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사법은 빌고 비는 '원님 재판'
반성 강요하는 것은 양심 자유의 침해
법은 엄격한 기준과 해석 원칙 있어야

황성욱 객원 칼럼니스트
황성욱 객원 칼럼니스트

검찰출신의 모 국회의원은 사석에서 내게 이런 얘기를 했다. “대한민국의 사법시스템은 법의 적용을 받는 과정이 아니라 비는 과정입니다. 경찰에서 부르면 경찰에 빌고, 검찰에서 부르면 검찰에 빌고, 법원에서 부르면 법원에 빌고 있습니다. 변호사도 같이 빕니다. 빌지 않으면 죄를 뉘우치지 않고 반성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게 원님수사, 원님재판이지 무슨 사법시스템입니까.”

이 얘기를 들으니 법정에서의 경험이 떠오른다. 방청석에서 변론을 위해 기다리면서 앞 사건을 보고 있었는데, 앞 사건들이 마침 선고기일 사건들이었다. 피고인들이 줄줄이 나오면 판사가 선고를 하는 과정이 반복되고 있었는데, 그 날 판사는 특이하게도 선고를 하면서 피고인에게 일장 훈계를 하는 스타일이었다. 그 중 한 사건은 판사가 무죄를 선고하면서 역시 피고인에게 야단을 치기 시작했는데, 피고인은 무죄를 받았으면서도 연신 잘못했다면서 죄송하다고 했다. 이제 돌아가라는 말에 피고인은 뒤로 돌아섰는데, 뒤로 돌아서면서 그의 입에서 나온 첫 말은 “X팔”이었다.

몇 해 전 언론에서 매우 우호적으로 다룬 법정 풍경이 있다. 소년사건을 다루는 소년법정에서 훈계를 하는 판사에 대한 기사였다. 법률의 엄격한 적용대신 소년범들을 훈계하고 그에 감동한 소년들이 죄를 진정으로 뉘우쳤다는 미담기사지만 조금은 불편하게 느껴졌다. 물론 아직 미성숙한 소년들이고 국친 사상 즉 부모로서의 국가라는 개념의 소년사건 처리 절차 광경을 비판할 생각은 없다. 다만, 자식 잘못 가르친 죄(?)로 법정에서 연신 빌고 있는 부모의 모습에서 일반 성인 사건의 풍경이 겹쳐보였다.

한편, ‘무죄’를 주장하는 피고인에게 유죄를 선고하면서 죄를 뉘우치지 않고 반성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중형을 내리는 것은 과연 타당할까. 죄와 벌은 일치해야한다는 근대형법의 책임주의 원리에서 일탈한 것은 아닐까, 자신은 양심에 비추어 떳떳함에도 판사가 이를 무시하면서 반성하지 않는다는 도덕적 책임을 법적책임의 근거로 들이대는 것은 과연 바람직할까. 특히 구체적인 피해자가 없는 정치적 사건의 재판에서는 어떨까. 이는 양심의 자유 침해는 아닐까.

헌법재판소는 1991. 4. 1. ‘타인의 명예를 훼손한 자에 대하여는 법원은 피해자의 청구에 의하여 손해배상에 가름하거나 손해배상과 함께 명예회복에 적당한 처분을 명할 수 있다’고 규정한 민법 제764조에 대해서 위헌판결을 내리면서 다음과 같이 설시했다.

[헌법 제19조는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하여 양심의 자유를 기본권의 하나로 보장하고 있는바, (중략) 원래 깊이 “사과한다”는 행위는 윤리적인 판단·감정 내지 의사의 발로인 것이므로 본질적으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것이라야 할 것이며 그때 비로소 사회적 미덕이 될 것이고, 이는 결코 외부로부터 강제하기에 적합치 않은 것으로 이의 강제는 사회적으로는 사죄자 본인에 대하여 굴욕이 되는 것에 틀림없다. 사과의 정도에 따라 굴욕감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사과”의 문구가 포함되는 한 그것이 마음에 없는 것일 때에는 당사자의 자존심에 큰 상처요 치욕임에 다름없으며, “사과문”, “진사문”, “해명서” 등 어떠한 명목의 것이든 관계없이 그러하다. 더구나 사죄광고란 양심의 자유에 반하는 굴욕적인 의사표시를 자기의 이름으로 신문·잡지 등 대중매체에 게재하여 일반 세인에게 널리 광포하는 것이다. (중략) 따라서 사죄광고 과정에서는 자연인이든 법인이든 인격의 자유로운 발현을 위해 보호받아야 할 인격권이 무시되고 국가에 의한 인격의 외형적 변형이 초래되어 인격형성에 분열이 필연적으로 수반되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죄광고제도는 헌법에서 보장된 인격의 존엄과 가치 및 그를 바탕으로 하는 인격권에 큰 위해도 된다고 볼 것이다.]

이에 따르면, 반성을 강요한다는 것은 역시 사죄를 강요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무죄를 주장하는 피고인의 주장을 반성을 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치환하여 이를 법적 불이익으로 한다면, 위 헌법재판소의 법리에 따를 때 양심의 자유 침해라고 할 것이다.

판사가 법정에서 피고인을 훈계하고 피고인의 반성을 요구한다는 것은 각기 다른 측면일 수도 있으나 지극히 도덕주의적 국가관에 기초한다.

그렇기에 비단 양심의 자유침해 뿐만 아니라 근대형법의 기초 원리인 도덕과 법의 구별을 모호하게 한다. 훈계와 반성은 법과 친하지 않다. 법은 엄격한 기준과 해석의 원칙이 있고 그에 따른 제재도 비교적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도덕적 평가를 필수적으로 수반할 수밖에 없는 훈계와 반성은 법보다는 도덕의 영역에 해당한다. 자유민주주의의 필수동반자인 법치주의는 종교와 도덕을 법으로부터 분리했다. 신정일치국가와 도덕국가가 얼마나 많은 국민의 자유를 침해하였던가. 좀 더 쉬운 말로 표현을 한다면 그것은 인민재판으로부터의 탈출이었다. 대중의 손가락, 뚜렷한 증거도 없이 한계를 측정할 수 없는 모호한 도덕규범으로부터 최소한의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성인에 대한 판사의 훈시와 반성의 사실상 강요는 민주적 정당성의 관점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헌법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규정하고 있을 뿐 국민을 가르치라고 한 적이 없고, 행위책임 이외의 도덕적 자세에 대한 평가까지 판사가 할 수 있다고 유추할 수도 없다. 대통령과 국회와 달리 국민이 선거를 통해 직접 그 기관을 선택하여 그 권한을 위임한 적도 없다. 따라서 판사는 오로지 법이 부여한 권능 속에서만 그 직분을 행사해야한다.

‘법이란 국가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사람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고 법은 상대적으로 객관적이다. 주관적인 도덕적 성향이 개입되는 순간 사람들은 승복하지 않는다.

법을 적용하는 사람이 자제하면 자제할수록 법의 권위가 올라간다. 그것을 우리는 인치가 아닌 법치라 한다.

황성욱 객원 칼럼니스(변호사, 법무법인 에이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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