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시행으로 자국산 전기차가 미국 시장에서 차별 대우를 받게 된 5개국이 공동 대응에 나섬에 따라, 그 결과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독일·영국·일본·스웨덴 등 주요 5개국 미 워싱턴DC 주재 대사관은 지난주 공동 대응을 위한 실무급 협의에 나섰다.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 시행에 따라 우리 정부와 기업은 미국을 설득하는 것부터, 각국과의 대응 공조, 세계무역기구 제소까지 쓸 수 있는 모든 카드를 쓰기로 했다. [사진=연합뉴스]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 시행에 따라 우리 정부와 기업은 미국을 설득하는 것부터, 각국과의 대응 공조, 세계무역기구 제소까지 쓸 수 있는 모든 카드를 쓰기로 했다. [사진=연합뉴스TV 캡처]

5개국 모두 IRA가 세계무역기구(WTO)의 최혜국대우 규범에 배치된다는 데는 공감대를 이룬 것으로 전해진다. 5개국의 공동 대응이 확정될 경우, WTO 공동 제소가 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각국의 세부 입장이 사뭇 달라 공조 수준에는 이견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과 FTA 체결 안한 일본과 EU는 WTO 제소 추진 VS. 미국과 FTA 체결한 한국은 FTA 채널이 유리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지난달 29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규정상 (전기차 차별 문제를 제기하면) 한미 FTA나 WTO 절차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돼 있다”며 “WTO 절차로 가면 같은 입장인 일본, 유럽연합(EU) 국가들과 공조가 가능한 면은 있다”고 말했다.

EU와 일본도 우리처럼 최근 미국이 북미산 전기차에만 7500달러(약 1000만원)의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이 WTO의 최혜국대우 규범에 배치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 우리나라와 같이 IRA는 동맹과의 핵심 공급망 구축을 강조해 온 미국의 가치 동맹 기조에도 상충된다는 우려를 계속 제기할 것으로 전해졌다.

이처럼 5개국이 공조하는 것만으로도 대미 협상력 강화 효과가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IRA가 지난달 16일부터 이미 시행된 가운데, 미 재무부는 올해 말까지 해당 법의 시행령을 정하게 된다. 이때 북미 조립 전기차 이외에 특정 국가 조립 전기차에도 보조금을 지급하도록 예외 조항을 만드는 방안이 가능하다.

또 5개국이 공동으로 미측에 일정 기간 시행을 유예하도록 법안 수정을 요청하는 방법도 거론된다.

우리나라는 현대차의 조지아주 전기차 공장 완공 시점(2025년)까지 3년간 법 시행 유예를 미측에 요청하고 있다.

하지만 5개국의 공조에도 불구하고 오는 11월 8일 중간선거 이전까지 해당 법안이 수정될 가능성은 적다. 미측은 이미 우리나라에 IRA 법안을 분석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설명한 바 있다.

미국은 EU측의 요구에도 즉답을 회피한 것으로 알려진다. 미리엄 가르시아 페러 EU 집행위원회 대변인은 지난달 11일 기자회견에서 보조금 정책이 해외 자동차 회사를 차별해 세계무역기구(WTO) 규범과 상충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USTR은 타이 대표가 기후 위기를 제대로 대응하고, 공급망과 안보 취약성을 해결하기 위해 미국과 EU 모두 청정에너지 기술 투자를 확대할 필요에 주목했다고만 밝혔다.

또 각론에 들어가면 각국의 입장이 다르다는 점도 5개국 공조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보조금 지급 대상을 기존의 ‘북미산’에서 한국 등 ‘FTA 체결국’으로 수정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지만 일본, EU, 영국 등은 미국과 FTA를 맺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한국, 일본, EU 등에 대한 각개격파 전략 선호?

지난달 말 방미한 우리 정부대표단이 제시한 ‘한미 간 범부처 협의 채널’을 6개국으로 확대하는 방안도 언급되지만 현실성은 떨어진다. 미국 입장에선 소위 일대일 협상으로 각개격파에 나서야 협상력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5일(현지시간) 노동절 기념 연설에서도 ‘요지부동’인 미국의 입장이 거듭 확인된다. 바이든 대통령은 위스콘신주(州) 밀워키를 방문해 "전 세계 제조업이 미국으로 몰려오고 있다"며 제조업 부활을 위해 미국 내 생산을 재차 강조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의 노동절을 맞아 제조업 부활 의지를 피력하며 또다시 자국 내 생산을 강조했다. [사진=연합뉴스TV 캡처]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의 노동절을 맞아 제조업 부활 의지를 피력하며 또다시 자국 내 생산을 강조했다. [사진=연합뉴스TV 캡처]

하지만 우리 정부도 요지부동인 미국을 대상으로 협상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국회의원이나 정부 실무진이 미국을 다녀간 뒤, 통상 수장인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5일 미국 땅을 밟았다. 조만간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도 IRA 양자 협의를 위해 방미 길에 오른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바이든 대통령, ‘미국 내 생산 원칙’ 포기 안할 듯

우리 정부가 이처럼 미국 정부와 협상에 나서고 있지만, 바이든 대통령이 미국 내 생산 원칙을 강조함에 따라 쉽지 않은 협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운데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대응 방안 마련차 미국 출장을 떠났던 정의선 현대자동차 그룹 회장이 지난 3일 귀국했다. 하지만 뾰족한 해법 마련은 어렵다는 결론에 이른 것으로 알려진다. 정 회장의 긴급 방미 출장은 미국이 시행하는 IRA로 인한 전기차 판매에 차질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우리 국회가 미국에 세제 지원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내고, 정부도 합동 대표단을 꾸려 미국에 우려를 전달하는 등 돕고 있지만 실질적인 해법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미 IRA가 시행된 데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오는 11월 중간 선거를 앞두고 IRA법 시행을 자신의 성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안덕근 통상교섭본부장이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따른 한국산 전기차 차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다. [사진=연합뉴스TV 캡처]
안덕근 통상교섭본부장이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따른 한국산 전기차 차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다. [사진=연합뉴스TV 캡처]

현대차, 미국 조지아주 공장 조기 착공 및 증설 추진

결국 현대차그룹이 미국 내 전기차 생산을 앞당기는 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관측된다. 현대차그룹은 이번 인플레이션 감축법 시행으로 미 조지아주 공장 설립 시기를 앞당기기로 했다.

당초 미국 조지아주 공장 착공을 내년 상반기로 계획하고 있었지만, 연내 착공으로 조정하는 것이다. 이러면 2024년 하반기에는 공장을 가동할 수 있다.

현대차그룹은 조지아 전기차 공장 가동 시기를 앞당길 뿐 아니라, 해당 공장의 생산량도 더 늘릴 계획으로 알려진다. 조지아 전기차 공장을 연산 30만대로 조기 완공한 뒤, 2025년에 추가 증설하는 방안이 검토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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