 17명이 페라라의 공의회에 참석했다. 페스트가 발생하자 피렌체로 공의회를 옮겨서 연옥의 문제, 성령이 성자에게서도 발현되느냐 등에 대해 함께 논의했다. 드디어 1439년 7월 피렌체 대성당에서 두 교회를 통합하는 교령이 낭독되었다. 그리스 황제를 수장으로 공의회의 모든 회원들은 에우제니오 교황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정치인으로서는 부족했지만 그리스도를 본받아 소박하고 순수하게 살려했던 에우제니오 교황에게 신의 축복이 내린 것 같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폐위의 위기에 처해 있었던 교황이었다.

형식과 의례의 차이는 절박함 앞에서 무너졌고, 신앙이 같으면 의례는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원칙이 제시되었다. 의례는 인간들의 아집과 기득권에 불과했다. 절박하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한다. 또 나라를 구하기 위해 권위나 체면 등 모든 것을 내려놓은 비잔틴 황제의 숭고한 마음이 느껴진다.

시샘이 난 바젤공의회 측이 1439년 6월 에우제니오 4세를 이단자로 폐위시킨 후 다음 해 11월 대립교황 펠릭스 5세를 선출하며 교회분열을 초래했다. 아무런 호응을 얻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국제 정세는 교황에게 유리하게 전환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도 에우제니오 4세를 지지하게 되었고, 황제의 유능한 참모로 훗날 교황 피우스 2세가 되는 피콜로미니도 1442년 에우제니오 교황과 화해했다. 아라곤 왕 알폰소 5세도 나폴리 왕으로 인정을 해주자 교황 편으로 돌아섰다. 에우제니오 교황은 아르메니아 교회, 에집트, 에티오피아 및 메소포타미아 콥트 교회 등과도 교회일치선언을 했다.

정치의 본질은 상대방 약점 이용해 이익확대하는 싸움?

바젤공의회와 에우제니오 교황의 대립을 보며 정치의 본질이 싸움이란 생각이 든다. 무엇이 옳고 그르냐는 판단 보다 상대방의 약점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확대하는 데만 몰두했다. 그래도 에우제니오 4세는 자신에게 당장 이익이 되느냐 보다는 마음속의 옳고 그름에 따라 사안을 판단했다고 본다. 전임교황이 콜론나 가문에 많은 자리와 권한을 준 것은 자신의 신변보호와 로마의 안정을 위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새 교황 입장에서 볼 때는 족벌주의에 의한 특혜였고 더 이상 로마의 안전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그냥 덮고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공정을 위해 바로잡았다. 그리고 자신도 족벌주의를 배격했다. 아픔 없이 개혁할 수 없지 않는가. 추기경들에 대한 특혜를 거부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에우제니오 4세는 식민지로 전락한 카나리아 주민들을 노예로 만드는 것을 규탄하고 즉시 해방하라고 선언했다. 신대륙을 발견하기 60년 전의 일이었다<위키백과>. 이러한 결정들이 교황 자신에게 많은 어려움을 줬겠지만 신은 궁극적으로 교황 편을 들었다.

최근 정진석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조선은 안에서 썩어 문드러져 망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고, 야당을 비롯한 곳곳에서 ‘식민사관’ 운운하는 비판이 터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여태 어떠한 정치인도 감히 제기하지 않았던 용기 있는 발언이다. 에우제니오 4세처럼 자신에게 이익이 되느냐 보다는 마음속의 옳고 그름에 따른 선언이라 생각한다. 과거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있어야 미래를 제대로 엮어 갈수 있기 때문이다.

정진석의 용기있는 발언 계기로 반성과 분석있어야

어떤 국가든 침략을 받았다고 바로 식민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바이러스가 돌아다닌다고 모두가 코로나에 걸리는 것이 아니듯이…. 조선이 약했던 것도 사실이다.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아니라 러시아가 이겼다면 과연 우리의 국권을 지킬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도 든다.

일본의 침략만을 강조하면 우리 자신에 대한 반성이 부족해진다. 다시는 그런 치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잘못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했는지에 대해 보다 철저한 반성과 분석이 필요하다. 정진석 위원장의 발언을 계기로 학자들의 냉정한 분석과 연구를 기대해본다./김상규 전 조달청장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작권자 © 펜앤드마이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