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 칼럼] 인공지능에 대한 철학적 고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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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8.03.27 09:00:44
  • 최종수정 2018.03.28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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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에 잘 어울리는 자유주의, 진화에 적대적인 전체주의
개인들이 자유를 한껏 누리도록 하는 것이 사회를 발전시키는 길
복거일 객원 칼럼니스트
복거일 객원 칼럼니스트

[대학에서 저를 가르치신 은사 한 분은 우리 사회에서 마르크스의 이념을 전파하는 데 힘을 쏟으셨고 많은 제자들을 좌파 지식인들로 만드는 데 기여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예상과 달리, 박정희 대통령의 영도 아래 대한민국이 경이적 사회 발전을 이루자, 자신의 신념을 정직하게 성찰하셨습니다. 마침내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결론에 도달하자, 공개적으로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우파로 전향하셨습니다.

그 뒤 선생님께선 저와 많은 얘기를 나누셨습니다. 그러나 얘기가 끝나면, 선생님께선 제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으시곤 했습니다. 어느 날 선생님께서 답답하다는 얼굴로 제게 물으셨습니다, “복 선생, 복 선생의 발전 전략은 무엇이오?”

저는 원래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생각을 정리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선생님, 발전 전략이 없다는 것이 저의 발전 전략입니다.”

선생님께선 물론 제 말뜻을 못 알아들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뜻한 것을 자세히 말씀 드리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발전 전략’이란 말엔 어떤 사회적 집단이, 대개는 국가가, 개인들을 이끌어서 사회를 발전시킨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그 말을 쓰는 순간, 우리는 그 전제도 받아들이게 됩니다. 제 대답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한 것이었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은 개인들이 누리는 자유는 그것 자체로 가치가 있다고 여깁니다. 어떤 개인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것은 바로 그 사람 자신입니다. 자신이 필요한 것들과 이루고자 하는 것들을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개인들이 자유롭게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해야 그들의 복지와 행복이 가장 잘 보장됩니다. 그래서 자유주의자들은 개인들의 자유를 한껏 늘리고 그들을 사회적 강제(social coercion)로부터 지키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습니다.

자연히, 개인들이 자유를 한껏 누리도록 하는 것이 사회를 발전시키는 길이 됩니다. (여기서 ‘한껏’은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까지를 뜻합니다.) 사회가 할 일은 그렇게 개인들의 자유가 보장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자유주의자들이 늘 시장을 높이는 사정이 바로 거기 있습니다. 시장이란 말은 개인들이 자유롭게 교섭하고 협력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정이 그러하니, 자유주의자들에겐 미리 정해진 사회적 목표도 그 목표를 이루는 발전 전략도 없습니다. 미래의 사회가 어떤 모습을 할지 자유주의자들은 모릅니다. 그저 개인들의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서 나오는 사회의 모습이 가장 나으리라 믿을 따름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앞날의 청사진이 없는 상태를 견디기 어려워합니다. 선지자나 지도자가 미래의 모습과 그것에 이르는 길을 제시해야, 비로소 마음이 놓입니다.

제가 드린 말씀을 오래 음미하시더니, 선생님께선 길게 한숨을 내쉬셨습니다. 저는 그 한숨의 뜻을 차마 여쭈어보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삶이 목적항도 없는 뱃길이라는 사실을 마음 편하게 받아들이기는 누구에게나 어렵습니다.]

목적론적 세계관과 진화론적 세계관

20세기에 생물학은 경이적으로 발전했다. 생물학 지식은 폭발적으로 늘었고 점점 정확해졌다. 그런 지식의 발전은 우리가 삶을 바라보는 관점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천성이 어떠한지 이전보다 훨씬 잘 알 뿐 아니라 왜 그런 천성을 지니게 되었는지 거의 정확하게 안다. 생명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출현했고 어떻게 발전해왔으며 그런 지구 생태계에서 인류라는 종이 차지하는 자리를 차츰 깨달아 가고 있다.

그런 근본적 변화를 부른 이론은 진화론이라 불리고 진화론을 따라 생명 현상전부를 설명하는 학문은 진화 생물학이라 불린다. 자연히, 생명에 관한 과학적 논의들은 모두 진화론에 바탕을 둔다.

현대 진화론의 정립에 크게 공헌한 미국 유전학자 시오도시어스 도브잔스키(Theodosius Dobzhansky)는 “생물학의 무엇도 진화로 비추지 않으면 조리를 지니지 못한다 (Nothing in biology makes sense except in the light of evolution)”고 말했다. 최근에 미국 진화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Edward Wilson)은 도브잔스키의 선언을 대담하게 확장해서 “과학과 인문학의 무엇도 진화로 비추지 않으면 조리를 지니지 못한다 (Nothing in science and the humanities makes sense except in the light of evolution)”고 말했다. 생명체들과 그들이 생각하고 만든 것들은 모두 진화의 과정을 통해서 나타나고 바뀐다는 얘기다.

진화가 신비스러운 생명 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므로, 그것은 모든 과학들과 인문학들의 ‘문법’이다. 진화론을 따르지 않는 이론들은 모두 문법적으로 그르고 현실에 적용되면 부족한 것으로 판명된다.

이처럼 진화가 근본적 현상이므로, 모든 이념들은 궁극적으로 진화에 의해 정당화되어야 한다. 자유주의자들에겐 다행스럽게도, 자유주의는 진화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이념이다. 시민들이 자유롭게 실험하고 그런 실험들 가운데 가장 나은 것들이 다른 시민들의 지지를 받아서 널리 퍼지는 사회를 지향하는 자유주의는 진화의 과정을 지지한다.

반면에, 전체주의 사회는 본질적으로 진화에 적대적이다. 전체주의 사회에선 시민들이 자기 생각에 따라 실험을 할 자유가 없다. 최고 지도자가 제시한 사회적 목표에 모든 사회적 자원들이 투입된다. 시민들은 자신에게 할당된 일을 해서 할당된 산출량만큼 생산해야 한다. 물론 그들은 그런 투입의 결과에 대해 비판하거나 다른 방안을 선택을 할 자유가 없다. 그래서 전체주의 사회에선 진화 과정이 작동할 수 없고, 사회가 정체된다.

이런 사정이 특히 선명하게 드러나는 분야는 경제다. 시장 경제에선 경제 주체들이 경쟁적으로 다양한 제품들을 내놓고 소비자들의 선택을 통해서 좋은 것들이 퍼지는 과정이 늘 이어진다. 미국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Joseph Schumpeter)가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라 부른 현상도 시장이라는 환경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개체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보다 잘 적응한 개체들이 물려받는 자연 선택 과정을 가리킨다.

모든 방식들과 제품들이 자유롭게 경쟁해야, 그런 자연 선택 과정이 제대로 작용할 수 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는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서만 가장 나은 방식과 제품을 찾아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자유로운 경쟁을 ‘발견 절차(discovery procedure)’라 불렀다.

이처럼 시장은 진화가 아주 빠르게 이루어지는 환경이다. 시장 경제가 번창하고 경직된 명령 경제가 실패한 까닭이 바로 거기 있다.

자연히, 시장에선 실패들이 많이 나온다. 진화는 수많은 변이들(variations) 가운데 환경에 가장 잘 적응된 것들이 선택되어 전파되는 과정을 통해서 나온다. 이것은 대부분의 변이들이 선택되지 못하고 사라진다는 것을 뜻한다. 시장도 마찬가지다. 시장에 나온 상품들은 대부분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진다. 연전에 나온 개략적 통계에 따르면, 미국에서 모험 기업(venture firms)들 가운데 80퍼센트 가량은 이내 사라지고 15퍼센트는 명맥을 겨우 유지하고 5퍼센트가 큰 성공을 거둔다.

자연히, 시장이 활발히 움직여서 많은 실험들이 나올수록 실패들은 많아진다. 그래서 영국 경제학자 브라이언 로우스비(Brian Loasby)는 “시장의 실패를 보이지 않는 시장은 시장으로서 실패한 것이다 (A market which exhibits no market failure is a failure as a market)”라고 말했다.

시장에 의해 실패 판정을 받은 방식들과 제품들을 택한 사람들에게 자유로운 경쟁을 근본 규칙으로 삼은 시장은 매정하게 다가올 것이다. 그리고 끊임없는 경쟁은 사람들을 지치게 한다. 자유롭고 번영하는 사회를 만들어내는 시장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혐오와 증오를 받는 까닭이 거기 있다.

여기서 전체주의와 자유주의의 근본적 차이점 하나가 드러난다. 자유주의자들은 개인들의 자유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 그리고 개인들의 결정들이 조화를 이루는 시장의 판단을 궁극적 판단으로 받아들인다. 미리 정해진 것은 없다.

반면에, 전체주의자들은 미리 정해진 목표가 있다고 믿는다. 마르크스의 역사관은 전형적이다. 그는 인류 사회가 원시 사회에서 발전된 사회들로 이행해서 궁극적으로 공산주의 사회에 이르리라고 예언했다. 그리고 한번 공산주의 사회가 나오면, 역사의 진화는 멈춘다고 주장한다. 이런 목적론적 (teleological) 세계관은 진화론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진화는 목적론적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환경에 맞는 개체들이 덜 맞는 개체들보다 더 많이 살아 남아 더 널리 퍼지는 과정일 따름이다. 생태계도 인류 사회도 어떤 목표나 궁극적 형태를 향해 진화하지 않는다.

진화가 실제로 이루어지는 장소는 개체들이다. 인류의 경우, 진화의 과정이 작용하는 단위는 유전자들을 지니고 삶을 꾸려가서 다음 세대에 자신의 유전자들을 넘겨주는 개인들이다. 추상적 사회가 아니다. 자연히, 개인들이 자유롭게 실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은 본질적 중요성을 지닌다. 민족이나 국가나 인종과 같은 추상적 단위들을 위하는 길을 추구하는 것은 어리석고 해롭다. 우리는 그저 개인들이 자유롭게 실험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면 된다. 나머지는 생명을 창조했고 다양한 종들과 문화들을 발전시킨 진화의 과정이 맡을 것이다.

복거일 객원 칼럼니스트(작가 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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