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우섭 객원 칼럼니스트
황우섭 객원 칼럼니스트

언론에서 블랙리스트(blacklist)는 존재 그 자체로 언론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위협요소이다. 더구나 정치적 좌우 진영을 구분하여 이익과 불이익을 준 언론 블랙리스트는 헌법에 명시된 자유권과 평등권을 침해했다는 면에서 심각한 위헌행위이다. 지난 문재인 정부 시절 KBS, MBC, YTN, 연합뉴스 등 주요 공영미디어에서는 블랙리스트에 의해 ‘인사상 불이익과 인격침해’가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어 충격을 주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드러난 공영미디어 블랙리스트는 아주 일부에 불과하다고 본다. 공영미디어에서 일어난 역대급 블랙리스트는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리스트일 것이다. 필자는 공영미디어 블랙리스트가 미디어 거버넌스의 행위자들이 역할을 나누어 유기적으로 협조하며 업무를 수행한 결과로 발생했기 때문에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문재인 정부 ‘적폐청산’ 리스트야말로 ‘역대급 블랙리스트’

최근 KBS, MBC, YTN, 연합뉴스 등 공영미디어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지난 문재인 정부에서 발생한 블랙리스트들을 공개하여 이슈가 되고 있다. 공영미디어에서 자신들과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파업 참여자와 불참자를 선과 악으로 나누고 한쪽 집단은 이익을, 다른 한쪽 집단은 불이익을 준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매우 중대한 사태다. 민주노총 산하 언론노조의 파업에 불참하고 묵묵히 일했다는 이유로 보직을 박탈당하고, 고유 방송업무에서 배제되고 차별을 받았다. 이로 인해 수많은 공영미디어인들이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2018년 6월 해고된 이창섭 전 연합뉴스 편집국장은 “연합뉴스에서 외부세력과 민노총 산하 언론노조가 조성부 사장과 이병로 부사장에게 ‘왜 이창섭을 안짜르느냐’며 압력을 넣었고, 노조에서 징계 대상을 정해 전달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처럼 문재인 정부에서 일어난 공영미디어 블랙리스트는 계속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현재 드러난 공영미디어 블랙리스트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수 있다.

필자는 우리나라 역대급 블랙리스트 중의 하나가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리스트라고 생각한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은 ‘정치보복’의 다른 이름이었다. 문재인 정부는 ‘100대 국정과제’ 중에서 “적폐의 철저하고 완전한 청산”를 국정과제 1호로 추진했다. 이러한 기조에 따라 더불어민주당은 문재인 정부 최우선 국정과제인 적폐청산을 뒷받침하기 위해 2017년 8월 14일 당 적폐청산위원회(박범계 위원장)를 출범시켰다. 행정부에서는 국가정보원을 필두로 법무부, 외교부, 문화체육부, 교육부, 고용노동부 등에서 관련 적폐청산 기구들이 설치되었다. 이 시기 공영미디어계에서도 KBS진실과미래위원회(이하 KBS진미위), MBC정상화위원회, 연합뉴스혁신위원회, YTN미래발전위원회 등 적폐청산을 위한 진상조사위원회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만들어졌다. 문재인 정부의 지시에 의해 충분한 검토 없이 과제를 추진하면서 공영미디어 적폐청산 기구들의 위법사실이 상당 수 드러나고 있다.

KBS진미위의 교훈, 거버넌스 행위자 모두가 처벌 대상이 되어야

공영미디어 블랙리스트의 문제점은 KBS진미위 사태를 살펴보면 동 시기에 설치되었던 적폐청산 기구들의 문제점도 유추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지난 2018년 설치된 KBS진미위는 조사받은 내용을 외부에 발설하면 처벌받는다는 독소조항이 있고, KBS진미위는 다른 어떤 규정보다 우선한다는 조항이 있는 등 사내에서 ‘계엄사령부’ 같은 역할을 했다. 후배기자가 선배기자를 불러 조사하는 상황이어서 마치 ‘인민위원회’ 같은 기능도 하면서 직장을 공포 분위기로 몰아넣었고, 언론인 탄압과 언론자유를 억압하는 기구가 되었다. KBS진미위 징계건의를 통해 전 정권(이명박, 박근혜) 시절의 보직간부 17명이 해임 정직 감봉 등의 징계를 받았다. KBS진미위 의결안건이 ‘보도본부 편성규약 위반 등 직장질서 문란에 관한 사항’를 포함하여 22건이나 되었으니 얼마나 많은 직원들이 조사를 받았는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KBS진미위 징계 건의를 받지 않았더라도 조사과정에서 상당한 인권침해가 있었고, 본연의 업무에서 배제된 직원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헌법상 ‘과잉금지의 원칙’을 들지 않더라도 기본권을 심각하게 침해한 블랙리스트 사건이다.

<KBS진미위 설치 및 운영규정>은 2018년 5월 30일 제910차 KBS 정기이사회에서 양승동 사장이 안건을 제출해서 논의했고, 이어 6월 5일 제911차 KBS 임시이사회에서 의결되었다. 당시 의사록을 살펴보면 KBS진미위 운영규정 의결을 위한 표결에서 11명의 이사 중 다수이사 7명(당시 여당 더불어민주당 추천)만 찬성했고, 소수이사 4명(당시 야당 자유한국당 추천) 중에서 1명은 불출석했고, 3명은 의안에 강력하게 반대한다는 의사표시로 집단 퇴장했다. 안건 논의과정에서 전홍구 KBS 감사는 “KBS진미위 운영규정이 감사의 독립성을 침해했다”는 등의 의견을 제출했다고 했다. KBS진미위 운영규정은 다수결에 의해 의결되었지만, 소수이사 노동조합 시민단체 등의 동의를 받지 못해 절차적 정당성이 결여되어 있다.

2018년 9월부터 KBS 이사로 활동한 필자는 KBS진미위 사태를 매우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고, 그해 9월 28일 제918차 정기이사회에서 “KBS진미위 운영실적 및 현안보고” 안건을 발의하여 보고받으면서 KBS진미위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KBS진미위 운영규정은 <공공감사에 관한 법률>과 <방송법>에 규정된 감사의 독립성을 위배했고, <KBS사규>에는 2년으로 돼 있는 징계시효를 KBS진미위는 10년으로 확대했는데, 취업규칙의 불이익 변경사항은 과반노조 혹은 근로자 과반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데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근로기준법> 위반소지가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소수이사, 노동조합, 시민단체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KBS진미위 조사활동은 계속되었다. 그 후 양등동 사장은 KBS진미위 활동을 종료하면서 2019년 6월 19일 제941차 KBS 임시이사회에서 “진미위 활동결과 보고안건”을 제출했다. 통상 KBS이사회에서 집행부의 보고안건은 전체 이사들의 합의로 ‘청취접수’하는 것이 관례다. 그러나 이날 이사회에서 소수이사들(황우섭, 서재석, 천영식)은 KBS진미위 활동의 불법성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보고안건’의 ‘청취접수’를 반대했다.

KBS진미위와 관련하여 KBS공영노동조합이 서울 남부지법에 ‘KBS진미위 규정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냈고, 법원에서는 가처분을 인용했다. 이어 KBS공영노동조합은 양승동 사장을 <근로기준법> 위반 혐의로 고발하여, 양 사장은 2심에서 벌금 300만원을 선고받았다. 소위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정치보복을 감행했던 KBS진미위 운영규정의 절차적 정당성이 결여되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문제는 KBS진미위와 관련된 거번넌스 주요 행위자들인 안건 제출자인 양승동 사장, 운영규정을 의결해준 7명의 다수이사들, 업무를 총괄한 위원장(정필모 당시 부사장, 현재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등 모두가 KBS진미위 운영규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제기된 후에도 적폐청산을 강행한 점에 주목한다. 정상적인 공영미디어 거버넌스라면 견제와 균형에 의거하여 최적의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공영미디어 블랙리스트는 정권, 민노총 산하 언론노조, 거버넌스 주요 행위자들이 연대해서 적폐청산 작업을 추진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따라서 공영미디어 블랙리스트에 영향력을 행사한 거버넌스 행위자 모두가 처벌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국가 차원의 진실규명과 불법 행위자에게 합당한 책임을 지도록 해야

공영미디어 정상화를 위해 블랙리스트 사태는 신속하게 청산되어야 한다. 이번 공영미디어 블랙리스트 사건은 추진과정에서 자료가 많이 남아있어 비교적 쉽게 진상을 조사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과 관련한 위원회 활동은 대부분 1년 안팎이었다. 이러한 활동기간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각 위원회들은 각 기관 홈페이지와 언론 등을 통해서 위원회의 조사내용을 수시로 공표해서 국민들의 동의를 구하려고 했다. 그리고 활동이 종료된 이후에는 백서(白書)를 발간하여 ‘적폐청산’의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했다고 판단된다. 노동법에서는 ‘블랙리스트’를 ‘부당노동행위’로 처벌하고 공직자의 경우 ‘직권남용’ 등으로 처벌하는 중요한 범죄에 해당한다. 현재 KBS노조, KBS직원연대, MBC노조, YTN방송노조, 연합뉴스 등에 종사하는 자유 언론인들이 공영미디어 블랙리스트에 대해 관련 책임자에 대한 감사 및 법적 조치를 취하며 진실규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필자는 공영미디어 정상화를 위해 지난 문재인 정권의 공영미디어 블랙리스트에 대해서는 국가 차원에서 실체적 진실을 규명해야 하고, 불법 행위자 모두에게 합당한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황우섭 객원칼럼니스트 (미디어연대 상임대표, 전 KBS 이사, mirific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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