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규 전 조달청장

미남왕 필립4세,오늘날 프랑스 만들어

필립4세는 큰 키에 금발이 빛이났고, 피부가 곱고 얼굴이 아주 아름다워 미남왕으로 불렸다. 국민국가를 확실히 다져 오늘의 프랑스를 만든 인물이 잘생기기까지 했다니 신은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그의 평판이 썩 좋지 않아 신은 역시 공평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의 이상은 높았는데 귀족과 성직자 모두를 왕의 직접적인 통제에 두는 중앙집권을 완성하고, 산업기반을 농업에서 상업과 제조업으로 전환하며 프랑스 국경을 피레네 산맥과 라인강까지 확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이상은 거의 다 달성되었다. 삼부회를 처음 소집하여 도시 시민들의 정치권을 최초로 인정했으며, 측근 하급귀족 세력을 이용한 관료제를 확립시켜 프랑스를 중앙집권국가로 탈바꿈시켰다. 보니파키우스 8세 교황과의 싸움에서 승리함으로써 중세 봉건 사회를 끝냈고, 성전기사단을 해체하는 중대한 결단으로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이런 큰 업적이 스무드하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때때로 손에 피를 묻히고, 인정사정없이 뻔뻔해지며. 자신의 정적에게는 가혹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냉혈한으로 비쳐지지 않았을까.

  어쨌든 이러한 일을 가능하게 했던 힘이 궁금해진다. 하급 귀족 출신의 법률가들을 씽크탱크로 잘 활용했고, 그들의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시대가 요구하는 결단을 잘했다고 본다.
  어렸을 때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만이 위험을 무릅쓴 결단을 하고, 이를 통해 미래로 나아간다. 필립4세는 왕자로 태어나서 화려하게 인생을 출발했을 거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마음고생이 많았던 것 같다. 3살 때 어머니를 여의어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해 고독 속에서 성장했다. 특히 계비는 전처 자식들에 대해서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아서 2살 위의 형이 8살 때 의문의 죽임을 당했는데 계비와 관련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물론 그 때문에 필립 4세가 왕이 될 기회를 잡게 되었지만….
  

민심파악 능력과 과감한 결단 돋보여

  그래서 눈치가 발달했고 민심의 흐름을 잘 파악했다. 또 민심이 자기편에 있다는 생각이 들면 과감하게 결단을 내렸다. 대표적인 예가 보니파키우스 8세와의 싸움이었다. 당시 교황이 왕보다 지체가 높고 훨씬 강하게 느껴지는 시대였다. 
  이상이 높고 일을 많이 벌린 왕은 돈이 항상 필요했다. 돈을 마련하기 위해 그는 온갖 수단을 강구했는데, 귀족들의 군역을 현금으로 대신하고 유태인을 추방하고 재산을 몰수했으며. 금화나 은화에 구리를 섞어 통화가치를 떨어뜨리기도 했다. 그래도 큰돈이 나올 구석은 당시 가장 부자였던 성직자 그룹 밖에 없었다. 그러니 교황과의 싸움은 불가피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그룹의 문제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우선 기독교 교리를 교조적으로 해석해서 현실의 문제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단을 포용하지 못하고 종교재판으로 민심과 이반되었고, 십자군 원정을 한두 번 하고 실패하면 이것이 아니구나 하고 정책을 수정해야하는데 계속 추진하고 있었다. 백성들이 편하게 살려면 누군가 이 관성에 제동을 걸어야 했다. 그 역할이 프랑스 왕 필립4세에게 부여된 것 같다.

  필립4세는 보니파키우스 교황과의 싸움에서 다양한 전략전술을 구사했다. 첼레스티노 5세의 유폐사건 등 교황의 약점을 파고들어 성직자 과세에 대해 교황의 양보를 받아냈고, 전세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자 3부회를 소집하여 백성들의 지지를 확고히 했다. 또 파문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자마자 전광석화같은 군사행동으로 교황을 공격했다. 프랑스에서 로마 근처의 아나니까지 병력을 보냈으니 이스라엘의 엔테베 작전 같은 특공작전을 펼친 것이다. 사실상 윗사람을 공격한 것이니 쿠데타에 가깝다. 우리 근세사의 박정희, 전두환 두 대통령과 비슷한 점이 느껴진다.

결단의 힘은 강한 확신

  좋게 말해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이런 결단의 힘은 강한 확신에서 나왔을 것이다. 필립4세는 보니파키우스 8세를 속물이나 악의 화신으로 봤을 것 같다. 첼레스티노 5세 전임교황을 위계로 물러나게 만들고, 자기 권력에 위협이 될까봐 유폐시켰다. 십자군이 마지막 거점을 잃어버려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데도 십자군 전쟁을 위해 성직자나 성전기사단에  세금을 매기지 못하게 했다. 왕이나 백성들의 고통을 도외시하고 자기 고집만 피우는 간계에 능한 늙은이로 봤을 것이고, 교황을 물러나게 하는 것이 ‘신의 정의’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성전기사단에 대해서도 이슬람 세력과 적당히 타협했으면서도, 많은 공을 세운 양 거들먹거리는 위선적인 집단으로, 다 끝난 십자군 전쟁에 다시 불붙이며 자기 집단의 이익을 꾀하는 돈밖에 모르는 속물들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더욱이 필립4세는 십자군 전쟁에 트라우마가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할아버지 루이9세가 8차 십자군원정에서 사망하고, 어머니도 그 원정의 후유증으로 일찍 죽어 필립4세의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만들었다. 왕이 되어서도 할아버지가 진 십자군 전쟁의 빚을 갚아야 했다. 할아버지는 성인 왕으로 불릴 정도로 카페왕조의 토대를 굳건히 했지만, 2번의 십자군 원정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부었고, 포로로 잡혀 몸값을 내기도 했다. 그 모든 비용이 손자에게는 빚으로 남았다. 필립 4세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십자군은 좋아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는 플랑드르와 싸울 때 프랑스 군대를 십자군이라 칭하기도 했다. 신앙심이 깊은 프랑스는 제2의 성지이므로 이를 지키는 것은 십자군이란 식이다. 그를 보면서 정치는 뻔뻔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필립4세는 십자군 원정이 무익하다고 생각했고 영주들의 힘이 약해졌을 때 중앙정부로 통합하려했다. 이는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의 정책과 상반되었다. 프랑스 왕국이 지방 영주들로 갈라져 있어야 십자군 전쟁에 영주들을 동원하기 좋고 왕에 대한 견제도 되는데, 필립 4세가 통일정책을 펼치면 지방 영주들로부터 십자군 전쟁에 필요한 군사 차출이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필립4세는 십자군 원정을 마무리 지었다. 원정을 끝까지 지지한 교황권이라는 하나의 악을 제거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도 악인의 역할을 다했다. 신은 악을 통해서 악을 징계하므로..... 당시 십자군원정에 한이 맺힌, 영지를 잃어버린 빈털털이 영주, 전쟁고아와 과부 등의 수많은 아픈 사연이 있었다. 그런 한들이 교황권을 무너뜨리는데 힘이 되어 주었을 것이다. 
  교회를 대단히 어렵게 만든 아비뇽유수도 필립 4세의 작품이다. 자기 사람인 클레멘스 5세를 교황에 앉혔고,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7세가 로마를 점령하자 아예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기도록 유도했다. 이후 70년 동안 프랑스 국왕의 지배하에 놓이게 하였다.

  그래도 필립4세는 부하들과의 신뢰를 유지하고 그들의 확실한 지지를 받았던 것 같다. 최측근이었던 남프랑스 출신 법률가이자 정치가인 기욤 드 노가레는 필립 4세에 대해서 “항상 정조를 지키고, 육체가 순결하며, 겸허하고, 외모를 뽐내지 않으며, 말로 으스대지 않고, 결코 성내지 않으며, 아무도 증오하지 않고, 아무도 시기하지 않으며, 모두를 사랑하신다.”(위키백과) 고 말했다. 지나친 용비어천가이지만 측근들은 그를 좋아하고 충성을 다했던 것 같다.

  그러나 자크 드 몰레를 화형시킨 것은 심했다. 자백을 하면 풀어준다고 해놓고 종신형을 선고하고, 자백을 번복한다며 화형을 시켰다. 70세의 노인이었다. 감형을 하고 성전기사단 재산을 정리한 후에 특별사면을 했더라면 신이 필립4세에게 그렇게 때 이른 죽음을 보내지 않았을 텐데....

이재용,신동빈 사면이 지난 정부 지나친 행위 바로잡는 계기 되길

  광복절을 맞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등 경제인들이 특별사면·복권이 되었는데 기뻐할 일이다. 지난 정부에서 기업가들을 지나치게 옥죄고 감옥에 보낸 느낌이 없지 않다. 최근 물가인상과 세계 경제의 침체로 기업 활동이 위축되고 서민들의 생활은  팍팍해지고 있다. 사면된 분들이 기업 투자와 고용을 늘려 경제회복에 기여하기를 기대한다.

/김상규 전 조달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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