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5월 방한 당시 “미국은 현대차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공언한 바 있다. 그런데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서명함으로써 현대차는 극심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 상황이다. 현대차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면서도 바이든 대통령이 IRA에 서명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로는 두 가지가 거론된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5월 방한 당시 "미국은 현대차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지만, 인플레이션 감축법안에 서명함으로써 현대차의 뒤통수를 때렸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5월 방한 당시 "미국은 현대차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지만, 인플레이션 감축법안에 서명함으로써 현대차의 뒤통수를 때렸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영상 캡처]

우선 미국 국내 정치구조상 바이든 대통령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것이 연합뉴스의 분석이다. 연합뉴스는 지난 26일 영상으로 된 ‘14조 선물 고맙다더니 ‘현대차 보조금 제외’ 바이든 왜?’ 라는 내용을 통해, 바이든의 선택을 집중 분석했다. 단순히 미국 제조업 부흥을 위해서 현대차를 배제하는 강수를 둔 게 아니라는 내용이다.

단지 미국 제조업 부흥이라는 원칙을 위해 현대차 배제했다고?

지난 16일(현지시간) 바이든 대통령이 서명한 IRA는 ‘미국 국내에서 생산된 전기차에 한해 보조금을 지급’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미국에서 전기차를 구매하는 소비자들에게 최대 7500달러 (약 1천만원에 해당)의 보조금을 세액 공제의 형태로 제공하고 있다.

그런데 IRA가 본격 시행될 경우, 현대차가 가장 큰 피해를 볼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아이오닉5가 큰 인기를 끌면서, 지난 1분기 현대기아차의 미국 전기차 시장 점유율이 테슬라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테슬라가 76%, 현대기아차가 9%의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1,2위의 격차가 크지만 포드가 4%, 폭스바겐에 4% 르노‧ 닛산이 3% 점유율에 비하면, 의미있는 수치로 분석된다.

이번에 통과된 IRA의 적용을 받게 된 현대기아차는 황당해진 상황이다. 미국에서 전기차를 생산하는 않는 현대기아차와 달리, 포드와 폭스바겐 닛산 등은 북미에서 현재 전기차를 생산하고 있어 보조금 적용 대상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3개월 전 바이든 대통령 방한 당시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14조원 정도를 투자해 미국내 전기차 공장을 착공하기로 한 약속의 빛이 바랬다는 분석이 나오는 상황이다. 업계 내부에서는 “현대차그룹이 뒤통수를 맞은 게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될 정도이다.

미국 국내정치 요인= 중간선거 앞두고 웨스트버지니아주 조 맨친 상원의원 달래기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으로서도 미국내 정치적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 연합뉴스의 보도 내용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IRA에 서명한 첫 번째 이유로는 같은 민주당 출신 ‘조 맨친’ 의원의 반대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다가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지지율이 30%까지 떨어진 바이든 대통령 입장에서는 핵심 공약이 담긴 ‘더 나은 재건 (Build Back Better)’ 법안을 반드시 통과시켜야 하는 상황이었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지지율이 30%까지 떨어진 바이든 대통령 입장에서는 '더 나은 재건' 법안을 반드시 통과시켜야 하는 상황이었다. [사진=연합뉴스 영상 캡처]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지지율이 30%까지 떨어진 바이든 대통령 입장에서는 '더 나은 재건' 법안을 반드시 통과시켜야 하는 상황이었다. [사진=연합뉴스 영상 캡처]

이 법안의 주요 내용은 기후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지출을 늘리는 것으로, 민주당 핵심 지지층을 대상으로 했다. 그런데 맨친 의원의 반대에 부딪힌 것이다. 맨친 의원은 공화당 지지 성향이 강한 웨스트버지니아 상원의원으로, 산악지대인 이 지역은 미국 내 주요 석탄‧천연가스 생산지대이다.

맨친 의원은 그 지역에서 2005년 주지사를 지냈고, 2010년부터는 상원의원을 지내고 있다. 맨친 의원 입장에서는 ‘전기차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이 자신을 지지하는 지지자들의 이익에 반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전기차가 늘어날수록 석유를 에너지원으로 삼는 내연차는 점점 설 자리를 잃게 되고, 그렇게 되면 석유산업과 관련업계도 위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맨친 의원은 지난 4월 청문회에서도 “휘발유 가격이 (갤런당) 4달러에 이르면서, 사람들이 전기차 구매를 위해 대기하고 있다”며 “사람들이 원하는 제품이 충분히 생산되고 있지 못한데도, 그 제품을 구매하는 데 보조금을 지급한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비판한 바 있다.

영국 가디어지는 ‘더 나은 재건 법안에 반대하는 이유’를 분석하면서, 맨친 의원에 대해 ‘현 선거기간 내 미국 상원의원 중 석유와 가스 산업 부문에서 가장 많은 후원금을 받았으며, 그 규모는 이 부문에서 두 번째로 후원금을 많이 받은 정치인의 두 배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맨친 의원의 반대에 바이든 대통령의 고심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관측된다. 상원의원 의석수가 여야 딱 반반인 상황에서 공화당 의원들이 모두 반대하는 가운데, 맨친 의원의 도움 없이는 법 통과가 어렵기 때문이다.

자신의 핵심 공약이 법으로 되는 순간을 맞는 사람의 표정이라기엔, 떨떠름해 보이는 바이든 대통령의 표정이 주목된다. 옆에 서 있는 조 맨친 상원의원 때문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사진=연합뉴스 영상 캡처]
지난 16일(현지시각) IRA에 서명하는 바이든 대통령의 표정이 주목된다. 자신의 핵심 공약이 법으로 되는 순간을 맞이한 사람의 표정이라기엔 떨떠름해 보이기 때문이다. [사진=연합뉴스 영상 캡처]

따라서 협상 과정에서 ‘전기차 보조금 지급을 제한하는 쪽으로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연합뉴스의 분석이다. 그 과정에서 ‘더 나은 재건 법안’을 축소 수정한 ‘인플레이션 감축법안’이 나왔다는 것이다.

심지어 법 이름이 ’인플레이션 감축법‘이 된 것도, 맨친 의원 때문이라는 말이 흘러나오고 있다. 블룸버그 보도에 따르면,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의 핵심 입안자인 맨친 상원의원은 동료들에게 “인플레이션이 최우선 현안이어야 하며, 법안에 인플레이션을 부채질하는 그 어떤 내용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거듭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법 내용은 인플레이션과 큰 관련이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이런 연유로 미국 언론들은 법 이름을 두고 “유권자를 헷갈리게 하는 정치적 레토릭”이라고 지적하면서 ‘인플레이션 감축법’이라는 공식 명칭보다 ‘기후변화법’이라는 표현을 더 자주 쓰고 있다.

국제정치적 요인= 패권 경쟁 벌이는 중국 배제 목적이 강해

바이든 대통령이 IRA에 서명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두 번째 이유로는, 국제정치적 요인이 꼽힌다. 중국과의 패권 경쟁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래 먹거리인 전기차 시장에서도 중국을 배제하려는 미국의 의도가 IRA에 그대로 담겨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전기차 세액 공제 적용 항목 중 배터리에 대한 내용에서도 이런 미국의 의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배터리 부품과 원자재 50% 이상이 북미산인 경우에만 세액 공제를 해준다는 것이다.

심지어 리튬, 코발트, 니켈 같은 배터리 광물도 내년부터 최소 40%, 2027년까지는 80%를 미국이나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국가에서 공급한 것을 써야 세액공제를 해준다는 것이다.

맨친 의원은 지난 4월 28일 청문회에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현재 유럽에서 에너지를 무기화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며 “중국이 똑같은 일을 할까 우려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런데 문제는 현재 전 세계 전기차 배터리 시장의 절반 이상을 중국이 장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배터리를 생산하는 데 들어가는 원자재나, 광물 공급도 마찬가지이다. 전기차 배터리와 원자재를 장악하고 있는 중국으로서는 자국 내 전기차 수요마저 탄탄하기 때문에, 여유를 보이는 입장이다.

한국 정부, 인플레감축법 시행령 제정 겨냥해 통상외교 서둘러야

중국과 미국의 강경한 대치 상황에서 IRA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게 된 우리 정부로서는 부라부랴 “IRA가 한미 FTA 원칙과 세계무역기구(WTO) 규범에 위반될 소지가 있다”며 자동차 업계의 우려를 미국에 전달하고 있지만, 상황이 녹록치 않다.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동맹도 언제든 뒷전으로 밀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업계와 통상전문가들은 IRA 발효와 관련해, 민관이 함께 적극적으로 대응에 나서야 한다는 주문이 나오고 있다. 법안이 통과됐지만 시행령과 시행규칙이 아직 제정되지 않은 만큼, 최대한 우리의 의견을 담아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와 함께 국내에서도 전기차 보조금 정책 개편과 법인세 한시 감면 등 피해를 입는 기업을 보호하는 정책을 함께 펼쳐야 한다는 조언이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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