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산책] 권력과의 야합, 유착이 초래한 천주교의 어두운 역사
[주말산책] 권력과의 야합, 유착이 초래한 천주교의 어두운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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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로 부터의 전래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신앙을 찾은 한국 천주교회는 오랜 시간,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통해서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한국 천주교회의 ‘성조(聖祖)’, 이벽(李蘗, 1754년~1786)은 이승훈(베드로)을 북경으로 보내 세례를 받게한 뒤 1784년 2월 그가 돌아오자 자기 집에서 권일신, 정약용과 세례를 받고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됐다.

230년 한국 천주교회의 ‘3대 흑역사’

하지만 이후 신해(辛亥), 신유(辛酉), 기해(己亥), 병오(丙午),병인(丙寅)박해 등 크고 작은 천주교도 탄압으로 많은 신자들이 죽임을 당했다. 한국 천주교회가 신앙의 자유를 얻은 것은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은지 100년이 더 지난 1886년, 조불(朝佛)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나서다.

230년 한국 천주교회사의 치부(恥部)로 불리는 3대 ‘흑역사’가 있다. 1801년에 있었던 ‘황사영 백서’, 1901년 제주도에서 벌어진 ‘이재수의 난’, 일제하에서 천주교를 이끌었던 뮈텔 주교 시대의 적극적인 친일 및 독립운동 탄압이다.

이중 황사영의 백서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그해 있었던 천주교도들에 대한 극심한 박해를피해 충북 제천의 배론(舟論) 마을에 숨어 살았던 정조임금 때의 과거 장원급제 출신 황사영은 조선 조정의 천주교 탄압 실정과 대책을 적은 ‘황사영 백서‘를 적어 북경 주교에게 전달하고자 했다.

황사영의 백서 중 논란이 되는 부분은 청나라 황제에게 청하여 조선도 서양인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것을 요청한 점, 아니면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켜 감독하게 하거나, 서양의 배 수백 척과 군대 5만∼6만 명을 조선에 보내어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도록 조정을 굴복하게 하는 내용이었다.

충북 제천시 천주교 배론성지에 있는 황사영이 숨어살던 토굴
충북 제천시 천주교 배론성지에 있는 황사영이 숨어살던 토굴

 

1970, 80년대, 천주교회 내의 ’민주화 세력‘은 과거사 반성 차원에서 이 일을 부끄러운 역사로 규정했다. 하지만 교회사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황사영 시대의 극심한 천주교 탄압을 이유로 “오죽하면 그랬겠느냐”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탐관오리와 유착한 천주교인들의 떼죽음 부른 ‘이재수의 난’

영화로도 만들어진 ‘이재수의 난’은 1901년 제주도의 토착 주민들이 천주교회 및 신도들의 횡포에 맞서 일으킨 항쟁이다. 이 난으로 300여명의 천주교도들이 주민들로부터 희생을 당했다.

1858년 제주도에 처음 전래된 천주교는 극도로 가난한 지역 주민들의 평등 및 구원 열망에 프랑스 신부들을 파견함으로써 교세가 급격히 확장됐다. 하지만 교회는 탐관오리와 결탁해 온갖 세금을 징수하는데 앞장서는가 하면 새로운 성당을 지으면서 신목(神木), 신당(神堂)을 없애는 등 토착문화를 말살해 반감을 샀다. 당시 제주도에서 천주교인들은 거리에서 행패를 부리고 약탈을 해도 프랑스인 신부와 프랑스라는 외세를 업고 있었기에 관아에서 처벌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1999년 영화로 만들어진 '이재수의 난' 포스터
1999년 영화로 만들어진 '이재수의 난' 포스터

 

이에 유림과 관노(官奴) 이재수 등 도민들이 민란을 일으켜 천주교도 300여명을 처형했다. 프랑스 신부가 중국 상하이에 있던 프랑스함대에 도움을 청해 제주에 도착했으나 많은 천주교인들이 죽음을 당한 뒤였다.

독립운동 금지, 안중근 의사의 종부성사 거부한 한국 천주교회의 ‘친일행적’

천주교 제8대 조선교구장인 프랑스인 귀스타브 뮈텔(Gustave Charles Marie Mutel) 주교는 50여년간 조선에 머물면서 일제하 한국 천주교회를 이끌게 된다. 하지만 뮈텔 주교는 3·1운동에 참가한 학생들은 ‘약탈자’ ‘산적’이라고 비하하고 이들을 천주교 학교에서 내쫓았다.

뮈텔 주교는 심지어 천주교도인 사형집행을 앞둔 안중근 의사의 신부 접견과 미사를 불허하는가 하면 안중근 의사가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부인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일제하 천주교회의 친일행적은 개신교, 천도교, 불교 등 종교계 지도자들이 대거 참여한 3·1운동 민족대표 33인에 단 한 명도 이름을 넣지 않은 것에서 드러나고 있다.

20세기 벽두에 있었던 한국 천주교회의 이런 부당한 ‘야합’에 대해 일부에서는 “워낙 힘들게 신앙의 자유를 얻다보니 권력과의 유착이 그만큼 절실하지 않았겠느냐”고 변호하기도 한다.

좌파 권력 옹호하는 정의구현사제단...추가 돼야할 ‘흑역사’

추미애 법무부장관의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직무배제가 법원에 의해 제동이 걸리자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지난 7일 성명서를 발표하고 검찰개혁을 운운하며 ‘윤석열 찍어내기’에 동참했다.

하지만 이 시국선언을 주도한 신부가 성명 발표 6일 전 '윤석열 감찰·수사'를 진두지휘하고 있는 한동수 대검감찰부장을 만난 사실이 드러나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이에 지난 14일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라는 천주교·개신교의 평신도 주축 모임은 “검찰개혁 빙자해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거짓 종교인들을 규탄한다”는 성명서를 내 비판하기도 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1970년대 우리 사회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만들어진 단체다. 하지만 1987년 민주화 이루 정의구현사제단은 종북 좌파들과 궤를 함께 하면서 그들이 위기에 몰릴 때 마다 힘을 실어주고 있다.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는 시시비비, 눈앞의 정의를 외면하고 이념의 동조자로 전락해버린 정의구현사제단의 이런 퇴행적 행태는 훗날 천주교 역사에 또 하나의 ‘흑역사’로 기록될 것이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인 김희중 대주교는 작년 2월20일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한국 천주교회는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채 민족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하고 저버린 잘못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성찰하며 반성한다”고 일제하 행적을 사과해야만 했다.

성탄절이 다가온다. 예수님은 그 시대 최고 권력, 로마의 식민통치를 비판하다 십자가에 못박혔다. 종교가 권력과 야합해서는 안된다.

이상호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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