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리스크에 직면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민생 입법 처리에 가속 페달을 밟고 있다. 지난 15일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과잉 생산된 쌀을 의무적으로 격리 조치하는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단독 처리해, 여야 신경전이 최고조에 달한 상태이다.

여당에서는 ‘정부가 이달말 쌀 수급안정 대책 마련을 예고’한 상황이기 때문에, 민주당이 단독 처리할 이유가 없다고 비판한다. 이 대표가 쌀값 정상화로 ‘농심 잡기’에 나서면서, 여야 간 대화와 신뢰를 실종시켰다는 것이다. 양곡처리법이 통과된 농해수위는 '국회 내 전쟁터'로 꼽히는 법제사법위원회 등과 달리 민생 사안을 주로 다루는 '비정쟁 상임위'로 꼽히는 데도 불구, 민주당이 정쟁의 단초를 제공한 셈이다.

더욱이 쌀값 하락 문제가 지난해 추수철부터 불거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양곡관리법과 연계된 ‘쌀 시장격리 의무화’를 촉구하는 이 대표와 민주당의 강성 발언이 집권 여당 시절의 민주당을 향하고 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15일 오전 경남 함안군 가야읍 묘사리 한 논에서 농민이 농기계를 이용해 수확을 1개월여 앞둔 볏논을 갈아엎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15일 오전 경남 함안군 가야읍 묘사리 한 논에서 농민이 농기계를 이용해 수확을 1개월여 앞둔 볏논을 갈아엎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농해수위에서 통과된 양곡관리법 개정안, 세금으로 쌀값을 떠받치는 게 골자

더불어민주당이 지난 15일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소위원회에서 단독 처리한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현재 정부가 재량으로 하고 있는 ‘쌀 시장 격리’(남는 쌀 매입)를 매년 의무적으로 하도록 강제하는 법안이다. 쌀 시장 격리는 국내 수요보다 많이 생산돼 남아도는 쌀을 농협이 사들이고, 농협이 쌀을 사는 데 쓴 돈을 정부가 세금으로 보전해주는 제도다.

현행법은 미곡 초과 생산량이 3% 이상이거나 가격이 전년 대비 5% 하락하면 초과생산량 이하를 매입(시장 격리)하도록 한다. 정부가 쌀 시장 격리를 실시할지 자체적으로 판단하도록 돼 있는 것이다. 민주당이 단독 처리한 법안은 정부의 재량권을 없애고, 쌀 초과 생산분이 나오는 대로 농협이 ‘무조건 전부’ 사들이게 되어 있다.

또 현재는 쌀 추수철이 지난 뒤 시장 격리를 할 경우 최저가를 제시한 농민의 쌀부터 사들이도록 돼 있는데, 민주당 법안은 추수철에 곧바로 ‘시장 가격’으로 사들이도록 했다. 지금보다 비싼 값을 주고 사들이라는 의미로, 세금으로 쌀값을 떠받치는 셈이 된다.

민주당 법안대로 할 경우, 시장 격리에 들어가는 비용이 막대하다는 점이 문제로 꼽힌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지난해 수확한 쌀 가운데 37만t을 올해 8월까지 사들이는 데만 7900억원이 소요됐다. 매년 쌀이 남아도는 상황에서 사들인 쌀을 되팔아 매입 자금을 회수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매입가의 10분의 1 수준에 사료용으로 매각하는 사례도 있다.

매입한 쌀을 보관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도 막대하다.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쌀 1만t을 2년 보관하는 데 229억원가량이 드는 것으로 추산된다. 올해 사들인 37만t을 2년 보관하는 데에만 8473억원이 드는 것이다. 37만t을 매입하는 데 7900억원이 들어간 점을 감안하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셈이다. 민주당 법안이 통과돼 쌀 시장 격리 규모가 확대되면, 매년 쌀 매입과 보관에 조 단위 세금이 들어가게 된다.

민주당, 정부 쌀 수급 안정대책 발표 10일 앞두고 상임위 통과 강행

하지만 국민의힘은 민주당이 법안을 일방적으로 처리했다는 점에 대해서만 비판할 뿐, 민주당 법안에 대해 드러내놓고 반대하지는 못하는 실정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도 대선 당시 농심을 의식해 쌀 시장 격리 확대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윤석열 후보 선거대책위원회가 문재인 정부에 쌀 20만t을 추가로 사들이라고 요구한 적도 있다.

이 대표는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말을 굳이 인용할 것도 없이 농업은 우리 미래를 책임지는 중요한 일”이라며 "국민 모두가 공감하는 일에 대해서 과거 대통령께서도 후보 시절 시장격리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며, 정부 여당을 압박했다.

이 대표는 16일 전북 김제 농업인교육문화지원센터에서 농업단체 대표들과 만나 "여러분의 마음이 타들어가지 않도록 낱알이 익어가는 벌판을 보다보면 뿌듯하지는 못할망정 불안과 초조, 긴장 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가 시장 격리 자동개입 의무조항을 담은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언급하자, 농업단체들은 쌀값 변동직불제 부활과 함께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본회의에서 빨리 통과될 수 있도록 협조해달라고 촉구했다.

농업단체 대표들과의 간담회에 앞서 이 대표는 김제 미곡창고를 방문해, 매출이 절반으로 떨어진 현 농촌 상황을 살폈다. 이날 이 대표의 농촌 방문은 '쌀값 정상화'로 민생 드라이브에 집중하는 한편, 자신의 사법리스크를 우회해 정부 여당을 압박하기 위한 전략으로 관측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6일 전북 김제시 김제농협 미곡창고를 찾아 도정된 쌀을 살피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6일 전북 김제시 김제농협 미곡창고를 찾아 도정된 쌀을 살피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국민의힘에서는 민주당과 이 대표의 이같은 행보에 비판의 목소리가 높은 실정이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입법권은 국회 고유 권한이긴 하나 10여일만 있으면 정부가 대책을 발표할 텐데 이것까지 보고 논의해서 합의 처리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며 "너무 급하다는 인식을 지울 수 없다"고 지적했다.

특히 정부가 이달말 쌀 수급 안정대책 발표를 예고한 상황에 주목된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해당 법안이 처리되기 직전인 14일 오후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농업진흥청이 올해 작황 조사를 하고 이를 토대로 농림부가 이달 말쯤 쌀 수급 안정 대책을 마련해 발표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민주당, 문재인 정부 시절엔 쌀 시장 격리에 늑장 대응

하지만 쌀값 하락 문제와 시장 격리에 대한 문제제기는 지난해부터 이미 공론화된 바 있다. 지난해 9월 29일 전남도는 ‘올해산 쌀 공급과잉 예상 물량 시장 격리 등 특별대책 건의 성명서’를 내고 수확기 쌀값 안정을 위해 선제적인 시장격리 조치를 촉구했다.

이러한 건의에 대해 문재인 정부의 농림축산식품부는 수확기를 지나 추수가 모두 끝나는 시점인 지난해 11월 15일까지 시장 격리 여부 결정을 미뤘다. 이후 해를 넘겨 올해 1월 말이 되어서야 초과 생산량 27만t 가운데 20만t에 대한 시장 격리를 단행했다.

농민단체 등은 지난해에 이미 “쌀값이 평년보다 5% 이상 하락하면 정부가 쌀을 매입할 수 있도록 양곡관리법에 명시되어 있는데, 정부가 이를 의무조항이 아니란 이유로 이행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15일 오후 전남 무안군 삼향읍 전남도청 앞에서 광주·전남지역 농민, 시민단체 활동가, 정당인 등이 쌀값 안정 대책을 촉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15일 오후 전남 무안군 삼향읍 전남도청 앞에서 광주·전남지역 농민, 시민단체 활동가, 정당인 등이 쌀값 안정 대책을 촉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사법리스크 직면한 이재명, 민생입법 드라이브 걸어 우회 돌파?

이번에 민주당은 “쌀 시장 격리가 의무조항이 아니어서 실효성이 없다”며 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의무조항이 아니라며 지난해에 관련 조항을 사문화시킨 장본인이 이번에는 농심 잡기용으로 양곡관리법 개정에 나선 것이다.

쌀 시장 격리가 식량 안보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쌀은 매년 20만t 이상 남지만 콩이나 밀 등의 공급은 부족한데, 과잉 생산된 쌀을 정부가 무조건적으로 사주면 농민들이 쌀 외에 다른 품목을 재배하지 않게 된다”고 지적했다. 쌀을 제외한 다른 작물의 자급률을 높이는 데, 쌀 시장 격리가 방해 요소로 작용할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쌀 시장 격리를 법으로 의무화할 경우, 국제적으로는 정부가 ‘농업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따라서 세계무역기구(WTO) 협상이나 외국과의 통상 협상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이런 우려에 대해서는 눈감은 채, ‘쌀값 정상화’로 민생 드라이브에 집중하는 동시에 자신의 사법리스크를 우회하는 데만 골몰하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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