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한국인은 거짓말을 잘하고 그 거짓말에 관대한가?
천박한 사회, 경박한 사회
2020년 9월에 조사한 한국인의 노비근성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거지근성
노비근성과 마름근성

황승연 객원 칼럼니스트
황승연 객원 칼럼니스트

사람들이 절망에 대해 얘기한다. 그리고 그 절망감의 근원을 묻는다. ‘군부독재시절’이라고 했던 70년대, 80년대, 그 때도 사법부 판사들은 결코 넘지 않았던 선이 있었다. 이에 대한 믿음은 선량한 약자들이 믿고 의지하는 마지막 보루이자 희망이었다. “법이 있어, 법이!”라는 약자의 말 한마디는, 그 법이 우리 개인과 공동체를 보호해준다는 믿음을 표현이었고, 그 법은 모두가 받아들이는 성역 같은 것이려니 하고 믿고 법치를 존중하면서 살아왔다. 요즘 우리 사회에 이것이 깨어진 것으로 보인다. 정의의 표상이어야 할 대법원은 선거도중 허위사실 공표에 대해 무죄의 판례를 남김으로써, 선거토론에서 진실을 말해야하는 의무감 같은 것을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렸다. 이제 거짓말을 해도 무방하다. 사법부가 정치의 하수인이 되는 비극적 장면이다. 현재 우리 사회의 붕괴된 영역 중에서 헌법재판소를 비롯하여 법원이 무너진 것이 가장 치명적이다. 우리 사회의 최후의 보루가 무너진 것이다. 그것도 다름 아닌 우리 사회 곳곳에 넘쳐나는 거짓말에 무너졌다.

검사들이 서로를 제거하려고 제거당하지 않으려고 패를 나누어 다투다 서로 몸싸움까지 갔다. 그 과정에서 폭행을 저지른 검사가 오히려 폭행을 당했다며 병실에 누워있는 사진으로 3류 양아치들이 하는 코미디쇼를 연출하는 것을 보며, 국민들은 돌아서서 씁쓸히 눈물을 훔치는 그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래도 몇 년 전까지는 검찰에 정의를 추상같이 세우겠다는 검사가 더 많을 것이라고 믿고 살았다. 그때만 해도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을 것이라 기대를 가졌다. 오늘의 어려움을 견뎌내며 희망을 갖고 또 내일을 준비하자고 후배들이나 학생들에게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사이에 이런 말을 하면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이거나 사기꾼 취급당하는 그런 시대가 되었다. 지금은 검은 것을 검다고 하면 바보가 되는 그런 세상이다. 거짓을 능청스럽게 얘기해야 하는 그런 시대이다.

한국인의 거짓말

정치인이건 공무원이건 군인이건 거짓말이 일상에 넘치고 있다. 우리 사회의 잘못을 찾아내어 바로잡자는 헌법기관의 장들인 감사원장이나 검찰총장이, 정부나 여당의 정책을 지적하거나 혹은 그 쪽 진영 사람들의 잘못을 조사하면, 충성심이 넘치는 국회의원 몇 명은, 감히 임명권자에게 반기를 든다면서 “대선 불복이냐”며 몰아붙인다. 사표내고 스스로 물러나야 하지 않느냐고 윽박지른다.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혼자 버티는 감사원장의 모습이 애처롭다. 감사원에서 하는 감사를 앞두고 어느 부처는 자료를 통째로 폐기하기도 하고, 서류를 조작도 했다. 이런 일들이 일상적이다. 산자부는 장관을 비롯한 인사들이 감사를 받으면서 이미 했던 진술에 대해,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 자신이 거짓말을 한 것이고 자필 서명한 확인서는 효력이 없다고 일제히 고백을 하는 비극을 보며 쓴웃음을 짓는다. 이들은 국민의 공복이라는 공무원들이다. 정부여당을 보호하려고 온통 거짓으로 도배질하며 국민을 배신했다. 그러나 조작과 은폐가 통했는지 정부여당의 지지도는 여전히 견고하다.

우리 국민이, 그것도 공무원이 공무 중에, 북한군에게 사살되고 시신이 불태워졌다는데 청와대, 국방부, 해수부, 해경 모두 상식 밖의 얘기들만 하고 있다. 신발을 벗어놓고 구명조끼를 입고 사라졌으니 의도적으로 바다에 뛰어든 것이라며 그래서 월북이라 했다. 나중에 밝혀진 신발이라는 것은, 누가 신던 것인지도 모르는, 그것도 굵은 밧줄더미 아래 숨겨진 슬리퍼였다. 해경과 해군은 선박에서 슬리퍼를 신고 근무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를 리 없다. 이렇게 거짓말을 일상적으로 한다. 북한에 구조요청을 못한 원인으로 북한과 통신선이 막혀 있는 현실이 아쉽다고 했다. 그러나 거짓말이었다. 알고 보니 국제상선통신망으로 북한과 의사소통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정부와 군과 경찰이 국민을 상대로 거짓말을 한다. 끝까지 캐물으면 조사 중이라 말할 수 없다고 한다.

KBS는 검사와 채널A 기자가 공모했다는 소위 ‘검언유착 오보’에 대해 사과방송을 하고 또 법정 제재를 받았다. 그런데 국정감사에서 이 오보가 시간이 부족해서 일어난 실수였다고 했다. 오보가 아닌 의도적 거짓 보도를 시간부족이라 변명했지만 이것도 즉시 거짓으로 드러났다. 한국의 대표 방송사 사장의 얘기이다. 한국 사회가 붕괴된 단면이다.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얘기들이 아무렇지 않게 사실로 돌아다닌다. 오히려 거짓을 사실이라 믿으라고 강요당하는 시대이다. 기존의 우리나라 언론들이 대부분 썩어서 악취가 진동한다는 것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진실과 정의를 찾겠다며 버텨주는 기자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언론사에 얼마나 남아있나? 그런 기자들이 이끌어가는 언론사가 몇 개나 있나? 1인 유튜브 미디어보다도 못한 공중파 방송들이나, 조작과 선동이 본업인 종편방송도 있다. 자기 진영이 불리한 기사는 아예 다루지 않는 그런 동네 정보지 수준의 신문들도 있다. 심지어 구독자가 제보한 정보를 갖고 그 기관을 찾아가서 광고와 바꾸는 그런 거래를 하는 신문사들도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하루에도 수없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 사회가 언제부터 이렇게 천박한 사회가 되었으며 왜 이렇게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는지 궁금해 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이 많다. 도덕이 땅에 떨어졌다. 거짓말이 일상화 되어 있다. 진원지가 어디인가?

천박한 사회, 경박한 사회

정의의 표상이어야 할 정의부(Ministry of Justice) 즉 법무부의 장관들이 범법의혹의 한 가운데 있는 것이 수년 동안 일상화 되었다. 법무부 장관이 범법의혹으로 수개월 혹은 수년씩 조사를 받고 재판을 받는다. 이 와중에도 검찰을 지휘한다. 범법에 연루되어 있으면서 어떻게 정의를 말할 수 있나? 법무부 장관 출신이 서류위조에 부정청탁에 직권남용에 주가조작에 셀 수 없는 범죄에 가담한 의혹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지지자들은 이런 죄들을 감싸주느라 이성을 잃었다. 더 심각한 것은 많은 국민들은 이러한 일들을 보고도 그 정도의 범법은 누구나 하는 것이 아니냐며, 남의 일인 듯 대수롭지 않게 대하고 있다. 군사독재시절이라 불리던 시절에도 그 당시 어떤 법무부 장관이 이런 의혹의 중심에 장기간 섰던 적이 있었던가?

어느 사회든 자유민주주의가 정착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덕목은 ‘신뢰’이다. 조선왕조가 500년을 이어오면서 왕조의 존립을 위해 지속시켰던 노비제도는 뿌리 깊은 노비근성을 낳았다. 노비근성의 핵심이 거짓말과 무책임이다. 우리 민족이 버려야할 가장 심각한 질환이다. 건국이후 국민들이 노비근성에서 점차 탈피하면서, 우리나라의 경제발전과 함께 사회적 신뢰를 이해하고 또 신뢰사회의 근간을 차곡차곡 쌓아왔다. 그런데 이 신뢰가 최근 급속히 붕괴되는 것이 보인다. 우리 사회의 경박함과 천박성이 어디서 오는가에 대해 늘 관심을 가져왔다. 우리 국민의 천박성은 바로 노비근성에서 온다는 그런 생각을 해왔는데, 최근에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조사를 하게 되었다.

2020년 9월에 조사한 한국인의 노비근성

지난 9월 초에 ‘재단법인 굿소사이어티’의 요청으로, 필자는 우리 사회의 현 상황을 파악하고, 우리 사회의 당면 문제와 해결책을 찾아보기 위해, 전국의 만 18세 이상 성인 남녀 1,500명을 표본으로 국민의식에 대한 전국 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의 80개의 설문 문항 중 노비근성에 관한 것들만 모아보았다. 설문과 결과는 다음과 같다.

“정직한 사람일수록 더 손해만 본다”는 질문에 전체 응답자의 72.6%가 ‘그렇다’고 답했다. ‘아니’라고 답한 응답자는 단 6.7%였다. 신뢰가 완전히 무너졌고 규범이 와해된 것으로 보인다. 규범이 없는 상태가 아니고, 너무 많은 규범들이 난립하여 전체 사회를 통합시킬 강력한 하나의 규범체계가 붕괴된 상태를 의미한다. 규범이 와해되면 구성원들은 삶의 목표를 상실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 처한 사회를 ‘아노미 사회’라고 한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이러한 상황에서 자살률이 높아진다. 우리나라 자살률(10만 명당 자살자)은 2011년부터 계속 낮아지다가 2017년 24.3, 2018년 26.6, 2019년 26.9로 높아졌다. 이것을 아노미적 자살이라 한다.

우리나라의 2019년 10-30대의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었고, 40-50대 사망원인의 2위가 자살이었다. 현재 자살로 숨지는 사람들의 비율이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 가장 높다. 언론에서는 치열한 경쟁사회의 그늘을 보여주는 지표라 한다. 소외된 계층의 불안감을 이해해야한다고 한다. 그러나 경쟁 때문에 자살률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노력하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없어져 삶의 목표를 상실하게 되면 자살이 늘어난다. 경쟁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 자살을 막는 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은 늘 보호받고, 치료(healing)받고, 위로받아야 할 존재로 취급당한다. 이렇게 점차 목표를 상실해가고 자살률이 높아져간다. 그렇게 오히려 자살률이 늘어간다. 노비근성만 쌓여간다. 노비들에게 내일은 없다. 내일을 가르치지 않는다. 오로지 오늘의 편안함만 가르친다. 45.8% : 18.8%로 “내일보다 오늘의 행복이 더 중요하다”고 답하는 국민들이 더 많다. 내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자살률이 더 낮고 더 건강한 사회이다.

노비근성의 또 다른 면은 자신의 처지를 남 탓으로, 특히 부자들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가진 사람들의 재산은 빼앗아야 한다고 본다. 조사에서 “부자들의 재산이 노동자, 농민들의 피와 땀의 결실을 빼앗아 생긴 것”이라는 질문에 34.5%가 ‘그렇다’는 긍정의 답을 했고 부정을 한 응답자는 불과 30.5%였다. 최고세율 65%라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상속세 제도를 갖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에 대해 물었는데, “부자들에 대한 상속세를 더 올려야 한다”는 질문에 무려 64.7%가 ‘그렇다’고 답했고 14.9%만이 ‘아니’라고 답했다. 이 정부가 부자 증세와 부동산관련 세금의 인상과 공정거래 3법을 강행하며 사회주의 정책을 밀어붙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노비근성을 철저히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들은 그동안 감춰져 있던 노비근성이 자극되어 공짜로 퍼준다는 수많은 복지 기금에 반응한다. 점점 하이예크가 말한 ‘노예의 길’로 빠져 들고 있는 것이다. 이 질문들에서 보수와 진보성향의 사람들 간에 큰 차이(상관계수 0.529)를 보인다. 보수성향의 사람들은 부자들의 노력의 대가와 그의 대물림을 인정하고 있지만, 진보성향의 사람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조사결과이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노비는 자유를 가진 개인의 반대말이다. 노비근성은 자유를 포기하는 마음이다. Erich Fromm이 말한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마음이다. 이번 조사에서도 우리 국민들이 개인을 기꺼이 희생시키는 태도를 볼 수 있었다. “공동체를 위해 개인의 이익을 양보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아름다운 전통이다”라는 질문에 47.0%가 긍정의 답을 17.4%만이 부정의 답을 하였다. “나의 자유와 권리를 양보하더라도 동료들과 경쟁하지 않고 평등하게 살아가는 것이 더 행복한 삶이다”라는 질문에 34.4%가 긍정, 26.3%가 부정, 39.3%가 중립의 답을 하였다. 공동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도록 교육받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강요받고 있다. 공동체를 위해 맹목적으로 개인을 희생하라는 논리에 우리 사회는 점차 전체주의로 간다. 최근의 정부의 선심성 복지정책과 코로나 방역을 핑계로 한 집회금지를 통해 우리나라 국민성 중 잊혀져가던 노비근성이 되살아났다. 경쟁을 죄악시 하고 평등을 선이라고 하는 주장에 사람들은 ‘노비의 안도감’을 느낀다. 이것이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길이고 ‘노예의 길’이다. 그러나 평등, 양보, 공동체, 이웃, 행복, 이런 단어가 주는 ‘선의’에 속게 된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는 유럽 속담이 있다. 그 선의는 거짓말이다. 평등한 사회는 없다. 행복은 희생의 대가이다. 그러나 전체주의적 선동에는 주로 동원되는 거짓말이 평등과 행복이다. ‘한번 말하면 부정하고, 그 다음에는 의심하지만, 반복해서 말하면 결국 믿게 된다’고 한다. 북한주민들은 북한이 가장 행복한 사회인줄 안다. 우리도 훌륭한 지도자 밑에서 예전보다 훨씬 나아진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거짓말에 관대한 노비들의 거지근성

2020년 9월에 조사한 결과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생각들을 정리해보았다.

- 정부 지도층 인사들과 집권당 의원들의 셀 수없는 뻔뻔한 거짓말들도 그것이 무슨 문제란 말인가? 나에게 직접 손해될 일 없는데.

- 그래도 그들은 항상 가진 것 없고 비주류로 살아온 나의 편이었지, 가진 자들 편을 들지는 않았지.

- 구멍 난 국가의 예산이나 늘어나는 국가부채도 나의 일이 아니다. 어차피 난 세금을 내지 않으니까?

- 내 이웃, 내 동료가 잘되는 꼴은 볼 수 없지, 차라리 다 함께 가난 속에 뒹굴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편안한 일인가? 현수막의 구호처럼 ‘조금 불편해도 다함께 평등한 아름다운 세상’이 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 노력하면 더 잘 살 수 있다는 구호, 이 얼마나 황당하고 피곤한 말인가? 경쟁이란 우리 사회의 가장 나쁜 문화이지. 의사가 되는데 성적이 좀 모자라면 어떤가, 봉사정신과 의사가 되고자 하는 그 마음이 더 중요하지. 그 봉사정신은 시민단체가 평가하면 되지 않나?

- 정부가 잘못한다고 핏대를 세우며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부의 일들은 대통령도 장관들도 모두 다 우리나라가 잘되자고 하는 일이지 설마 망하라고 이렇게 하겠어? 나라를 망친 것은 오히려 꼰대 당신들이었잖아?

- 거짓말? 좀 어때서, 우리 사회가 언제부터 그렇게 투명한 사회였다고.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말도 있잖아? 다 잘되자고 하는 일인데 말이야. 그리고 속는 놈이 바보지!

- 내일이 왜 중요해, 지금 이 순간이 없으면 내일도 없어. 지금 나에게 돈을 주는 그 사람이 내 주인이지, 얼마나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기에 나에게 돈을 주지? 내일도 모레도 또 주겠지! 난 그런 사람을 모시고 그런 지도자의 은혜 속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어.

- 경제가 어려워질 수 있다고? 관계없지 나만 어려워지는 것은 아닐 터이니. 배고픈 건 참을 수 있어. 그러나 배 아픈 건 못 참아.

이런 것들을 노비근성이라 한다. 그들에게는 주인의식이 없다. 그래서 내일도 없고, 자유는 귀찮고 부담스럽다. 그래서 책임도 없다. 거짓말이 일상적인 일이다. 나의 불행과 고통은 모두 남 탓이다. 자유를 갖고 사는 피곤한 삶보다, 착한 주인이 나의 삶을 책임져주면 그것이 행복한 나라이다. 한번 거지로 살면 너무나 편해서 다시는 정상으로 돌아오지 못한다고 한다. 이 정부와 많은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그런 거지의 나라로 가기를 바라고 있다. 아르헨티나, 베네주엘라, 그리스와 같은 나라로. 또 대표적인 거지의 나라가 북한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 사회는 지난 3년 동안 북한 사회와 많이 비슷해져 가고 있다. 민족의 동질성 회복이라 해야 하나? 점점 우리 사회는 그들의 목표로 가는 중이다. 우리 사회는 지난 3년간 급격하게 변했다. 우리 사회의 3년 후는 어떤 모습일까? 우리 사회의 종착역은 어디인가? 조사결과로 본 우리 사회의 미래는 끔찍하다.

노비근성과 마름근성

여당의 선량들은 완장을 찬 기분을 충분히 즐기고 있는 것 같다. 노비 중에 주인을 대신하여 노비나 소작농을 관리하는 사람을 ‘마름’이라 한다. 주인에게는 노비는 자신의 재산이지만 마름에게는 그냥 군림의 대상일 뿐이다. 그래서 마름이 주인보다 더 악랄하다. 감사원장에게 눈을 부릅뜨고 대선불복이냐고 다그치는 모습에서 악랄한 마름의 모습을 본다. 야당이라고 무엇이 다르겠나? 지난 총선에서 완장을 찼다고, 애국심으로 가슴 뛰는 비전을 얘기하는 의원들, 불의에 분노하는 의원들,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집요하게 따지고 드는 의원들 모조리 다 쳐냈지 않나? 지금도 적에게 아픈 말 한마디 했다가 적의 공격을 받게 되면, 그것이 이유가 되어 즉시 윤리위원회 회부하니, 제명 처분을 하니 하면서 같은 편을 죽이는데 더 극성이다. 딱 마름들이 하는 짓을 하고 있다. 그러니 2중대 소리를 듣는다. 산토끼를 잡는다며 그렇게 하다 보니 산토끼를 잡기는커녕 부서진 울타리 사이로 집토끼도 다 도망가고 얼마 남지 않았다. 보수 우파 야당이 극복해야할 것도 역시 다름 아닌 노비근성이다. 그런데 그들도 완장을 찼다고 노비가 아닌 줄 안다. 노비근성의 다른 쪽 한 면이 양반근성인 것을 모르는가? 그들이 자유도 개인도 시장도 국가도 모르는데 누구 탓을 하겠는가? 아, 불쌍한 대한민국 후손들이여.

황승연 객원칼럼니스트(경희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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