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생명과학Ⅱ 20번의 출제오류 여부를 놓고 법정 공방이 지속되는 가운데, 교육 당국이 두 종류의 성적을 대학 측에 제공했다.

수능 생명과학Ⅱ 응시자 92명이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을 상대로 제기한 정답 결정 처분 취소 소송의 첫 변론 기일이 열린 10일 오후 재판을 마친 수험생들이 서초구 서울행정법원을 나서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수능 생명과학Ⅱ 응시자 92명이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을 상대로 제기한 정답 결정 처분 취소 소송의 첫 변론 기일이 열린 10일 오후 재판을 마친 수험생들이 서초구 서울행정법원을 나서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수능 출제·평가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평가원)은 생명과학Ⅱ 기존 정답을 유지해 채점한 수능 성적을 지난 13일 제공했다. 전원 정답처리한 수능 성적은 14일에 제공했다.

평가원, 두 가지 수능 성적표 제공하는 초유의 사태 초래...정시 전형 일정 차질도 우려돼

두 종류의 성적을 제공받은 대학은 수시 합격자를 가리는 작업을 미리 해 뒀다가, 소송 결과를 본 뒤 실제 합격자를 가리는 절차에 돌입한다. 사상 초유의 일이다.

2017년 경북 포항 지진이나 지난해 코로나19와 같은 재난 상황 때문이 아니라, 수능 출제오류 공방 때문에 대입 일정이 미뤄진 건 1994년 수능 시험이 도입된 이후 처음이다. 더욱이 다가오는 17일 소송결과가 나온 뒤, 출제오류를 주장하는 수험생이나 출제오류가 없다고 방어하는 평가원 중에서 한쪽이라도 항소하면 법정 공방 기간은 더 늘어나 정시 전형 일정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당초 당국은 생명과학Ⅱ를 선택한 6515명의 수능 성적표를 1심 재판 다음날인 18일에 일괄 배포하려 했다. 하지만 그럴 경우 대학들이 단 하루 만에 수시 지원자들에 대한 평가를 마치고 수시 합격자를 확정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된다는 지적이 나오자, 법원 선고 전 두 종류의 성적을 제공하는 전례 없는 결정을 내놓게 된 것이다.

문제 풀이만 강조하는 평가원, “정답 풀이 가능해” 주장 VS. 성숙한 사고를 드러낸 수험생, “문제 자체에 모순 담겨”

이 과정에서 평가원이 보여준 고집스런 태도를 두고 비난 여론이 높다.

평가원은 지난달 29일 ‘이 문항의 조건이 완전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교육과정의 성취기준을 준거로 학업 성취 수준을 변별하기 위한 평가 문항으로서의 타당성은 유지된다고 판단한다’며 문제에 이상이 없다고 결론을 냈다. 평가원이 한 가지 문제 풀이만을 강제하고, 그 안에서 답만 찾기를 강요한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것이다.

해당 문항은 올해 단일문항으로는 가장 많은 이의제기를 받으며, 수능 직후부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집단유전학 분야의 문제로, 두 개의 동물 집단 중 특정 유전학 법칙에 부합하는 동물 집단을 찾고, 집단별 유전자 비율을 추론해야 한다. 추론하는 과정에서 주어진 3개의 보기 중 맞는 것을 고르면 된다. 주어진 조건에 따라 생명과학Ⅱ 내용을 적용하면 정답이 5번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92명의 수험생들은 풀이 과정에서 문제에 모순이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유전자형 비율은 비율이므로 0~1 사이의 값을 가져야 하는데, 총 12가지 유전자형 중 하나는 1.2, 하나는 –0.4의 값이 나온다는 것이다.

결국 교육 주체인 평가원은 “문제를 풀어서 정답을 고를 수 있는 데 뭐가 문제냐”는 얄팍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비해 일부 수험생들은 종합적 사고를 통해 문제가 주어진 구조 자체가 잘못 설계됐음을 지적하는 성숙한 관점을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이를 두고 92명의 수험생들은 소송 제기 이후부터 생명과학 분야 전문가들에게 질의서를 발송하며 공론화를 주도하면서, 평가원을 상대하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수험생들은 전문가 의견을 구하기 위해서 국내외 석학과 교수, 고교 교사에게도 전자우편(이메일)을 통해 질의서를 보냈다.

집단유전학 세계 최고 권위자인 프리처드 스탠포드대 교수, 수험생 손 들어줘

조너선 프리처드 미국 스탠퍼드대 유전생물학과 교수는 “문제 설정 자체가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사진=연합뉴스TV 캡처]
조너선 프리처드 미국 스탠퍼드대 유전생물학과 교수는 “문제 설정 자체가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사진=연합뉴스TV 캡처]

그 결과, 집단유전학(Population Genetics) 분야 세계 최고 석학인 조너선 프리처드(Jonathan Pritchard) 교수에게서 답변을 얻어내는 성과를 거뒀다. 프리처드 교수는 현재 통계와 계산으로 유전체와 진화 생물학을 연구하고 있어, 논란이 된 문항에 가장 적합한 연구자로 평가받는다.

조너선 프리처드 미국 스탠퍼드대 유전생물학과 교수팀은 “문제 설정 자체가 모순”이라며 “일부 답을 찾을 방법은 있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의도적으로 무시해야만 하는 부분이 생긴다”고 지적했다. 평가원과 소송을 벌이고 있는 한국 수험생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생명과학Ⅱ 20번 문항 오류 논란이 단순히 국내 문제를 넘어 해외에서도 관심을 가지는 사안으로 확대된 것이다.

아기레 스탠포드대 연구원, 두 가지 풀이 제시하며 평가원 주장을 정면반박

프리처드 교수는 지난 11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트위터를 통해 생명과학Ⅱ 20번 문항을 언급하면서 매튜 아기레(Matthew Aguirre) 연구원이 내놓은 풀이 결과를 공유했다. 프리처드 교수와 함께 연구하고 있는 매튜 아기레 미국 스탠포드대 의생명정보학부 박사과정 연구원은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20번 문항의 풀이과정을 상세히 공개하고, 모순인 이유를 밝혔다.

프리처드 교수는 지난 11일 트위터를 통해 생명과학Ⅱ 20번 문항을 언급하면서 매튜 아기레(Matthew Aguirre) 연구원이 내놓은 풀이 결과를 공유했다. [사진=프리처드 교수 트위터 캡처]
프리처드 교수는 지난 11일 트위터를 통해 생명과학Ⅱ 20번 문항을 언급하면서 매튜 아기레(Matthew Aguirre) 연구원이 내놓은 풀이 결과를 공유했다. [사진=프리처드 교수 트위터 캡처]

아기레 연구원은 두 가지 방법으로 풀이했으며, 그중 하나로 수험생들이 제기한 것처럼 유전자 비율이 0~1 사이가 아닌 음수값이 나옴을 보였다. 추가로 또 다른 풀이방법을 제시했는데, 문제풀이를 할 수조차 없도록 문제 설정에 오류가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평가원이 ‘답은 낼 수 있는 문제’라고 한 것에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프리처드 교수는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집단유전학, 중대한 대학입학시험, 수학적 모순, 법원의 명령까지 모든 요소를 다 갖춘 문제”라고 총평했다.

법원이 17일 선고서 출제오류 인정하면 평가원 대응은?

김종일 서울대 유전체의학연구소장 겸 의과대학 교수도 여러 국내언론을 통해 “오류가 명백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국내외 전문가들이 문제 자체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가원은 오류가 없다는 입장을 되풀이하면서, 단 한번의 사과도 하지 않았다. 과학탐구Ⅱ 영역에서는 단 한 문제만으로도 합격이 좌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수험생들은 어느 대학을 지원할지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출제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 평가원의 뻔뻔한 태도에 수험생들만 끌탕을 하는 상황이다.

법원이 17일 선고에서 생명과학Ⅱ 20번 문제의 출제오류를 인정할 경우, 평가원은 국제적 망신을 피할 수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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