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지난달 16일(현지시간)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통과시키면서, 현대기아차는 미국 내 판매에 직격탄을 맞게 됐다. 북미에서 조립한 전기차에 대해서만 보조금을 지원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승승장구하고 있던 현대기아차의 판매에 제동이 걸렸기 때문이다.

지난 7월 16일(현지시간) 바이든 대통령이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서명함으로써, 현대기아차의 미국 내 판매에 제동이 걸렸다. [사진=연합뉴스 영상 캡처]
지난 7월 16일(현지시간) 바이든 대통령이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서명함으로써, 현대기아차의 미국 내 판매에 제동이 걸렸다. [사진=연합뉴스 영상 캡처]

생산지와 무관하게 모든 전기차에 보조금 지급해온 정책 변경해야

미국뿐 아니라 중국은 진작부터 중국산 배터리를 사용하는 전기차에 한해서만 보조금을 주고 있는 상황이다. 반면 생산지와 무관하게 아무런 차별없이 모든 전기차에 보조금을 주는 한국정부의 보조금 정책을 이번 기회에 개편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같은 주장은 미국이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계기로 ‘미국을 비롯해 캐나다, 멕시코 등 북미에서 최종 조립된 전기차에 대해서만 7500달러(1000만원)의 보조금을 주는 쇄국적 보호주의’에 나서면서 힘이 실리고 있다. 철저한 자국이기주의에 휘둘리는 전기차 보조금 전쟁에서 현대기아차만 피해를 입고 있다는 진단이 제기되는 상황이다.

19종의 친환경차 미국에 수출해온 현대기아차, 연간 10만대 수출물량 차질 불가피

총 19종의 친환경차를 미국에 수출하고 있는 현대기아차는 이번 인플레 감축법에 따른 보조금 지원대상에 모두 탈락함에 따라, 연간 10만대에 달하는 전기차 수출물량에 커다란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현대기아차는 올들어 1~7월 중 미국에서만 3만9000대 이상의 전기차를 판매했다. 시장점유율은 9%로, 테슬라(76%)에 이어 2위를 달리고 있다. 이처럼 현대기아차가 전기차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기술력과 보조금 지원 덕분이다.

현대기아차의 기술력이 뒷받침되면서 성능은 큰 차이가 없는 데다, 보조금 덕분에 테슬라와 비교해 가격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오닉5는 3만9950달러에 판매되는 반면, 테슬라 모델3은 현대기아차보다 7000달러 가량 더 비싼 4만6990달러에 판매된 탓에 현대기아차 전기차가 각광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인플레 감축법이 발표되면서 현대기아차는 앞으로 정부보조금을 받을 수 없게 됐다. 정부보조금을 못 받을 경우 아이오닉5의 가격은 4만7450달러로, 테슬라 모델3보다 더 비싸지게 된다. 가성비가 좋다는 인식 덕분에 미국시장 점유율을 빠르게 늘려온 현대기아차 입장에서는 날벼락을 맞게 된 것이다.

현대기아차는 지난 1분기 미국에서 3만9000대 이상의 전기차를 판매, 테슬라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사진=연합뉴스 영상 캡처]
현대기아차는 지난 1분기 미국에서 3만9000대 이상의 전기차를 판매, 테슬라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사진=연합뉴스 영상 캡처]

전기차 배터리도 미국생산품 50% 이상 써야...국산 전기차 배터리 90%는 중국산

설상가상으로, 인플레 감축법에 따라 내년부터 전기차 배터리는 미국 내 생산 제품을 50% 이상 써야 하고, 2029년에는 100%를 충족해야 하는 실정이다. 북미에서 조립생산해야 한다는 조건 외에, 배터리까지 자국산을 써야 한다고 못박았다.

현재 현대기아차는 북미시장 전기차 생산시설이 없다. 조지아주에 들어설 전기차공장은 2025년에야 가능할 것으로 예상되는 데다, 그마저도 노조의 동의가 필수적이다.

더욱이 전기차 배터리의 90% 이상을 중국에서 생산하고 있는 사정을 감안하면, 국내산 전기차는 향후 단 한 푼의 보조금도 받을 수 없게 돼, 철저하게 경쟁력에서 밀릴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사태 심각성 인식한 한국 정부, 뒷북 대응 나서

지난달 16일(현지시각) 바이든 대통령이 인플레 감축법에 서명한 뒤에도 즉각적인 대응을 강구하지 않던 우리 정부가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총력 대응에 나서고 있다. 한덕수 총리는 지난달 29일 YTN 라디오에 출연해 “한국 정부 대표단이 곧 미국으로 가서 미국 정부와 협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안성일 산업통상자원부 신통상질서전략실장을 비롯한 정부 합동대표단은 지난달 29일 긴급 미국 방문길에 나섰다. 방문단은 29~31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무역대표부(USTR), 재무부, 상무부 등을 방문해 인플레이션 감축법 시행에 대한 우리 정부와 산업계의 우려를 전하고 대책을 협의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부의 항의가 먹혀들지는 미지수이다. 정부 합동대표단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세라 비앙키 미 무역대표부(USTR) 부대표와 상무부 차관보 등과 잇달아 회동했다. 대표단은 이 자리에서 IRA에 대한 국내의 우려를 전달하고 법 조항 수정을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USTR도 이날 성명을 내고 “비앙키 부대표와 안 실장은 회동에서 안보 및 양국의 번영을 지지하기 위해 한미의 긴밀한 무역 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면서 “양측은 IRA에 따른 전기차 보조금 문제에 대한 한국의 우려에 대해 논의했고, 향후 이 문제에 대해 긴밀한 연락을 유지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한미간 시각 차이 커서 타협점 찾기 어려워...‘강력한 맞대응 조치’ 필요성 대두

성명만 보면 미국이 나름의 성의를 보인 셈이지만, 양국의 시각차는 적지 않다. 워싱턴 조야에서는 법안 수정 자체도 어렵거니와, 11월 중간선거와 맞물려 장기전이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대체적이다. 바이든 행정부가 미국 기업에 혜택을 몰아주고 해외 기업의 미국 내 유치를 유인해 일자리를 늘리는 IRA를 정치적 성과로 내세우고 있어, 수정은 어렵지 않겠느냐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인플레 감축법은 북미에서 최종 조립하는 전기차에 대해서만 보조금을 지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영상 캡처]
인플레 감축법은 북미에서 최종 조립하는 전기차에 대해서만 보조금을 지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영상 캡처]

따라서 더 강한 맞대응 조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정부도 우리측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미국산 전기차에 대한 보조금 지급을 중단하는 방안을 강구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같은 맞대응 조치가 실현되면 미국산 외에 중국산 전기차에 대해서도 동일한 조치가 내려질 것으로 전망된다.

사실상의 통상 보복조치에 해당되는 이 같은 조치가 실제 실현되기까지는 고려돼야 할 사항이 적지 않다. 30일 열린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의 “전기차 보조금을 국내산 전기차 개발 지원금으로 쓸 생각이 없냐”는 질문에, 이도훈 외교부 제2차관은 “관계부처와 이 문제를 검토할 예정”이라고 밝혀 신중한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미국과 중국이 자국산 전기차에 대해서만 보조금을 지원하는 상황에서 한국만 차별없이 지원하는 것은 ‘국제적 호구’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 힘을 얻고 있다.

이미 한국산 전기차 차별해온 중국산 전기차 보조금 폐지는 시급한 과제

특히 한국산 전기차에 대해 차별을 일삼는 중국산 전기차에 대한 보조금 지급은 반드시 개선돼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올 상반기에만 중국산 전기버스에 대해 약 790억원 가까운 보조금이 지급돼, 중국산 전기버스의 한국시장 점유율이 빠르게 높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펜앤드마이크 7월 27일자 ‘자국기업 죽이는 한국정부 전기버스 보조금...현대차가 중국차에 압사당할 판’ 제하 보도 참조. 국내의 전기차 보조금을 중국산이 더 많이 챙기고 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 대목이다.

국내 보조금 사정과 달리, 중국은 신에너지차 권장 목록 제도를 통해 외국산에 대한 보조금을 노골적으로 차별하고 있고, 이를 통해 자국 전기버스 업체 육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중국에서는 국산 전기차가 아무런 보조금 지원을 받지 않음에도 불구, 국내에선 중국산 전기차가 보조금을 싹쓸이 하고 있는 상황이 호혜원칙에도 맞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따라서 우리 정부도 보조금 제도 개편을 통해, 국산 전기차 육성에 집중해야 한다는 지적에 힘이 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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