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8년 9월 18일 오후 평양대극장에서 열린 삼지연 관현악단 환영 예술공연 관람 중 대화하고 있다. (사진=평양사진공동취재단)

부차, 마리우폴, 이르핀, 디메르카 등 우크라이나 주요 도시에서 어린이들을 포함한 민간인 희생자의 시신들이 계속 확인되고 있다. 러시아군이 자녀들 앞에서 여성들을 성폭행하고 살해하는가 하면, 여성의 시신에 나치 문양 모양의 화상 자국을 남기는 일도 벌어졌다. 민간인의 팔다리를 자르고 목을 베는 끔찍한 일들도 벌어졌다.

민간인 고문·살해 등 대학살의 잔혹상이 알려지면서 국제사회가 강경한 대응에 나서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G7 및 유럽연합과 함께 푸틴의 고통을 가중하고 러시아의 경제적 고립을 심화시킬 추가적인 제재를 밝히는가 하면, '푸틴은 전범'이라며 ICC 제소를 추진하고 있다. 이에 따라 러시아 최대 국책은행인 스베르방크와 최대 민간은행인 알파뱅크가 금융 시스템에서 전면 차단된다. 미 국무부는 검사와 수사 전문가로 구성된 특별 조사팀을 우크라이나에 파견할 예정이다.

미국과 영국의 주도로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러시아가 사실상 퇴출당했다. 또한 유럽연합 국가들은 러시아 외교관 추방에 나섰다. 발트 3국 중 하나인 리투아니아는 자국 주재 러시아 대사를 전격 추방했고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덴마크, 스웨덴 등에서 근무하던 러시아 외교관들이 쫓겨나고 있다.

러시아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비난이 증가하고 미국 등 서방이 그 책임을 묻는 조치에 나서면서 친 러시아 외교정책을 주도했던 메르켈 전 독일 총리와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의 책임론도 확산되고 있다. 14년 전인 2008년 4월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나토 정상 회의에서 메르켈과 사르코지의 반대로 우크라이나와 조지아의 나토 가입이 확정되지 못했다. 당시 푸틴은 서방의 소극적 자세를 확신하고 2008년 8월 조지아를 침공하여 친러 분리주의 지역을 합병하는가 하면, 이후 더 과감해지고 공격적으로 변해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러시아에 대한 독일의 에너지와 경제 의존도가 높아져 유럽이 러시아를 제대로 견제할 수 없는 상황을 방치한 책임도 불거지고 있다.

마테우시 폴란드 총리는 "러시아 제재를 강화하는 데 독일이 걸림돌이 되어왔다"라며 러시아산 원유와 천연가스의 전면적 금수 조치에 사실상 반대해 온 독일을 꼬집는가 하면,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을 향해서는 "히틀러와 스탈린, 폴포트 같은 독재들과도 협상할 것인가"라고 비난했다.

이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보며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와 히틀러 간에 체결된 '뮌헨 협정'이 2차 세계대전의 대학살로 연결된 비극이 스쳐 간다.

1938년 9월 체임벌린 영국 총리는 뮌헨에서 독일의 히틀러 총통, 프랑스의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 총리와 함께 '뮌헨 협정'에 서명했다. 히틀러가 요구한 주데텐란드를 독일이 병합하는 데 동의한다는 내용이었다. 굴욕적인 양보와 신생국의 희생이 담긴 '뮌헨 협정'에 서명하고 런던에 도착한 체임벌린은 “영국 총리가 독일에서 명예로운 평화를 들고 돌아왔습니다. 나는 이것이 우리 시대의 평화라고 믿습니다”라고 말했다. 히틀러의 전쟁 위협이 사라진 것으로 착각한 영국 국민들은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켰다"라며 체임벌린의 귀환을 열광적으로 환호했다.

하지만 히틀러의 '위장된 평화 공세'는 얼마 가지 않았다. 다음 해 3월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 전역을 점령했고, 9월 폴란드를 침공해 2차 세계대전의 불을 댕겼다. 발톱을 숨기고 군사력을 다 갖출 때까지 평화 공세를 연기했던 히틀러는 자신의 기만전술에 속은 체임벌린을 농락하며 2차 세계대전의 비극을 자행했다. 체임벌린이 억지력 행사를 포기하는 바람에 히틀러의 오판과 자만을 부르고 결국 세계대전의 대재앙을 불러온 것이다.

우리도 그런 위기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2018년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은 공동 서명한 '판문점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에서 북한 핵 폐기는 사실상 형해화 되고, 문재인 대통령은 김정은을 평화와 개혁의 지도자로 부각시켰다.

당시 '도보다리 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김정은과 44분간 단독 회담을 하며 김정은에게 USB를 전달했다.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이 언론에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당시 언론이 전문가를 통해 두 사람의 입 모양을 분석한 결과,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에게 "발전소 문제…."라고 말한 것으로 파악됐다. USB에 담긴 내용이 무엇인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군사정보가 전달됐다는 의혹이 있는가 하면, 원전 설계도나 원전 발전소 설립에 관한 내용이 포함됐다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2019년 6월 문재인 대통령은 연합뉴스 및 세계 6대 통신사와의 가진 합동 서면 인터뷰에서 "핵 대신 경제발전을 선택해서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겠다는 것이 김정은 위원장의 분명한 의지이다"라며 김정은의 '위장된 비핵화' 의지를 추켜세웠다. 2021년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도 "김정은 위원장의 비핵화 의지가 분명히 있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앞서 김정은은 노동당 8차 당대회를 기념하는 열병식을 통해 신형 잠수함 탄도미사일로 추정되는 무기를 공개하여 '강력한 군사력'을 과시하며 핵잠수함과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고도화, 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 초대형 핵탄두 생산, 극초음속 무기 개발, 군사 정찰위성 운영, 정밀 무인정찰기 개발 등 핵과 미사일 등 첨단 장비와 무기체계 개발 계획을 천명했다. 2022년이 시작되자마자 북한은 극초음속 미사일 및 탄도미사일 발사 등 공격적인 군사적 도발을 감행하는가 하면, 조만간 핵실험을 예고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평화 공세가 허구이자 파탄 났음을 북한이 증명하고 있다.

2001년 김대중은 대통령 재임 시절 “북한은 핵을 개발한 적도 없고, 개발할 능력도 없다. 그래서 우리의 대북 지원금이 핵개발로 악용된다는 얘기는 터무니없는 유언비어다. 북한이 핵을 개발하면 내가 책임지겠다"라며 북한의 핵개발을 부인했다. 당시 미국과 IAEA에서는 북한 핵개발의 증거를 확인하였다.

2003년 노무현은 “북한 핵문제는 시간이 걸리리라 생각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평화적으로 해결된다고 생각한다. 북한도 체제 안정과 경제적 지원을 보장하면 핵무기를 포기할 의사를 확실히 가지고 있다”라고 했다. 2004년 11월 LA에서는 “북한의 핵 주장은 일리 있는 측면이 있다고 본다"라며 국군통수권자가 적국에 동조하는 발언도 했다.

김대중 정부의 대북 유화책은 문재인 정부로 이어져 북한을 대담하게 만들었고, 결국 김씨 왕조의 핵개발을 돕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바람 앞에 촛불'과 같은 위기 상황이다.

평화를 협상만으로 얻을 수 있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침략자에 맞설 강력한 군사력과 대응 의지가 확보되지 않는 '환상의 평화주의'는 더 큰 불행을 자초하게 된다.

적의 도발을 분쇄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와 능력이 약화되면 적은 더 대담해지고 오만해지며, 적의 술책과 도발은 더 강해진다. 독재자에게 유약하게 보이는 순간 대한민국의 안보는 한순간 무너진다.

평양의 독재 세력에 호응하며 독재자에게 평화를 구걸하는 정치 사냥꾼들이 우리 내에 상존하는 한 국가안보는 늘 불안한 상황이기에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강력한 억제력을 구사하고 투쟁하지 않을 수 없다.

허현준 前 청와대 행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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