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문근찬 교수]자신의 작은 능력으로 참과 거짓을 다 안다고 하지 말라 - 몽테뉴의 에세 27장을 읽고
[기고/문근찬 교수]자신의 작은 능력으로 참과 거짓을 다 안다고 하지 말라 - 몽테뉴의 에세 27장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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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김정은 환히 웃는 모습만 부각...그의 '정체성'은?
민족이란 감상적 개념이 헌법 가치 훼손할까 우려돼
자유주의 체제 작동 원리 모르면 사회에 기생하는 존재
문근찬 숭실사이버대학교 교수
문근찬 숭실사이버대학교 교수

언젠가 동기 모임 대화방에 한 친구가 시국 문제에 한마디 하겠다며 “지금 세상에 좌익이 어디 있나? 또 있다고 치고, 좌익이 장악한 중국이나 베트남이 못 사는 것도 아니지 않나?”라는 취지의 주장을 해서 잠시 멍해졌던 기억이 있다. 소위 지식인 위치에 있는 사람도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싶어 더 인상이 깊었던 것 같다.

그의 말은 지금 세상에 무슨 철 지난 색깔론이냐는 것인데, 오늘날 한국이 겪고 있는 혼란이 바로 이런 식의 자유의 가치를 잊은 듯한 태도와 관련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판문점에서 남북 회담이 열린 후 언론에는 김정은의 환히 웃는 얼굴만 부각하고, 그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그들과의 약속이라는 것이 과거 어떤 결과를 가져왔었는지 불문하고 온통 평화의 희망을 전하고 있다.

그들과의 약속이 성공적으로 이행되려면 여러 단계의 독립적인 사항들, 예를 들면 핵을 포기할 마음이 있는가, 장거리 미사일만 포기인가, 단거리 미사일 포기인가, 숨길 가능성은 없는가, 즉시 다시 만들 가능성은 없는가 등 수많은 사항이 모두 성공적이어야 하는데, 그들과의 약속에 대한 과거의 아픈 경험을 억지로 잊어버린다 하더라도 이는 베르누이 법칙상 참으로 가능성이 낮은 희망이다.

그럼에도 또다시 국민의 재산권에 영향을 미칠 대북 지원정책 이야기가 먼저 나오는 것도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국민의 자유를 지킨다는 자유주의 국가의 헌법 정신은 국가가 국민의 재산을 지킨다는 의미가 중요한데, 민족이라는 감상적 개념을 앞세워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가 훼손될까 두렵다. 우리가 그들과의 협상에 신중해야 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후술하듯이 몽테뉴가 450여 년 전에 한 말이지만 우리는 너무나 중요한 일에 스스로 이성의 능력을 과신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아닌지 걱정되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천부적 인권과 개인의 자유를 누리며 살다 보면 자유의 소중함을 잊고 그것이 그냥 언제나 주어지는 것 같은 착각이 생기는가 보다. 나는 정치 체제에 대해 잘 모르지만, 중국이나 베트남은 좌익 혁명세력이 전쟁과 숙청으로 셀 수 없는 인명을 죽이고 나라를 접수한 후 전 국토를 자신들의 봉토인 것처럼 다스리는 나라로 알고 있다. 전쟁이 지났다고 이런 나라가 근대적 자유주의 국가가 되는 것은 아니고, 국가 위에 혁명 세력들의 공산당이 자리 잡고 일당 독재를 하는 비 정상적인 나라일 뿐이다.

예전에 등소평은 흑묘백모론을 내세워,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인민을 잘 살게 하면 된다며 개방을 한 후 자본주의 경제를 대폭 수용했다. 사람들은 중국의 개방 정책을 높이 평가하지만, 이는 혁명 세력에 반항만 하지 않으면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아무래도 좋다는 소리를 한 것이었다. 그런 정책을 실용주의니 뭐니 포장을 해도 그의 말은 자신들이 민중을 위해 혁명했다는 것이 그저 명분일 뿐, 실제 목적은 오직 권력욕이었음을 고백한 셈이다. 마치 헌금만 꼬박꼬박 내면 예수님을 믿든 안 믿든 상관없다고 말하는 성직자처럼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중국이나 베트남이 개방 후 시행하는 자본주의는 자유주의 체제 국가의 시장경제 자본주의와는 다르다. 좌익 혁명세력이 접수한 나라의 국민은 근대국가의 시민이 아니라 혁명 세력이 시혜를 베풀어 살아가는 前 근대적인 백성이므로, 중국이나 베트남의 기업은 혁명 주체인 공산당에 밉보이면 언제든지 경영권을 몰수 당할 수 있다. 회사를 키우는 것도 그 세력의 비호 하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짐작하는 이유는, 원래 좌익 혁명세력은 프롤레타리아 계층을 이용하여 혁명을 한 후 권력을 장악하고는 경직된 관료층을 내 세워 새로운 지배세력이 되고, 혁명의 배경이 된 프롤레타리아를 노예로 만드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중국을 대단한 나라로 보는 사람은 극소수 상위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나 관광객은 보면서, 그 사회의 저변에 있는 해외여행은 꿈도 못 꾸는 농노적 생활을 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중국이니 베트남이니 하면서 그들의 이념과 자유민주주의 가치가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말하지 말았으면 한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한국의 헌법적 가치의 핵심은 ‘자유’라는 단어 속에 있다. ‘민주’는 정치제도로서 모든 성인 유권자가 일인 일표의 투표로 대의원을 뽑아 의회를 구성하고, 의회는 다수결 원칙에 의해 국가 정책을 세워나가는 정치 제도의 측면이고, 자유는 개인이 근대국가의 시민으로서 자유로이 자신의 직업에 종사하면서 시장 활동에 참여하고 협력하면서 능력을 키워 사회에 공헌하는 것을 불가침의 가치로 추구하는 이념이다. 만약 사람들이 자유의 가치를 망각한 채로 민주제도만 중요한 것으로 여긴다면 그런 민주주의는 민중 민주주의로 퇴행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자유의 가치를 존중하지 않는 사회에서 정치권력을 잡으려면 정당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더 많은 표를 얻기 위해 포퓰리즘 정책으로 민중의 환심을 살 수밖에 없다.

지난 세월 한국의 정당들이 여야를 불문하고 모두 ‘경제민주화’ 경쟁을 폈던 것은 자유주의 가치보다는 표를 얻기 위해 대기업보다는 중소기업과 골목 상권을 위한다며 실제로는 사회주의 경제로 성큼성큼 이동한 것이었다. 자유 중 가장 실질적인 자유가 경제적 자유이고, 그런 체제만이 대기업을 비롯한 활기찬 경제를 만들고 개인의 자유를 책임질 양질의 일자리를 만드는 것인데, 경제민주화의 길은 말하자면 자유주의 경제를 북한식 장마당 경제로 퇴행하자는 방향인 셈이다. 그 결과, 오늘날 수많은 젊은이들이 대기업에 취직해 전 세계를 활보하며 성장할 기회는 사라지고 자영업을 창업한다며 거리에 내몰린 것 같아 안타깝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이 자유의 가치에서 멀어지면 남미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그런 민주주의는 선동적인 정치가와 결합하여 조만간 나라를 거덜 내는 자멸적 결과를 가져온다.

세계사에서 100여 년 전쯤 노동자가 연대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해야 한다고 선동하던 때가 있었다. 마르크스는 산업혁명을 겪으며 새로운 신분 계층으로 형성된 노동자가 착취 받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고향을 등지고 도시로 모여든 것은 그래도 그 편이 농촌에서의 생활보다는 나았고 장차 기회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산업혁명의 급격한 변화로 사회가 변화의 충격을 흡수하는 능력이 부족했을 뿐이었다. 유럽에서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계급혁명을 선동했던 때, 미국에서는 프레더릭 테일러가 제안한 과학적 관리법으로 생산성 혁명이 먼저 일어났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노동자에게 더 많은 보상이 돌아가면서 노동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동차도 사고 여가도 즐길 수 있는 중산층이 되었다. 오늘날 미국이 자유주의 세계의 리더가 된 데는 이렇게 생산성 혁명을 통해 계급 혁명의 선동을 이겨냈기 때문이다.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법은 자유주의 선두 주자인 미국뿐 아니라 한국과 같은 후발 국가가 급속히 산업화에 성공한 이유를 설명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한국의 수많은 경영자와 관리자 그룹은 과학적 관리법이 추구하는 과업 설계와 작업 분석을 배워서 선진국의 생산 공정과 생산성을 단 시간에 복제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이런 세월을 거쳐 세계적 수준의 산업 국가를 만든 세대들은 자부심을 가질 만하고 또 칭찬을 받을 만한데, 오늘날 한국 사회가 경제적 자유의 터전을 마련해 온 기업 경영자를 마구 대하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한국이 산업화에 매진하던 당시와 비교해 볼 때 오늘날의 노동자는 근육으로 일하는 육체노동자라기보다는 대부분 지식근로자, 즉 전문가들이다. 과거와 달리 지식근로자는 시키는 대로 일하는 처지가 아니라 자신의 분야에서는 일종의 리더 역할을 해야 한다. 한국은 고용에 관한 법률이 잘 정비되어 있으므로 산업혁명기처럼 열악한 작업환경이나 보수체계가 문제 되는 것도 아닌데도 노조가 점점 정치세력화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다시 근본 문제로 돌아와서 생각하자면 한국인 모두가 가치관을 확실히 해야 한다. 차라리 모두가 솔직하게 자신이 자유주의 헌법적 가치를 존중하는가, 아니면 반대로 혁명적, 계급투쟁적 가치를 옹호하는가를 솔직하게 표방하는 게 어떨까? 두 가치는 절대로 두루뭉술하게 합쳐질 수 없는 것이고 무슨 연방제 같은 것으로 엮을 수도 없는 상극의 이념이다. 지금 한국 사회는 이들 두 이념이 건곤일척의 벼랑에서 진검 승부를 펼치고 있는 형국이다. 이 와중에 문제를 모호하고 복잡하게 하는 사람들이 바로 중간의 회색 지대에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을 이른바 ‘중도’라며 양쪽 어디든 이해하는 편협하지 않은 사람인 양 양시양비론을 펼친다. 계급투쟁론적 가치관을 갖는 사람이야 과거 그 사람의 인생 이력으로 미루어 그러려니 짐작이라도 할 수 있지만, 중도주의자는 자유주의 체제의 혜택으로 교육도 많이 받고 사회적인 계층도 높은 축에 속한 사람이면서 이 사회를 발전시키고 성장시키는 데 공헌이 없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이들 중도주의자는 자신의 학력이나 사회적 지위 상 스스로 상당한 수준의 논리와 판단력을 갖고 있다고 자부한다. 따라서 서두에 예시한 사람처럼 이념적 문제에 그럴듯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다만 논리는 있으되 자유주의라는 한국 헌법의 가치에 대해서는 몰가치적이거나 중립적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은 분명히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이므로 경제 문제든 안보 문제든 우방이면서 같은 자유주의 이념을 갖고 있는 미국과 같은 쪽에 서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중도적인 지식인 중에는 우방인 미국이 자유를 위해 같은 편에서 피를 흘리며 싸웠던 혈맹이라는 근본 가치는 망각하고 오직 경제적·지정학적 이해관계 측면만을 말하며, 한국 사람이 어떻게 하든 미국은 그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한국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주둔시키는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더 나아가 반미를 해도 그들은 자국의 이해관계상 한국을 지킬 것이라거나, 혹은 당장은 미국이 패권국이니까 그쪽에 서야 하지만 언젠가 중국이 커지면 중국 쪽에 서야 한다는 소리도 한다. 참으로 배은망덕하고 몰가치적인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세상 일은 공짜가 없으므로 한국민의 그런 태도가 언젠가 큰 대가로 다가올 것이다. 한국은 이런 배운 무식쟁이가 많은 사회가 된 것일까? 그들은 한국을 중국이나 더 나아가 북한과 비슷한 체제가 되어도 사람들의 생활은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눈에는 세계 관광을 다니는 중국인 관광객만 보이고, 비교도 안 되는 많은 인민들이 농노처럼 묶여서 주거이전의 자유마저 못 누리고 있다는 사실과, 평양 시민 일부를 빼면 그야말로 빈민으로 굶주리면서도 주거 이전을 할 수 없는 북한 인민의 인권 문제, 수용소에 수감된 수많은 양심수들의 인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전공 과목을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들이 우리가 사는 자유주의 체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서 잘 모르고 그 자유가 어떻게 지켜지는지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이 사회에 공헌하는 것이 아니라 기생하는 헛똑똑이다.

16세기의 프랑스 작가이자 철학자인 몽테뉴의 수상록 27장은 바로 이런 헛똑똑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몽테뉴에 의하면 사물의 이치를 알게 해 주는 것은 잘난 체하는 이성이라기보다는 경험이요 관습이라면서, 이성은 무례하게도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여 신의 의지나 어머니 자연의 이치를 자신의 지력으로 다 안다는 자만심의 어리석음을 자주 범한다고 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종교전쟁의 대 혼란기였던 터라 신앙에 관한 자신의 사례를 들고 있는데, 이 부분이 오늘의 주제를 쓰게 된 실마리가 되었다. 몽테뉴는 젊은 시절에 성인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이라 해도 나름대로 해석하여 어떤 부분은 비판하여 안 믿고 어떤 부분은 믿는 식으로 참과 거짓의 경계를 자신의 판단에 따라 정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나중에 자신이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했던 계율이, 권위 있는 학자들에게 자문해본 결과 중요하고도 견고한 기반을 가진 부분이어서 그 계율은 다른 계율들보다 덜 존경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인 것은 오직 어리석음과 무지함 때문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신앙의 권위는 전적으로 복종하든지 아니면 완전히 떠나 버리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지, 그것에 어느 정도까지 복종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라 했다.

몽테뉴의 말을 우리 사회에 적용하면, 자유의 원리는 그대로 존중해야지 어디까지는 되고 어디까지는 안 되고를 정하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다. 몽테뉴의 이야기를 읽으며, 오늘날 한국 사회의 혼란을 생각하니, 그 이야기 속의 권위자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과 같은 사람이 자유주의에 관한 한 한국에는 이승만 건국 대통령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인 아무도 자유주의가 무엇인지조차 모를 때 그가 이 땅에 자유주의 공화국을 세운 것은 한국인의 행운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주의자들과 싸우며 어렵사리 반쪽이나마 자유주의 국가를 세웠는데, 그 과정은 험난한 것이었다. 건국 과정에서 겪었던 자신의 경험을 압축하여 그는 “공산주의자는 호열자(콜레라)와 같다. 인간은 호열자와 같이 살 수는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공산당의 목적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권을 잡는 일이므로 그들과 협력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말을 그대로 지켰어야 했는데, 우리는 주제넘게도 “이 정도까지는 괜찮겠지.”라며 경계를 조금씩 후퇴시킨 결과 오늘날의 이념적 혼란을 겪게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몽테뉴의 말대로 권위자의 말은 그냥 존중해야지 그 경계를 정하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다.

문근찬 숭실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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