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자 칼럼] ‘오징어게임’에 대한 인문학적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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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21.10.14 08:30:38
  • 최종수정 2021.10.14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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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셔의 도마뱀.(사진=박정자 제공)
에셔의 도마뱀.(사진=박정자 제공)

서울 대학로의 한 달고나 가게는 연일 인파로 북적인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덕분이다. 이 가게 주인이 ‘오징어 게임’에 나오는 달고나를 모두 만들었다는 뉴스를 보고 온 사람들이다. 촬영장에서 그는 영문도 모르고 하루 설탕 5kg 씩 사흘간 쉬지 않고 만들었다고 한다. “도대체 뭐에 쓰이는 거지?”라고 생각하면서.

실재의 세계에서 만든 465개의 달고나는 드라마 속 가상 세계로 들어가, 게임의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그렇게 실재에서 가상으로 들어갔던 달고나가 이번에는 다시 현실 속 대학로로 돌아와 가게 매상을 올려주고 있다. 마치 에셔(Escher)의 판화 그림처럼.

에셔의 판화 작품 ‘도마뱀’은 종이에 그려진 도마뱀이 기어 나와 3차원의 실제 도마뱀으로 바뀌고, 그 도마뱀이 옆에 놓인 책 위를 기어 올라가다가, 빙 돌아 다시 2차원의 종이 속으로 돌아가는 과정이 그려진 그림이다. 도마뱀이 그려진 종잇장은 2차원의 평면인데, 그 도마뱀이 갑자기 종이에서 튀어 나와 책 위로 기어 올라감으로써 3차원의 세계가 펼쳐지고, 도마뱀은 다시 그림으로 돌아와 2차원의 세계로 복귀한다. 2차원과 3차원 사이, 다시 말해 가상과 실재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뜨린 작품이다.

오징어게임의 계단.(사진=넷플릭스)
오징어게임의 계단.(사진=넷플릭스)

에셔는, 2차원에서는 가능하나 3차원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그림들을 판화로 그린 화가다. 그중 ‘상대성’(1953)이라는 제목의 작품은 수도원 같은 고풍스런 건물 안에 여러 개의 계단들이 세모꼴로 중첩되어 있는 그림이다. 어떤 계단은 올라가는 것 같은데 실은 내려가고, 어떤 계단은 내려가는 것 같은데 실은 올라가고, 어떤 계단은 층계를 올라가면 층계참이 아니라 창문 뚫린 벽이 비스듬히 눕혀져 수직으로 세워져 있고, 어떤 계단 옆 수직의 벽면은 마치 평면처럼 그 위에 사람이 의자에 앉아 있고, 어느 모퉁이 옆 커다란 창문 밖 정원은 평평한 공간이 아니라 수직의 잔디에서 사람들이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다.

천장, 벽, 바닥이 구별 없이 한데 어우러진 이 그림은 2차원에서는 가능하나 3차원의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다시 말하면 종잇장 위에 그림을 그릴 때는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우리가 사는 실제의 3차원 세계에는 있을 수 없는 현상이다.

에셔의 ‘상대성’.(사진=박정자 제공)
에셔의 ‘상대성’.(사진=박정자 제공)

‘오징어게임’ 참가자들이 게임장으로 이동할 때 거쳐 가는 알록달록 예쁜 색채의 미로 계단은 바로 에셔의 계단 그림을 오마주한 것이다. 캔디 같이 달콤한 색깔의 이 계단은 영화를 매력적으로 만들어주는 가장 핫한 샐링 포인트(selling point) 중의 하나다.  

마그리트 

젊은 경찰관이 실종된 형의 흔적을 찾으러 고시원으로 갔을 때 형의 책상 위에 놓인 것은 마그리트의 화집이고, 벽에 걸린 그림은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이다.

마그리트는 사물을 최대한 정밀하게 그리는 화가다. 얼핏 보면 사진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실재와 유사하게 그린다. 그런데 이상하게 화폭은 미스테리하다. 유리잔 위에 담긴 구름, 방 하나 가득 들어찬 커다란 연두색 사과, 하늘에서 비처럼 내리는 중절모 신사들, 그렇게 그는 현실 속에서는 도저히 함께 있을 수 없는 사물들을 옆에 나란히 놓아 현실과 초현실을 뒤섞는다. ‘빛의 제국’에서도 하늘은 흰 구름이 떠다니는 푸른색 대낮인데, 지상의 집과 나무는 캄캄한 어둠 속에 잠겨 있다.

마그리트, ‘빛의 제국’.(사진=박정자 제공)
마그리트, ‘빛의 제국’.(사진=박정자 제공)

영화에서 마그리트 그림의 직접적인 오마주는 없다. 그러나 영화 전체가 지극히 현실적이면서 사실적이고 실제적인 디테일이 말도 안 되는 또 다른 디테일과 함께 뒤섞이면서 하이퍼리얼을 극대화시킨다. 예를 들어 게임 현장에 1차 들어갔다 나온 기훈이 경찰서에 가서 신고하는 장면은 지극히 사실적이다.

기훈의 말을 다 듣고 나서 경찰관은 “아니 그러니까 아이들이 하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고 거기서 탈락한 사람을 총으로 막 쏴 죽인다구요? 그런데 당신이 거기에 자발적으로 들어갔다구요? 이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고 하는 소리에요?”라고 말한다. 이 얼마나 현실적이고 사실적이고 실제적인 상황인가. 이 상식적인 장면을 보며 현실 속의 우리 관객은 한 순간 마음이 놓인다. 누군가 상식적인 이야기를 할 때 우리는 참으로 마음이 편안해 진다. 그러나 바로 이어서, 오로지 게임에 졌다는 이유만으로, 분홍색의 병사들이 기관총으로 사람을 마구 쏘아 죽이는 기괴한 일이 벌어진다.

영화 속 소품들 중 비현실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달고나는 달고나고, 양은 도시락은 양은 도시락이며, 참가자들의 초록색 점퍼는 길에 나가면 흔히 보이는 일상적 운동복이고, 진행요원들의 분홍색 점프 수트도 지극히 사실적이다. 사물만이 아니라 ‘무궁화꽃...’ 놀이도, 구슬치기 놀이도, 줄다리기 놀이도 우리 모두가 어린 시절에 한두 번쯤 해 보았을 지극히 사실적인 아이들의 유희다. 그런데 이 모든 사실적인 사물들이 그것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살인, 학살과 어울리면서 섬뜩한 초현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어쩌면 그 사물과 행위들이 우리에게 친근한 것이어서 공포가 더 고조되는 것인지 모른다. 만일 ‘무궁화꽃...’을 외우는 로봇 인형이 시커먼 쇳덩어리의 괴물이었다면 우리가 그토록 전율했을까. 빨간 점퍼스커트를 입은 천진난만한 어린 소녀가 어리광스럽게 외우는 ‘무궁화꽃...’ 이 곧장 피 튀기는 살해의 장면으로 이어지니 공포가 극대화되는 것이다. 사람은 익숙한 사물이 낯설게 보일 때 공포감을 가장 크게 느낀다고 프로이트는 ‘섬뜩함’(Unheimlich)의 이론에서 말했다.  

푸코 

유일한 노인 참가자는 애잔했다. 그와 팀을 이룬 기훈이 슬쩍 슬쩍 속여서 노인의 구슬을 거의 다 빼앗았고, 마침내 노인은 자신의 1개 남은 구슬과 기훈의 구슬 전부를 걸고 마지막 게임을 하자고 제안한다. 기훈이 “아니 1개 하고 이렇게 많은 것 하고 같이 걸자니, 말이 돼요?”라고 말하니 노인은 “아니 그럼 자네가 나를 속인 건 괜찮구?”라고 대답한다. 막장 드라마의 반전만큼이나 충격적인 대사였다. 아니 그럼, 아까 어수룩한 척 속아 넘어간 게 다 연기(演技)였단 말이야?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 드라마 전체가 다 연기 아니던가? 연기 속의 연기다.

이 충격은 마지막 장면의 더욱 큰 충격을 예고한다. 마지막의 반전에서, 아니 그럼 그 모든 게 다 연기였단 말이야? 라고 놀라다가 우리는 또 “하기는 드라마 전체가 다 연기지” 하고 새삼 정신을 차리는 것이다.

문학이건, 회화건, 영화건 그 기본 개념은 현실의 모방이다. 예술의 기원은 현실을 그대로 재현(再現)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소설을 보며, 그림을 보며, 영화를 보며 마치 그것이 실재의 세계인양 울고, 웃고 즐기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허구이며, 그럼직한 어떤 것들을 단순히 재현한 것일 뿐이다. 그래서 어떤 예술가들은 예술작품이 오로지 가짜 현실이라는 것, 즉 재현이라는 것을 알리는 장치를 사용해 예술의 격을 한 차원 더 높이기도 한다.

공주를 화폭에 그리기만 하면 되는데,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 자신을 굳이 공주 옆에 함께 그려 넣은 벨라스케즈의 그림 ‘시녀들’이 그 한 예이다. 푸코는 이것을 ‘재현의 재현’이라고 불렀다. 재현한다는 사실을 재현한 작품이라는 의미다. 노인이 보여준 ‘연기(演技)의 연기’도 같은 얘기다. ‘재현의 재현’만이 아니라 노인의 캐릭터에는 적(敵)그리스도의 모티프도 분명 들어 있다. 스포일러를 우려해 노인 얘기는 그만 하기로 하지만.

복면을 한 행사요원들이 기관총을 들고 장화 소리 요란하게 미로 같은 복도를 걷는 것도 푸코의 판옵티콘 이론을 상기시킨다. 감시자의 눈이 가려져 있어 그가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피감시자의 공포감, 나아가 관람객의 공포감을 더욱 고조 시킨다. 

라캉

게임이 진행될수록 사람들의 부정직함, 야비함이 드러난다. 상대방이 죽어야 내가 살 수 있다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 누가 인간의 품위를 지킬 수 있단 말인가? 죽음에 맞닥뜨린 인간에게 과연 윤리 도덕은 무엇인가? 아니 문명 자체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인간의 진실은 결국 날것 그대로의 동물성이 아닐까,라는 깨달음에 우리는 전율한다.

게임 참가자들은 모두 일확천금을 꿈꾸지만, 그러나 결국 게임은 한 사람 빼고는 다 죽게 설계되어 있다. 그들은 너무 많은 것을 욕망했기 때문에 죽음을 맞는다. 라캉에 의하면 너무 많은 쾌락은 욕망의 종식이다. 욕망의 종식이란 곧 생명의 종식을 의미한다. 즉 쾌락의 극치는 죽음이다. 죽음을 동반하는 이 극도의 쾌락을 라캉은 주이상스(jouissance, enjoyment)라고 이름 지었다. 적당히 즐기는 것에 그쳐야지 욕망을 완벽하게 충족시키려 하다가는 죽음을 맞게 된다. 인간이 그토록 욕망하는 대상은 ‘없음’, ‘결핍’, ‘무(無)’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죽음이기 때문이다.

실종된 경찰관 형의 고시원 방 책상 위에는 과연 라캉의 책 ‘욕망이론’이 놓여 있다.

오징어게임.(사진=넷플릭스)
오징어게임.(사진=넷플릭스)

사회주의 비판

게임 참가자 456명은 실업자, 빚쟁이, 도박 중독자, 사기꾼 등 주변부 인간들이다. 가정폭력을 휘둘러 어머니를 죽인 아버지를 또 죽인 젊은 여성이 있고, 쌍문동 천재였던 서울대 경영학과 졸업생은 고객의 펀드를 잘못 운영하여 큰 손실을 내 경찰의 추적을 받고 있다.

보육원에 있는 어린 동생과 북에 남아 있는 어머니를 데리고 나오기 위해 돈이 필요하지만 돈 벌 길이 없어 소매치기가 된 탈북 여성이 있으며, 임금 체불로 생활비가 막연한 파키스탄 노동자도 있다. 주인공 성기훈은 이혼한 처가 키우고 있는 딸에게 생일 선물 사 줄 돈도 없고, 늙은 어머니의 병원비를 댈 돈도 없다. 모두 우리 사회의 루저들이다. 가혹한 세상이 무서워 마지막 끄나풀이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이곳에 들어왔다.

6개의 어린이 놀이 게임을 통과해야 456억원(3,800만 달러)을 받게 되고, 탈락은 죽음을 의미한다. 규칙을 지키지 않는 참가자는 가차 없이 총으로 쏘아 죽인다. 비디오 게임에서의 암살자 행동과 똑같이 섬뜩하다. 다만 이건 비디오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다. (그러나 참, 이거 역시 가상의 세계다).

평자들은 이 영화가 ‘자본주의 사회의 치열한 경쟁과 불평등’을 그렸다고 말한다. 한 좌파 성향의 평자는, 마스크를 쓴 프론트맨이 위스키를 마시며 넓은 통 유리창 밖으로 죽음의 스펙터클을 관람하는 장면이야말로 양극화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를 압축적이면서도 냉소적으로 보여주는 잔인한 대목이라고 했다. 하기는 ‘자본’과 ‘권력’이라는 말은 모든 영화 평론가들의 클리셰(상투적 표현)이기는 하다.

드라마 제작진도 아마 ‘보수 기득권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사의 게임에 몰린 사람들이 겪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보여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상류계층 비판을 의도했다가 오히려 가난한 하류계층의 사악함을 부각시킨 영화 ‘기생충’처럼 ‘오징어게임’도 철두철미 사회주의 비판으로 읽힌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좌파 평자들은 게임의 공간이 현실 사회의 평행우주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자본주의 사회의 루저들이 그 곳을 도망 쳐 게임 공간 속으로 들어왔지만 여기도 현실의 공간과 마찬가지로 역시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단어 자체의 원래 뜻이 무엇이든 간에 설계, 평등, 공정, 이 세 단어는 전체주의(곧 사회주의)를 설명하는 키워드다. 하이에크가 ‘노예의 길’에서 누누이 설파했듯이 국가의 ‘설계’야 말로 사회주의 체제를 규정짓는 가장 핵심적 단어다. 사회주의·공산주의·전체주의 사회에서는 극소수의 지배 계층이 국민 전체의 직업, 거주, 생활방식, 경제활동 등을 다 설계한다. 거기에 개인의 자유는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들은 평등을 거의 기도문처럼 외운다. 그리고 사람들을 철저하게 지배하고 통제하기 위해 공정을 내세운다. 법을 어긴 사람은 가차 없이 처벌(또는 죽임) 받는다. 여기에 감시와 처벌은 필수 조건이다.

오징어게임 행사장 마이크는 주최측이 게임을 정교하게 설계했다는 것, 모든 참가자들은 완벽하게 평등하고, 게임은 철저한 룰에 의해 공정하게 진행된다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실제로 참가자 모두가 완벽하게 평등하다. 다만 프론트맨 등 상층 스탭들은 당연히 그들보다 훨씬 더 평등하다. 조지 오웰의 공산주의 비판 소설 ‘동물 농장’이 연상되지 않는가.

철저한 룰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이 룰을 어기면 가차 없이 죽음을 당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가 사람을 마구 죽이는가? 룰이 가혹하여 그 룰을 어기면 가차 없이 죽음을 당하는 사회는 사회주의 체제뿐이다. 지도자의 말 한 마디로 재판 없이 즉결 처분 하는 곳은 북한 사회다.

자본주의 사회가 냉혹한 것은 사실이고, 너무나 큰 빚에 억눌려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는 희망이 있다. 다시 일어설 가능성이 있는 사회다. 게임에서 진다고 기관총으로 즉결처분을 하는 사회는 아니다. 싫으면 밖으로 나갈 수도 있다. 그러나 오징어게임 참가자가 만약 도망을 시도했다면 그는 당장 총알 세례를 받을 것이다. 주민들이 자유롭게 밖으로 나올 수조차 없는 북한 사회의 메타포(은유)다. 탈북을 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나라가 북한이니까.

하기는 우리도 지금 체험하고 있는 현실이다. 문재인 정부는 국민 개개인이 가진 집의 개수, 돈의 액수까지 감시하고, 국민 개개인이 하루 종일 어디 가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기 위해 촘촘하게 QR 코드의 망까지 깔았다. 그들은 평등과 공정을 입에 달고 살지만, 이건 보수 세력(소위 적폐 세력)을 궤멸시키기 위한 전략적 구호일 뿐, 지배층과 피지배층에 적용되는 룰이 따로 있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오징어 게임.(사진=맥스무비)
오징어 게임.(사진=맥스무비)

오징어게임’의 특이점은 빚을 공포의 원인으로 삼았다는 점

‘오징어게임’은 9월 17일 출시되어 열흘 만에 90개국에서 1위를 기록했다. 한국 드라마가 미국 차트에 톱을 차지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게다가 시청률의 95%가 한국 밖에서 이루어졌다. 미국의 젊은이들이 자막을 보지 않는다는 통설도 뒤집혔다.

‘오징어게임’ 같은 영화를 평론가들은 데스게임이라고 장르를 구분 한다. 다른 데스게임들이 기후 변화로 인한 환경의 붕괴라든가, 전쟁 속 원자탄 투하로 인한 묵시록적 상황 등을 불안의 배경으로 삼는데 비해, ‘오징어게임’은 빚이 불안의 원인이라는 것이 특이점이다. 

우리의 천문학적 가계부채도 폭탄처럼 두렵게 다가오는데, 민주당 대선 후보는 기본 소득제만 이야기하고 있다. Pink Soldiers의 장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박정자 객원 칼럼니스트(상명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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