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삼 칼럼] 연해주·만주에서 벌어졌다는 항일무장투쟁의 뒷모습을 살펴보니…
[김용삼 칼럼] 연해주·만주에서 벌어졌다는 항일무장투쟁의 뒷모습을 살펴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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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의병장 유인석, “상놈 주제에 양반에게 대든” 죄목으로 의병 선봉장 김백선의 목을 베다. 항일무장투쟁의 영웅 김좌진은 독립 군자금 마련 위해 무장 강도 행각 벌여. 독립 군자금 강제 징수하다 연해주 한인 교포들에게 맞아죽은 독립군 대장 최영호. 자유시에서는 소련 적군과 손잡은 한인 무장부대가 동료 대원 수백 명을 사살·체포. 홍범도, 자유시 참변 당시 가해자 편에 서서 한인 독립군 몰살 후 레닌에게 군복·권총 선물받아

기자는 최근 연해주·만주 일대에서 벌어진 항일무장투쟁의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들을 정리하여 한 권의 책으로 정리 중이다. 만주벌판, 시베리아 동토를 누비며 조국 광복을 위해 혈투를 벌인 그들의 영웅스런 행동은 풍찬노숙, 고심혈통(苦心血痛)의 연속이었다. 독립운동에 투신한 민족지사들을 상징하는 단어 중에 이보다 더 적합한 용어가 있을까?

하지만 한편에선 그 시대 사료들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가슴 먹먹하고 눈앞이 캄캄해지는 사례들이 연속으로 발견된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항일무장투쟁은 그 어떤 가치보다 드높은 권위를 확보해 왔고, 친일파 척결의 강력한 무기였으며,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드시고 모래알로 쌀밥을 지으시는” 김일성 띄우기의 결정타이기도 했다. 그 결과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이동휘·홍범도·김좌진·김일성·김원봉을 비롯한 항일무장투쟁가들은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정도의 도덕적 이니셔티브를 장악하여 세상을 호령하고 있다.

양반에게 대들었다고 의병 선봉장 목을 친 유인석

1894~5년부터 1910년 합방 후까지 지속된 의병봉기를 일부 학자들은 ‘의병전쟁’이라고 표기한다. 박은식은 의병투쟁을 “우리 민족의 정수(吾族之國粹)를 계승한 장엄한 애국투쟁”이라고 정의했다. 그런데 이러한 일반적 통념을 일거에 깨부수는, 처참하도록 낯 부끄러운 사례들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구한말 의병전쟁의 핵심으로 손꼽히는 인물이 주자성리학의 정통 계보를 잇는 유인석과 최익현이다. 유인석은 단발령 이후 봉기한 항일의병 가운데 군사수가 1만여 명으로 가장 많았고, 충주성을 잠시 점령할 정도로 위세를 떨쳤다. 하지만 잡다한 사람들이 모여 대오를 이루다보니 같은 의병이긴 해도 반상의 질서로 볼 때 이질감이 현저했다.

유인석 휘하의 김백선은 짐승 잡는 포수 출신이었다. 양반 의병들 보기엔 근본 없는 상것이 분명했으나 무예가 출중하고 백발백중의 화승총 사격 솜씨 덕에 선봉장에 임명했다. 유인석 부대가 수안보의 일본군 병참수비대 공격 과정에서 문제가 불거졌다. 원래 작전계획에 의하면 양반 중군장 안승우가 원병을 보내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원병이 오지 않아 선봉대는 패전 후퇴한다.

유인석 의병부대에서 선봉장이었던 김백선. 포수 출신이었던 그는 양반 종군장 안승우에게 항의했다가 불경죄로 목이 잘렸다. 이 사건으로 의병부대에서 포수들이 대거 이탈, 유인석 의병부대는 허무하게 해산되었다.
유인석 의병부대에서 선봉장이었던 김백선. 포수 출신이었던 그는 양반 종군장 안승우에게 항의했다가 불경죄로 목이 잘렸다. 이 사건으로 의병부대에서 포수들이 대거 이탈, 유인석 의병부대는 허무하게 해산되었다.

 

전투가 끝난 후 선봉장 김백선은 안승우에게 원병을 보내지 않은 이유를 따지며 강력 항의한다. 이를 본 양반 의병장 유인석, 수염을 부르르 떤다. 상놈 주제에 감히 양반에게 대들다니! 유인석은 불경죄를 저지른 김백선을 체포하여 수많은 의병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목을 잘랐다.

자신들의 우상이었던 선봉장 김백선이 피바다를 이루며 목이 달아나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은 동료 포수들은 보따리 싸서 귀향한다. 사격술 뛰어나고 조직력 강한 포수 출신 의병의 조직적 이탈로 전투력이 크게 약화된 유인석 의병부대는 연전연패하여 허무하게 해산당하고 말았다. 기울어져가는 왕조를 지켜내고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봉기한 의병운동에서마저 반상의 윤리질서가 어김없이 엄격하게 작동했음을 보여주는 일화다.

그들이 지키려 했던 것은 ‘나라’가 아니라 주자성리학

주자성리학적 세계관에 젖어 있던 유생 의병장들은 민족문제는 뒷전이고, 반상의 신분제 질서 유지가 최우선 과제였다.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나라’가 아니라 위정척사를 통한 ‘주자성리학의 도(道)’였던 것이다. 때문에 반상의 윤리와 법도를 조금이라도 어지럽히는 자들은 가차 없이 처단하는 것이 의병운동의 불문율이었다.

유인석은 평생을 대스승 송시열의 우산 아래 살면서 주자학 중심의 중화(中華)를 수호하고 주자학을 신봉하지 않는 야만의 일본(倭)과 서양(洋)을 오랑캐(夷)로 배척하는 가치관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그의 입장에서 볼 때 서양·일본에 개항하여 통상하는 것은 천하 망국의 지름길이 된다. 개항으로 오랑캐의 나라가 되어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화국(華國) 상태에서 망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유인석은 외쳤다.

조선에 부임한 서양 외교관이나 선교사들은 위생과 청결, 생활의 편리 차원에서 단발을 적극 권했다. 주자성리학 원리주의자들은 목을 벨지언정 단발은 불가하다며 극력 저항했다. 머리카락과 수염은 하늘이 준 것이요, 부모가 낳아주신 귀한 존재여서가 아니다. 그들이 목숨 걸고 단발에 저항한 이유는 따로 있다.

오래 전부터 대국(大國), 상국(上國), 천자(天子)의 나라 중국에서 머리 길러 상투 트는 제도를 가르쳤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옛날부터 이보다 더 중요시 여긴 제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유인석 같은 수구 꼴통 주자성리학자 입장에서 볼 때 아무리 위생상 지저분해도 상투란 중화문명의 상징이요, 단발은 야만의 표식이었다. 단발령에 대한 저항은 보건 위생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중화 문물의 고수라는 문명사적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할 중대사였다.

주자성리학자들이 단발령에 목숨 걸고 저항한 이유는 머리카락이 부모가 주신 귀한 존재여서가 아니다. 오래 전부터 대국, 상국인 중국이 조선 사람들에게 머리 길러 상투 트는 제도를 가르쳤기 때문이다. 즉 상투란 중화 문명의 상징이요, 단발은 야만의 표식이었다. 주자성리학자들에게 단발령은 중화 문물의 고수라는 문명사적 차원의 중대사였다.
주자성리학자들이 단발령에 목숨 걸고 저항한 이유는 머리카락이 부모가 주신 귀한 존재여서가 아니다. 오래 전부터 대국, 상국인 중국이 조선 사람들에게 머리 길러 상투 트는 제도를 가르쳤기 때문이다. 상투란 중화 문명의 상징이요, 단발은 야만의 표식이었다. 주자성리학자들에게 단발령은 중화 문물의 고수라는 문명사적 차원의 중대사였다.

 

근대란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의 구현을 뜻한다. 하늘이 인간에게 준 불가역적인 자유, 즉 생각하고 말하고 거주이전이 가능하고, 개인이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을 보호해주는 시스템 말이다. 항일 의병운동의 거두 유인석은 의회 설립, 민주주의, 개인의 자유와 만민평등을 극력 저주하고 거부했다.

그는 공화제와 입헌제가 기본이 된 민주주의를 격렬하게 비판했다. 주자성리학에 입각하여 제왕은 하늘의 명을 받아 만방을 다스리고, 만민에 군림하는 것이 모든 교화의 근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제왕이 존재하는 것이 중화이며, 문명의 근본이라고 그는 외쳤다. 그 중에서도 특히 평등·자유가 어지러운 싸움을 일으키는 칼자루라고 격렬하게 비판했다. 그의 주장은 이렇다

“평등하면 질서가 없고, 질서가 없으면 어지러워진다. 자유라 하면 사양하지 않고, 사양하지 않으면 다투게 된다. 오늘날 세계의 어지러운 다툼은 평등·자유에서 야기되는 것이다. 이런 일을 그치지 않는다면 인류는 멸망할 것이고 천지는 반드시 붕괴할 것이니 개화파들의 무분별한 평등·자유관은 세계의 최악설(最惡說)일 뿐이다.”(유인석 지음·서준교 외 역, 『의암 유인석의 사상: 우주문답』, 종로서적, 1984, 35~36쪽)

유인석은 기독교에 대해서도 지극히 부정적이었고, 서학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여학교를 불태울 것을 주장했다. “기독교에 마음을 빼앗기면 유교사회를 지탱하는 삼강오륜이 붕괴되어 망국으로 치닫게 된다”, “여자들이 학교에서 평등·자유 같은 허무맹랑한 악설(惡說)을 배우면 서양처럼 남편을 학대하고, 시부모를 천대하며, 자녀를 망치게 되므로 여학교가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유인석이 의병투쟁을 통해 이루려 했던 것은 조선의 독립이 아니라, 주자성리학 국가 재건을 통한 중화의 보존이었다.
유인석이 의병투쟁을 통해 이루려 했던 것은 조선의 독립이 아니라, 주자성리학 국가 재건을 통한 중화의 보존이었다.

 

자유·평등은 나라 망치는 최악설(最惡說)

유인석은 국내에서 의병활동이 탄압을 받자 1905년 만주, 연해주로 망명한다. 해외에서 의병 투쟁을 통해 그가 이루려 했던 것은 조선의 독립이 아니라, ‘주자성리학 국가 재건을 통한 중화의 보존’이었다. 도덕을 구하고 천하를 다스리려면 주자성리학을 바로세워야 하는데, 여기에 전념해야 이상적 통치가 가능하다면서 “중화를 존중하고 양이를 적으로 삼아라!”라고 외쳤다.

이러한 사람들이 수행한 항일 의병투쟁을 우리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금과옥조처럼 떠 받들며 “위대한 민족의 등불”이니, “거룩한 항일운동가”라고 종교 차원에서 추앙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다시 말하면, 구한말 의병의 거두들은 유인석을 비롯하여 거의 예외 없이 개인의 자유를 허용해서는 안 되며, 평등사상은 나라를 망치는 미친 짓이고, 단발을 하면 인간은 짐승으로 타락한다고 울부짖었다. 공화제나 입헌군주제, 민주주의를 하면 군신 기강이 무너져 금수(禽獸)의 야만 상태로 전락하고, 여성들이 신교육을 받으면 남편을 졸로 알고, 시부모를 학대하며, 자녀를 망치게 되므로 고약한 풍속을 예방하려면 여성을 집안에 가둬두어야 한다고 악을 썼다.

개항을 하면 나라가 망하니 주자성리학의 도를 받들어 쇄국·위정척사로 자급자족의 아름다운 풍속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사회를 영원무궁토록 유지하기 위해 그들은 의병 봉기했고, 연해주·만주에서 의병 투쟁을 계속 했다.

구한말 의병봉기는 자연스럽게 독립군의 만주·연해주 항일무장투쟁으로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유인석이 지키려던 주자성리학의 도는 조선의 항일투사들을 후원하는 소련을 추종하고, 공산주의를 떠받드는 쪽으로 자연스럽게 전이되었다. 공산주의가 주자성리학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1919년 3·1운동은 비폭력·무저항 독립운동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인도의 성웅(聖雄) 간디보다 한참 전에 비폭력·무저항의 의로운 투쟁으로 인류의 심금을 울린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탄압으로 3·1운동이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막을 내리자 이동휘를 필두로 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 원년”으로 선포한다.

이때부터 만주·연해주 일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독립군 부대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조직되기 시작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고, 모래알로 쌀밥을 짓는” 신출귀몰하는 재주는 아무나 타고나는 게 아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봉기한 항일무장부대가 홍콩판 무협영화에 나오듯 이슬을 핥고, 장풍(掌風)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연해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항일 무장부대는 다른 조직이나 단체로부터 무기·식량·피복·탄약 등을 공급받지 못했다. 각 부대가 각자 알아서 요령껏 보급투쟁을 전개하여 자체 해결했다는 뜻이다. 연해주와 만주 일대에 거주하는 한국인 교민들이 그 무거운 짐을 짊어졌다. 연해주에서 조직된 무장부대들은 자신들의 삶터이자 본거지가 그곳이었으니 별 마찰이 없었지만, 간도에서 이동해 온 무장대원들은 큰 어려움에 부딪쳤다.

독립 군자금 마련 위해 무장강도하다 체포된 김좌진

때로 간도에서 연해주로 건너간 한인 무장부대는 현지 거주 한인들에게 폭도로 인식되었다. 실제로 한인 무장부대가 연해주 일대에서 한인들을 대상으로 약탈을 자행한 경우가 적지 않다. 일본군 정보문서에는 연해주 현지 주민에 대한 한인 독립군 부대의 약탈행위에 대한 보고가 끊이지 않았다(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1918-1922)」, 고려대 박사학위논문, 2009, 112쪽).

청산리 전투의 영웅이자 항일무장투쟁의 위대한 별로 알려진 인물이 김좌진이다. 그는 서간도 지역에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하려는 거창한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독립운동도 돈이 있어야 가능한 것 아니겠는가. 아무리 궁리해도 돈 나올 곳이 막막하자 김좌진은 독립운동에 필요한 군자금을 무장 강도라는 다소 과격한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그가 강도 행각을 벌인 정황은 그의 전기에는 ‘의거’로 소개되어 있다.

김좌진은 만주에서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서울에서 6차례에 걸쳐 무장강도 행각을 벌이다 일경에 체포되어 2년 6개월 형을 살았다.
김좌진은 만주에서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서울에서 6차례에 걸쳐 무장강도 행각을 벌이다 일경에 체포되어 2년 6개월 형을 살았다.

 

김좌진의 첫 번째 ‘의거’는 1910년 12월 4일 밤 실행되었다. 이날 김좌진은 동지 안승구·민병옥·조형원·이영렬 등과 함께 몽둥이와 쇠칼을 소지하고 서울 서부 반석방 한림동에 거주하는 우성모의 집을 털었다. 일행은 방 안에 침입하여 돈 4원, 은제 5작 2개, 은제 반지 15개, 은 귀고리 한 개를 빼앗았다(박환, 『만주벌의 항일영웅 김좌진』, 도서출판 선인, 2016, 93쪽).

두 번째 ‘의거’는 13일 후인 12월 17일, 서울 북부 제동 남정철의 집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 여기서 20원을 노획했다. 3차·4차… 총 6차 범행 과정에서 자신의 증조부 집까지 털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6개월 옥고를 치른다.

『만주벌의 항일영웅 김좌진』의 저자 박환은 김좌진의 행위를 “단순한 강도가 아니라, 강도(일본)에게 귀중한 것(나라)을 빼앗겨 고통 받고 있는 남(우리 민족)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희생한 행위”라고 칭송한다. 조국이 강점된 극한 상황에서 자체적으로 군자금을 해결할 수 없었던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그것뿐이었다는 이유로…(박환, 앞의 책, 94쪽).

위조지폐 제조, 동포 살해, 아편 밀매…

만주로 망명한 김좌진은 1917년 만주 안동(현재의 단둥)에서 중국 지폐를 위조하여 군자금으로 사용하려다 동지들이 체포되면서 실패한다. 위조지폐 제조는 1910년대 독립운동가들이 만주에서 주로 사용한 방법이었다(박환, 앞의 책, 100쪽). 1925년 만주에서 조직된 신민부의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한 김혁은 1914년 7월 하순경 동지 예대희(경북 청도 출신), 홍승국(충남 천안 출신) 등과 함께 집안현 통구에서 서북방으로 3리 떨어진 도절령 기슭 조선인 집에서 중국 화폐를 위조하여 군자금 마련을 추진했다.

만주나 연해주의 한인 마을에 주둔한 독립군들이 동포를 위하기보다는 무슨 권력이나 쥔 것처럼 위세를 부리며 한인 동포들을 등쳐먹고 괴롭힌 사례는 부지기수였다. 김좌진도 그런 사례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참으로 미안하고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만주 한인 사회에서는 김좌진을 ‘만주벌의 마왕’이라고 불렀다(이호룡, 『한국의 아나키즘: 운동편』, 지식산업사, 2015, 339쪽). 마적 같은 약탈꾼, 폭군 같은 짓을 서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유시로 들어가려던 김좌진은 러시아 적군이 무장해제를 요구하자 이를 거부하고 간도로 돌아가 신민부 설립에 참여한다. 이 와중에 김좌진의 독립군 부대는 마을 주민에게 군자금을 반강제적으로 징수했고, 징병제·둔전제를 실시하면서 민심이 크게 이반되었다. 김좌진의 총애를 받았던 이백호는 주둔지역의 한인 농민들이 지시를 따르지 않자 사살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박환, 앞의 책, 205~206쪽).

이런 사례는 많지만 무장 독립운동을 내세운 독립군 세력이 한인 동포를 등쳐먹은 낯부끄러운 일화가 연해주에서 독립단을 표방하며 한인들을 살해한 최영호 사건이다. 한일합방 전에 대한제국 황실 경호원이었던 것으로 알려진 최영호는 지린(吉林) 지역에서 한인 청년 100여 명을 모아 활동하다 연해주로 넘어왔다. 그들은 연해주 그로데코프 일대 한인 마을을 돌며 군자금 명목으로 금품을 갈취했다. 그것도 모자라 주민들을 일본 밀정으로 몰아 살해하고 소지품을 약탈했다. 최영호는 한인 양민을 괴롭히던 중 참다 못한 주민들의 봉기로 살해당했다.

한인 무장부대는 무기 구입 자금 마련을 위해 아편 재배나 밀매에도 뛰어들었다. 인적이 드문 산에 아편을 재배하여 중국으로 몰래 반입하여 판매했는데, 고소득을 올릴 수 있어 많은 한인들이 참여했다고 한다.

권총강도로 카지노 털다 사살된 장덕진

항일투쟁을 위한 군자금 마련은 어떤 수단 방법이 동원되든, 거룩하고 숭고한 행위로 추앙받는 분위기였으니 너도나도 ‘독립 군자금 마련’ 명목으로 무장 강도, 권총 강도 행렬에 나서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설산(雪山)이라는 호로 우리에게 알려진 장덕수의 동생 장덕진이 그런 사례 중의 하나다.

장덕진은 3‧1운동이 발발하자 만주로 건너가 관순현(寬旬縣) 홍도구(弘道溝)에 본거지를 둔 대한청년단연합회에 투신했다. 장덕진은 이 연합회 산하의 별동대 소속으로 1920년 8월 3일 국내에 침투하여 평안남도 경찰부 청사에, 8월 15일에는 신의주 철도호텔에 폭탄 공격을 가했다.

1923년 12월 장덕진은 상하이 교민단 산하에 김구를 고문으로 한 의경대(義警隊)를 조직하고 수석단원(행동대장)이 되었다. 1924년 8월 하순 장덕진은 동지 최천호와 함께 군자금 마련을 위해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위치한 외국인 카지노를 습격했다. 장덕진은 권총을 들이대고 도박판 위에 있는 판돈을 탈취한 후 문을 나서다 중국인 경비가 쏜 총에 맞아 절명했다.

독립운동가 장덕진. 그는 독립 군자금을 마련한다면서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위치한 외국인 카지노에서 권총강도로 판돈을 털다가 중국인 경비가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독립운동가 장덕진. 그는 독립 군자금을 마련한다면서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위치한 외국인 카지노에서 권총강도로 판돈을 털다가 중국인 경비가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권총강도로 외국인 카지노를 털다 총 맞아 죽은 범죄행각도 ‘독립군자금 마련’의 세례를 받으면 거룩한 애국·헌신·희생으로 둔갑한다. 임정은 장덕진의 거사 의도가 독립자금을 만들려는 국사(國事)의 일환이었다는 점을 감안하여 독립유공자로 간주, 의경대 이름으로 장례를 치르고 추도식을 거행했다(이경남, 『설산 장덕수』, 동아일보사, 1982, 228~230쪽). 인터넷의 ‘다음백과’를 검색하면 장덕진과 관련하여 그의 사인(死因)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1924년 3월 21일 상해청년동맹회를 발기하여,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던 중 같은 해 8월 중국인에게 저격당해 순국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연해주 한인 사회는 1884년 이전에 도강하여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경우 1가호당 15데샤치나(약 4만 9,000평)의 토지를 분배받았다. 이를 토대로 재산을 불려 부농이 된 사람들이 원호인(元戶人)이라는 지도층을 구성했다. 반면에 그 후 두만강을 건너온 사람들은 토지를 분배받지 못해 광산 노동자, 소작, 어부, 날품팔이로 어렵게 살면서 여호인(餘戶人)으로 불렸다.

같은 한인 동포지만 부의 정도가 현격하게 달랐으니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의 후폭퐁으로 적백 내전이 발발하자 재산을 둘러싼 분쟁이 극한을 치달았다. 원호인들은 재산을 지키기 위해 백군과 그들을 지원한 미국·일본 등 연합군 편에 섰고, 여호인들은 부자들 재산을 빼앗기 위해 공산혁명을 지지하는 적군에 가담하여 빨치산 세력을 형성한다. 양측은 적대세력이 되어 서로가 서로를 밀고하여 죽고 죽이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연출되었다. 그 비극의 뇌관을 격렬하게 때려 대폭발을 일으킨 사건이 1921년 6월 28일 발생한 자유시 참변이다.

홍범도는 이동휘가 중심이 된 한인사회당(상하이파 고려공산당)과 가까운 관계였다. 홍범도도 이동휘 일파가 선동한 “독립군의 통합 및 소련 적군의 보급 지원”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가 1921년 봄 러시아 자유시(스보보드니)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 상하이파 고려공산당 간에 헤게모니 쟁탈전이 작렬한다. 이르쿠츠크파가 우세한 정황이 전개되자 홍범도는 재빨리 상하이파 진영을 탈출, 이르쿠츠크파 진영으로 투항한다. 그 직후 자유시 참변이 발생한다.

자유시에선 한인 무장부대가 동료 대원 수백 명 사살·체포

일본군을 시베리아에서 철군시키기 위해 다롄(大連)회담에 임한 레닌 정부는 일본 측으로부터 철군의 전제조건으로 연해주와 간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한인 무장부대의 해산을 요구받는다. 레닌 정부는 이 일을 추진하기 위해 이동휘에게 금화 100만 루블이라는 천문학적인 뇌물을 제공하고 공수(攻守)동맹을 체결한다.

레닌이 이동휘에게 제공한 막대한 뇌물은 공짜가 아니었다. 첫째,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공산화할 것, 둘째, 연해주와 간도 일대에서 활동하는 한인 무장부대를 소련 적군 산하로 편입시킬 것. 이 두 가지를 처리하는 대가가 금화 100만 루블이었다. 이동휘는 연해주와 간도 일대의 한인 무장부대를 자유시로 유인하기 위해 “독립군 대통합으로 단일 지도부 형성”, “소련으로부터 무기와 보급 지원”을 내세워 한인 무장부대를 자유시로 끌어들였다.

레닌 정부로부터 금화 100만 루블이라는 천문학적인 자금을 받고 한국 무장 독립부대를 자유시로 끌어들인 이동휘. 그는 한인 독립군들을 유인하기 위해 "한국 독립군 단일 지도부 형성, 소련 으로부터 무기와 보급 지원"을 선동했다.
레닌 정부로부터 금화 100만 루블이라는 천문학적인 자금을 받고 한국 무장 독립부대를 자유시로 끌어들인 이동휘. 그는 한인 독립군들을 유인하기 위해 "한국 독립군 단일 지도부 형성, 소련 으로부터 무기와 보급 지원"을 선동했다.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 무장부대 중에는 소련 적군 산하로 편입되는 것을 원치 않는 세력들이 많았다. 한인 독립군 부대 중 절반 이상이 소련 적군 편입을 거부하고 저항하자 레닌 정부는 무장 해제를 명령한다. 저항하는 한인 무장부대의 해산은 소련 적군 및 그들과 손잡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산하의 한인 무장부대가 담당했다.

홍범도는 재빨리 수백 명의 동료들을 사살·체포하는 편에 선다. 그 결과 숨이 끊어진 자들은 저승으로, 목숨이 붙어 있는 자들은 시베리아 벌목장으로 끌려가 무장부대의 씨를 말려버리는 작업에 일조한다.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이 주최하는 제1회 극동 제(諸)민족대회(극동인민대표대회)가 열렸다. 홍범도는 한인 무장세력 대표로 선출되어 모스크바를 방문한다. 대회 참가 직후 홍범도는 레닌과 면담하는 성은을 입는다. 레닌은 홍범도에게 “혁명정권에 협조해줘 감사하다”면서 러시아 화폐 100루블과 군복 한 벌, 홍범도 이름이 새겨진 권총을 선물로 주었다(장세윤,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영웅 홍범도』, 역사공간, 2017, 221~223쪽). 레닌이 하사한 군복과 권총을 홍범도는 죽을 때까지 곱게 모셨다.

자유시 참변 당시 가해자 편에 가담하여 동료 한인 무장대원들을 사살, 체포하는 데 일조한 홍범도. 그는 자유시 참변 후 모스크바를 방문, 레닌으로부터 권총과 군복, 러시아 돈 100루블을 선물로 받았다.
자유시 참변 당시 가해자 편에 가담하여 동료 한인 무장대원들을 사살, 체포하는 데 일조한 홍범도. 그는 자유시 참변 후 모스크바를 방문, 레닌으로부터 권총과 군복, 러시아 돈 100루블을 선물로 받았다. 옆구리에 차고 있는 권총이 레닌이 선물한 것이다.

 

홍범도, 자유시 참변 후 레닌에게 군복·권총 선물받아

잔치가 끝나면 사냥개를 삶는 법이다. 소련은 자신들에게 협조한 홍범도 이하 이르쿠츠크파 한인 무장부대를 이르쿠츠크에 모아놓고 공산화 교육을 시킨 다음 해산시켜버렸다. 한인 무장부대가 해산 당해 갈 곳이 없어진 홍범도는 1923년 8월 이만 근처의 까잔린구역 토지를 지급받는다. 여기에 집단농장을 세우고 4년여 농사를 짓고 벌을 쳤다. 1927년 10월, 소련공산당에 가입한다. 당증 번호는 578492번. 1928년 7월부터 이만 남쪽 스파스크 진동촌으로 이주, 항카호 부근 카멘노 뤼발로프 초원 치머우에 있는 ‘항카의 별’ 콤비나트 지도자로 농사를 지었다(장세윤, 앞의 책, 227~228쪽).

1937년 9월 초 스탈린의 명에 의해 카자흐스탄의 시르다리야강 근처 전 아뤼크촌 사막지대로 강제 이주 당한다. 1938년 4월, 생활환경이 좀 나은 크즐오르다 시로 이주한다. ‘백두산 호랑이’ 홍범도의 생애 마지막 직책은 크즐오르다의 조선극장 수위장이었다. 그는 1943년 10월 25일 그곳에서 눈을 감았다. 이것이 한국인들이 영광스런 징표로 추앙하는 연해주·간도 항일무장부대의 항일투쟁사 뒷담화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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