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조대왕 함의 탄생

지난 7월 27일, 우리 해군은 네 번째 한국형 이지스 구축함(DDG-995)을 진수했다. 1902년 고종 시절, 지어진 지 22년이 넘은 고물 석탄 운반선 갑판에 소구경 함포 몇 문 달아놓은 것을 순양함이라고 속아서 구입한 지 120년 만의 쾌거다. 고종이 ‘양무호(揚武號)’라 명명한 이 배를 도입한 이유는 자기의 즉위 40주년을 축하하기 위한 기념식 때 외국 사절을 위한 예포 발사용이었다고 한다. 

이번에 진수된 이지스함은 양무호와는 차원이 완연히 다르다. 가격이 척당 무려 1조 3,000억 원으로 길이 170m, 폭 21m, 8100톤급에 35노트의 속력을 낼 수 있다. 게다가 탄도미사일의 탐지·추적·요격(BMD·Ballistic Missile Defense) 능력을 보유한 것이 주된 특징이다. 이로써 우리 해군은 이지스 구축함을 네 척이나 보유한 명실상부한 해양 강국으로 부상했다.

이러한 국가적 경사를 자랑스럽게 기념하기에는 뭔가 찜찜한 심정을 감추기 힘들다. 국가의 명운을 좌우할 최첨단 이지스 구축함 이름이 하필이면 정조대왕 함이라니…. 차제에 이지스 구축함 이름을 들여다보니, 어라 이게 뭔 일인가. 1번 함이 세종대왕함, 2번 함이 율곡 이이함, 3번 함이 서애 류성룡함이다. 모두 조선 시대 인물들 아닌가.

조선 시대는 붓잡이(문관)들이 칼잡이(무관)들을 찍어누르고 문민 통치를 자행한 세계사적으로도 희귀한 '예외의 시대'였다. 그 결과 국방력은 초토화되어 대한제국 말기에는 중앙군, 지방군 다 합쳐도 병력이 8,000여 명에 불과했다. 이러니 일제 침략에 대포 한 방 날려보지 못하고 나라를 일본에 넘긴 수치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함명을 정하는 높으신 분들께서 하필이면 조선 시대 인물들만을 심사숙고하여 이지스함에 등장시킨 ‘깊은 뜻’은 대체 무엇일까?

지난 7월 28일 울산 현대중공업 조선소에서 열린 정조대왕함 진수식.
지난 7월 28일 울산 현대중공업 조선소에서 열린 정조대왕함 진수식.

#. 6·25 때 활약한 국군, 대한민국 인사는 해군 함명에 없어

해군본부는 새 함정이 완성되면 이미 준비되어 있는 함명 작명 원칙에 의해 배 이름을 정한다. 내용을 보면 수상 전투함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국민에게 영웅으로 추앙받는 역사적 인물이나 국난극복에 크게 기여한 호국 인물을 함명으로 제정한다. 호위함은 도(道)나 특별·광역시, 도청 소재지 지역명을 함명으로 사용하고 초계함은 중소도시 지역명을 딴다. 원칙에 어떤 하자가 발견되지는 않는다. 다만 실행 과정이 의심스럽다.  

문제가 되는 분야는 수상 전투함이다. 현재 우리 해군이 운용 중인 구축함은 광개토대왕급(DDH-1), 충무공 이순신급(DDH-2), 세종대왕급(DDG-1) 등 세 종류다. 세 종류 함명에 등장한 인물 내역을 본다

◇광개토대왕급: 광개토대왕함, 을지문덕함, 양만춘함

◇충무공 이순신급: 충무공 이순신함, 문무대왕함, 대조영함, 왕건함, 강감찬함, 최영함

고구려·신라·발해·고려·조선의 상징적 인물을 두루 등장시켰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과거부터 현재까지 국민에게 영웅으로 추앙받는 역사적 인물, 국난극복에 크게 기여한 호국 인물 중 6·25 때 나라를 구한 분들은 어디로 갔으며, 현재 우리네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위인들은 왜 해군 함정 이름에 등장하지 않는 것일까?

대한민국 건국을 이군 파운딩 파더(Founding Father)들, 6·25 때 목숨 걸고 나라를 지킨 분들을 함명으로 사용하지 못하는 무슨 곡절이라도 있는 것일까?

#. 항일 무장투쟁 했다는 사람들만 잠수함 함명으로 등장

잠수함 함명 제정 기준은 초기 잠수함인 SS-1은 통일신라부터 조선 말까지 바다에서 큰 공을 남긴 인물을 함명으로 사용한다. SS-2와 3은 독립운동에 공헌한 인물, 혹은 광복 후 국가발전에 기여한 인물을 함명으로 부여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잠수함에 등장한 인물 내역을 본다.

◇SS-1: 장보고함, 이천함, 최무선함, 박위함, 이종무함, 정운함, 이순신함(충무공 이순신과 다른 인물임), 나대용함, 이억기함

◇SS-2: 손원일함, 정지함, 안중근함, 김좌진함, 윤봉길함, 유관순함, 홍범도함, 이범석함, 신돌석함

◇SS-3: 도산 안창호함, 안무함

잠수함 이름으로 환생한 독립운동 공헌 인물 중 대다수가 항일 무장투쟁에 종사했던 것으로 알려진 인물들이다. 그렇다면 해군에 묻는다. 홍범도·김좌진이 어떤 인물인지 알고 계신가? 상관 구타 탈영병 출신 홍범도가 지휘했다는 봉오동 승리, 무장 강도 출신 김좌진이 지휘했다는 청산리대첩의 전과는 너무 심하게 뻥튀기되어 현재 가혹한 재평가에 직면해 있다.

항일투쟁가 신돌석의 이름을 딴 해군 잠수함 신돌석함. 사료를 정밀 추적하면 신돌석의 항일투쟁 내용은 거의 대부분 가짜로 밝혀졌다.
항일투쟁가 신돌석의 이름을 딴 해군 잠수함 신돌석함. 사료를 정밀 추적하면 신돌석의 항일투쟁 내용은 거의 대부분 가짜로 밝혀졌다.

홍범도는 이동휘의 감언이설에 속아 자유시로 유인된 한인 무장 독립군을 몰살시키는 적군 편에 가담했고, 그 공로로 레닌에게 권총과 군복, 거액의 하사금을 받았으며 소련공산당에 입당하여 공산당원이 된 인물이다. 김좌진은 만주에서 한인 교민 괴롭히는 ‘만주벌의 마왕’으로 군림하다가 암살당한 사실을 해군 함명 선정위원회 담당자들은 알고 계시는지 궁금하다.

신돌석은 더 황당하다. 그는 19세에 의병을 일으켜 독립전쟁사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 펼쳤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1907년 3만의 의병을 거느리고 강원·경기도까지 세력을 뻗쳤다고 하는데, 알고 보니 그의 휘하 병력은 아무리 긁어모아도 300여 명에 불과했다.

그의 실제 행적과 투쟁 경력을 사료를 통해 들여다보면 충격과 경악 그 자체다. 경상북도 관찰사 박중양의 보고에 의하면 신돌석은 주색과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한 인물이다. 빈궁에서 벗어나기 위해 화적떼 수괴가 되었다가 시국이 혼란한 틈을 타 의병을 참칭한 것으로 추정된다. 얼마 후 신돌석은 옛 부하에게 맞아 죽었다. 이런 인물에게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했다.

이런 사람들의 무장투쟁으로 세계 3강으로 평가되던 일제의 군사력을 타도하고 독립을 쟁취했나? 잠수함 명칭에 외교 독립에 앞장선 인물들은 철저히 배제한 이유는 무엇일까? 

#. 사대 모화사상의 주인공 세종과 영조

한국인들이 그저 그런 ‘왕’이 아니라 ‘대왕’으로 우러르는 조선의 3대 국왕이 세종·영조·정조다. 세 명 중 두 명이 이지스함 명칭으로 부활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대왕’으로 추앙받는 군주들의 공통점은 중국에 극진히 사대하고, 나라 자체를 중화 조국으로 변모시키기 위해 안달했던 분들이란 점이다.

이영훈 교수의 저서 『세종은 과연 명군인가』에 의하면 세종은 한반도에 거주해 온 인종들에게 사대주의 모화사상이란 지울 수 없는 정신적 얼룩과 신분제라는 가혹한 족쇄를 채워버린 존재다. 1430년, 조선의 성군 세종은 하늘에 대한 제사(天祭)를 폐지했다. 하늘을 대신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천자(天子)의 고유 행사인 천제를 폐지함으로써 조선 국왕은 중국 천자가 임명하는 제후 신분임을 만천하에 공포했다. 지구상 존재했던 가장 악랄하고 잔인무도한 조선의 노비제와 기생제가 성군 세종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영·정조 시대를 조선의 황금기니, 한국사의 르네상스라고 붕붕 띄우는 식자들이 많이 계신다. 알고 보니 황금기는 무슨 개뿔,  언급하기조차 민망한 일들이 수없이 벌어졌다. 이미 멸망하여 지구상에서 사라진 중국 명나라 황제에게 제사를 올리기 위해 대보단을 지은  국왕은 숙종이었다. 그런데 대보단을 거창하게 중건하고 제사 대상을 명나라 초대 황제 홍무제, 마지막 황제 숭정제로 확대한 국왕은 영조였다.

이 무렵까지 조선 지배층은 중국은 중화로 떠받들어 모시고, 자기들은 그 하위 개념인 소중화로 자리매김했다. 그런데 중화로 떠받들던 명나라가 여진족 오랑캐가 세운 청나라에 망해 소멸되었다. 조선 지배층은 자신들의 뇌수, 영혼, 하늘이나 다름없던 명나라의 멸망으로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천붕지괴 (天崩地壞)의 충격에 빠졌다. 간신히 정신을 수습한 그들은 중화의 법통이 여진족 오랑캐 청나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예의를 아는 조선으로 전수되었다는 황당한 논리를 개발해 냈다. 얼마 후에는 자신들이 곧 중화가 되었다는 착각과 망상에 빠졌다. 그것을 온몸으로 보여준 이가 영조 임금이다. 

영조는 1751년 “해동(조선)의 한 모퉁이에 명나라가 존재하고 있다”라고 발언하는가 하면, 1764년에는 “황조의 일월, 우리 동국(조선)이 명나라다(皇朝日月, 我東大明)”라는 글을 인쇄하여 신하들에게 나눠주었다. 드디어 조선이 명나라, 곧 중화가 되었음을 만천하에 선언한 것이다.

#. 정조가 진짜 계몽 군주 맞아?

정조가 계몽 군주였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많다. 그의 재임 기간에 실학파와 북학파 등 여러 학파의 장점을 수용하여 문화정치를 완성하고 학문 부흥을 이끈 위대한 군주였으니 ‘대왕’이란 호칭도 부족하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는 학자들도 계신다.

그런 주장을 반박하기에 앞서 정조가 탕평책을 무기로 붕당을 싸잡아 박살 낸 후 무소불위의 절대군주로 군림한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  정조는 자신이 군사(君師, 임금이 최고의 스승이라는 뜻)나 성인(聖人)을 자처한 것도 모자라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 만 갈래 강을 비추는 달의 주인 되는 늙은이란 뜻)’라는 글을 지어 자신이 태극이자 조화옹(造化翁, 태초에 우주의 만물을 만든 신이란 뜻)으로서 하늘(天) 또는 상제(上帝)임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김성윤, 「영·정조 시대(18세기)는 한국사의 르네상스였는가」, 일조각, 『한국사 시민강좌』, Vol.40, 2007).

글줄이나 좀 읽어 알량한 주자성리학 지식으로 철갑을 두른 정조는 희대의 지식 독재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신하들이 어떤 문제를 제기하다가도 정조가 금령(禁令)을 내리면 무조건 중지해야 했다. 다시 거론했다간 의견의 타당성 여부와 상관없이 금령 위반으로 처벌당하게 되었으니까.절대군주로서의 위상을 강화한 정조는 죽기 직전 자신의 후사를 위해 세력가 안동 김씨 집안과 결탁한다. 그 결과 조선 후기를 말아먹은 세도정치의 서막을 연 사람이 정조다.

문화정치를 편 계몽군주로 알려진 정조는 사실은 서양 서적을 불태우고 학문의 자유를 봉쇄한 독재자였다.
항일투쟁가 신돌석의 이름을 딴 해군 잠수함 신돌석함. 사료를 정밀 추적하면 신돌석의 항일투쟁 내용은 거의 대부분 가짜로 밝혀졌다.

#. 서양 서적 불태우고 학문의 자유 억압한 정조

정조가 학문 부흥은커녕 주자성리학 이외의 모든 서양 학문을 이단으로 규정하여 탄압한 인물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도 드물다. 그는 취임 초만 해도 우문정치(右文政治)’를 표방하면서 중국을 통해 신학문 서적, 서학 서적을 열심히 수입했다. 정조가 진심으로 서양을 배우기 위해 이런 노력을 했을까? 아니다. 그는 정학(正學, 즉 성리학)을 강화하면 사학(邪學, 즉 서학)은 저절로 무너질 것이라는 생각에서 이를 추진한 것이다.

천주교(서학)가 점차 확산 일로를 걷자 정조는 천주교 이것이 정치적으로 이용되지 못하도록 극단적 방식으로 대처했다. 1786년 정월, 정조는 앞으로 중국에서 요망한 서양 서적 수입을 금하고, 중국인과 학문 교류도 금지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그 결과 중국 사람들과 개인적 왕래 금지, 필담 금지, 선물 및 편지 왕래를 금지시켰고, 중국으로 간 사신들이 이따위 괘씸한 짓을 하다 적발되면 조선으로 압송하여 곤장을 치고, 상관도 연좌죄를 적용해 처벌하도록 했다.

급기야 1791년 11월 12일 홍문관 관리 윤광보가 “홍문관에 보관 중인 서양 책들을 큰 거리에 나가 태워버려야 한다”라고 상소하자 정조는 “멀리까지 내갈 것도 없다. 즉시 홍문관에서 태워버리라”라는 어명을 내렸다. 그 결과 궁중 도서관에 소장돼 있던 서양 서적이 모조리 화형당했다(노대환, 「정조와 서학」, 2017년도 장서각 아카데미 왕실 문화강좌).

1791년 12월에 강화의 외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던 서양 서적 중 정조의 소각 명령에 의해 불태워진 서학서는 총 27종이다. 학자들 연구에 의하면 17~18세기 조선에 유입된 서학 서적은 180여 종에 이른다. 그런데 1908년 작성된 홍문관 도서 목록에 서학서 이름이 한 건도 발견되지 않는다. 홍문관에 소장되어 있던 서학서를 정조가 모두 불태워버렸기 때문이다(노대환, 「정조와 서학」, 2017년도 장서각 아카데미 왕실 문화강좌).

내친김에 정조는 요망한 이단 서적을 수입하는 자들의 적발에 실패한 의주 부윤을 처벌하는 규정을 신설했고, 성리학적 기강을 문란케 하는 모든 학문 서적을 금지시켰다. 이로써 조선 땅에서 공식적으로 학문의 자유가 사라졌다.

우리는 이런 일을 자행한 군주를 ‘대왕’으로 우러르는 것도 모자라 전쟁 때 나라의 운명을 가름할 최첨단 이지스 구축함 이름으로 채택하여 길이길이 추앙하고 있다.

#. 정부가 앞장서서 봉건 조선으로의 회귀 추진

현재 광화문 앞에서는 가림막을 친 채 의정부 및 6조 거리 복원이 한창이다. 이로써 대한민국 상징 거리인 세종로는 경복궁, 광화문, 의정부, 6조,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이 점령했고, 문화회관 이름마저 ‘세종’으로 도배질 되어 있다. 사용하는 지폐에는 율곡 이이(1천 원권), 퇴계 이황(5천 원권), 세종대왕(1만 원권), 신사임당(5만 원권) 등 조선 시대 인물이 장악하고 있다.

광화문 앞에서 복원공사가 한창인 의정부. 이로써 대한민국 상징거리인 세종로는 조선시대 인물과 관료기구가 점령하게 되었다.
광화문 앞에서 복원공사가 한창인 의정부. 이로써 대한민국 상징거리인 세종로는 조선시대 인물과 관료기구가 점령하게 되었다.

오랜 세월 논란 끝에 김영삼 정부 시절 조선총독부 건물을 폭파 철거한 후 경복궁을 복원했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불타 폐허가 된 궁전을 흥선대원군이 임란 이전보다 더 크고 웅장하게 재건한 것이다. 참으로 미안하고 안된 이야기지만, 경복궁은 조선이 그토록 흠모했던 중국의 예법인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를 철저히 준수하여 지어졌다. 까놓고 말하면 중국식 건물이란 뜻이다.

대원군은 백성들 고혈을 빨고 강제 노역을 시켜 중건 공사를 강행했는데, 그것도 모자라자 1866년 12월부터 1867년 6월까지 6개월 동안 무려 1,600만 냥의 당백전을 발행했다. 그전까지 189년 동안 정부가 발행한 상평통보 공급량과 같은 액수를 6개월 만에 쏟아낸 것이다. 당백전의 대량 발행으로 조선의 화폐 총재고는 1867년 6월 말, 두 배로 폭증했다.

당백전의 명목가치는 상평통보의 100배였으나, 실질 가치는 상평통보의 5~6배에 불과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악화(惡貨)였다는 뜻이다. 그 결과 2년 동안 쌀값이 무려 600%나 치솟아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원유한, 『한국화폐사: 고대부터 대한제국 시대까지』, 한국은행, 2006, 190쪽).

인플레 만연으로 백성들이 죽어나든 말든 화폐 발행으로 인한 주전 차익은 국왕과 왕실, 조정이 독점했다. 악화의 표본인 당백전의 대량 공급으로 온갖 모순이 폭발하자 조정은 6개월 만에 주조를 중단했다.

대한제국 정부의 화폐 관리 실패는 1905년 일본이 화폐 주권을 탈취하도록 만드는 기폭제가 되었다. 악화 발행으로 인한 극심한 물가상승, 그 결과물인 경제 위기가 도래하지 않았다면 일본의 한국 지배가 그토록 손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일본의 지배 이전에 조선왕조는 화폐 발행 독점에 따른 위기가 중첩되면서 스스로 붕괴한 것이다(전용덕, 『신분제와 자본주의 이전 사회』, 태학사, 2017, 267쪽). 나라 멸망의  기폭제가 경복궁인데, 우리는 그것을 '조선의 얼'이자 상징으로 애지중지하기 위해 날이면 날마다 복원공사, 중건공사, 제모습 찾기에 미쳐 있다.  

#. 대한민국 지워내고, 봉건 조선으로 회귀하려는 문화 쿠데타

세종·영조·정조를 붕붕 띄우는 이유는 명쾌하다. 조선의 찬란한 문화유산을 고종 황제께서 이어받아 광무개혁이라는 자생적 근대화(혹은 내재적 발전론)를 추구하고 있었는데, 그 결실을 맺기도 전에 일제가 침략하여 타율적 근대화를 강제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온갖 모순이 폭발하게 되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다.

즉, 세종·영조·정조·고종을 추앙하는 근저는 주자성리학 고수 및 위정척사·쇄국으로 이어지는 봉건 질서의 수호를 위한 몸부림이란 뜻이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이러한 가치관과는 대척점에 서 있는 세력, 즉 개혁·개화·개방·통상을 통해 근대국가를 창출하려는 사람들의 노력의 총체적 결실이었다.

대한민국은 조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나라다. 개인의 자유, 사유재산의 보호, 법치가 헌법으로 보장된 근대국가다. 그런 근대국가는 주자성리학자들이 보기엔 대륙문명 중화사상과 탯줄을 끊고 해양문명과 손잡는다며 미국, 일본과 동맹을 맺었으니 참으로 몹쓸 짓을 한 것이 된다. 조선으로 회귀하려는 자들의 철학은 상것들 공짜로 부려먹고 약탈하고 겁탈하는 것이 제도화 된 나라, 양반의, 양반에 의한, 양반을 위한 주자성리학적 왕도정치의 나라, 법치가 아닌 덕치의 나라다. 그런 나라야말로  양반 선비의 고결한 얼과 정신과 문명이 빛나는 나라다.  

대한민국을 이끄는 자들은 누구인가. 사법고시, 행정고시 패스한 관료들 아닌가. 조선시대로 말하면 과거급제자들이다. 이런 급제자들이 국가 예산 퍼부어 중인환시리에 근대국가 대한민국을 총력을 다해 지워내는 문화 쿠데타를 자행하고 있다. 이것이 정부 부처 담당자들의 가치관 부재, 우연의 일치로 나타난 기현상일까? 범정부적 차원에서 일사불란하게 조직적으로 자행되는 모습을 보면 뭔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종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길한 예감을 지우기 힘들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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